## 93화. 당한 건 그대로 갚아줘
“천 귀인이 거절했다?”
“예, 폐하.”
황제가 재차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한 우 귀인은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천 귀인은 온 귀인과 어울리기를 싫어합니다, 폐하. 그렇지만 천 귀인이 온 귀인을 괴롭히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거리를 둘 뿐이지요. 그러니 천 귀인이 나쁜 뜻이 있어서 온 귀인의 초대를 거절한 건 아닐 거예요, 폐하.”
우 귀인의 말은 천 귀인을 질책하는 게 아니라 두둔하고 감싸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황제가 바로 믿기 어려워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니, 승빈이 온 귀인에게 다가가 위로했다.
“천 귀인이 순수하지만 철이 조금 없지. 감정을 숨기지 못할 뿐 속내가 나쁜 아이는 아니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당연하지요. 감사합니다, 승빈 마마.”
이어서 다른 후궁들도 온 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정말로 천 귀인이 온 귀인의 초대를 거절한 것처럼 되어갔다.
의심하기에는 그런 행동을 보이는 후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황제는 더 이 문제를 묻지 않고 적당히 온 귀인을 위로해 주다가 돌아갔다.
황제가 천 귀인의 부재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자, 온 귀인은 내내 불안해하던 걸 멈추고서 활짝 웃었다.
온 귀인이 웃으면서 우 귀인을 보자, 우 귀인은 ‘거봐. 내가 뭐랬어?’ 하듯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팔짱을 꼈다.
“겁먹을 필요 하나도 없어요, 온 귀인. 천 귀인이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회임하지 못하는 이상 끝이에요.”
어느새 승빈도 물길 따라 흘러오듯 자연스럽게 다가오더니 온 귀인의 다른 한쪽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을 더했다.
“동생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품계가 오르지 않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품계가 오르는 건 확실한 일이지. 천 귀인은 회임도 하지 못했고 멍청해서 따로 공을 세우지도 못해. 가문이야 동생보다 훨씬 떨어지고. 그러니 천 귀인이 지금 잠시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겁낼 필요 하나도 없어, 동생.”
우 귀인은 속으로 ‘당신이 언제부터 온 귀인하고 친했다고 동생이라 부르냐’고 생각했지만, 말없이 미소 짓고만 있었다.
온 귀인은 한 궁을 사용하는 승빈이 친근하게 대해주자 그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온 귀인은 막 입궁했을 때는 문안에서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다가, 후궁들이 모두 자신에게 잘 대해주자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행복한 듯했다.
아직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보다는 다른 후궁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게 더 기뻐 보였다.
“저쪽으로 가자, 동생. 귀한 몸인데 더위를 먹으면 안 되잖아.”
승빈이 정자로 그녀의 팔을 가볍게 끌자, 온 귀인은 배 위에 손을 올리고서 승빈을 따라 정자로 이동했다.
정자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온 귀인이 자리를 잡자 비빈들은 다시 그녀를 둘러싸고서 밝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조금 전 황제가 언급한 천 귀인 쪽으로 흘러갔는데, 아무래도 천 귀인이 자리에 없다 보니 좋은 쪽으로 가지 못했다.
후궁들은 온 귀인이 천 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 걸 알게 되자, 천 귀인이 얼마나 멍청한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황제가 총애하기 전에는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는지에 대해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을까. 승빈이 한참 천 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잠시 말을 쉬는 틈에 우 귀인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면서 은근히 말을 꺼냈다.
“궁궐에서는 폐하의 총애를 받아야 편히 사는데. 천 귀인은 혼자 살겠다며 총애를 독점하고 있잖아요. 천 귀인을 총애하시기 전에 폐하는 후궁들에게 고루 총애를 베푸셨는데, 천 귀인이 끼어든 후로는 다른 비빈들에겐 신경도 써주지 않으세요. 전 가끔 천 귀인이 폐하께 우리에 대해 나쁜 말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좀 걱정됩니다.”
승빈은 자기 말이 끊기자 잠깐 인상을 찌푸렸으나, 우 귀인의 말이 옳다고 여겨서 차갑게 말을 보탰다.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아니면 폐하께서 천 귀인을 총애하자마자 우리를 냉대하실 리가 없지.”
그러자 곁에서 동그란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고 있던 규빈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부채를 내려놓고서 후궁들을 살피며 물었다.
“천 귀인이 폐하를 독점하고 폐하는 천 귀인만 총애하시니, 우리끼리라도 뭉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 귀인은 얼른 말을 받았다.
“염 귀인도 천 귀인 때문에 죽었잖아요. 우리가 뭉치지 않으면 천 귀인이 우리를 하나하나 쳐내려 할지도 몰라요.”
비빈들은 염 귀인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조용해졌다. 염 귀인이 천 귀인에게 그나마 호의를 보였던 후궁인 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천 귀인은 염 귀인이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은 천 귀인이 맹해 보이지만 아주 비정한 성격이라고 수군거렸다.
천 귀인이 염 귀인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니라는 의견이 강했으나, 저승사자가 천 귀인을 잡아가는 대신 염 귀인을 데려갔단 소문은 흉흉하게 돈 바가 있었다.
우 귀인은 후궁들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온 귀인이 걱정스럽게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천 귀인을 따돌려야 하나요? 하지만 그랬다가 폐하께서 노하시면…….”
우 귀인은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노하시긴요. 그럴 일이 있어요? 천 귀인이 먼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폐하만 챙기는 거잖아요. 천 귀인이 우리를 무시하니, 우리끼리 서로를 챙긴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요.”
다른 후궁들도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은 천 귀인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니, 지금처럼 계속 행동한다고 해서 그게 문제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같이 안 어울리는 건 괴롭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안 챙겨도 천 귀인은 폐하가 있는걸요. 천 귀인은 폐하만 따르게 두고 우리끼리 잘 챙겨주면 돼요.”
“우리가 뭉쳐 있어야 천 귀인도 우리를 해코지하지 못할 겁니다.”
천 귀인의 이복동생인 영빈은 자신이 나서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아 힐긋 연비를 보았으나, 연비가 묘한 미소를 짓고서 가만히 있자 자신도 입을 다물었다.
천 귀인의 동복 언니인 연비는 후궁들의 말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굳이 여기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기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개시시는 연비만큼 융통성이 좋지 않았기에, 연신 초조하게 부채 손잡이를 손톱으로 긁으며 사방을 살폈다.
천 귀인을 좋아하는 그녀는 이 상황에 자신이 아무 말 없이 있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아 꺼려졌다.
결국, 후궁들이 다 같이 천 귀인을 따돌리려는 분위기로 하자, 개시시는 용기를 내어서 한 번 더 나서보았다.
“천 귀인은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폐하가 총애한단 이유로 따돌리는 건 아닌 거 같아요……. 폐하가 우리 중 다른 누군가를 총애할 때도 있을 텐데, 그때마다 그 사람을 따돌릴…….”
그러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개 답응이 천 귀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아무도 안 말리니까. 천 귀인한테 가서 붙으면 되지, 왜 여기에 죽치고 있어요?”
“!”
“자기도 혼자 있기 싫어서 모였으면서, 혼자 착한 척, 어쩔 수 없이 우리랑 어울리는 척하면 좋을까? 난 저런 사람이 제일 가증스럽더라.”
안비가 웃으면서 중얼거린 말에 개시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개시시의 궁녀는 정자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보며 자기가 다 초조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개시시가 한 마디라도 더하면 그녀까지 졸지에 모든 비빈의 공적이 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개시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자, 상황을 지켜보던 남빈이 나서면서 개시시의 손을 쥐고 웃었다.
“개 답응은 착한 거지요. 입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몰아가고 그러지 말아요. 마음이 여린걸.”
남빈 역시 천 귀인이 몰리는 상황이 불편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날카롭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슬그머니 개시시라도 감싼 것이었다.
다른 후궁들은 ‘착하기는’ 하고 계속 개시시를 비웃었으나,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는 눈앞에 없는 사람을 욕하기가 더 쉬웠기에 다시 천 귀인을 헐뜯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를 지켜보며 우 귀인은 부채를 입가를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천소여. 이건 복수의 시작일 뿐이야.’
염 귀인이 천 귀인 때문에 죽었으니, 자신도 천 귀인을 죽여야 했다.
천 귀인의 피로 염 귀인의 한을 씻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서책을 펼쳐서 억지로 글자를 머리에 집어넣고 있을 때였다.
부성이 오만상을 찌푸리고서 손 씻을 물을 가지고 들어와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낮부터 내내 저 상태이기에 뭐. 이젠 그러려니 한다. 후궁들이 날 빼고 모인 일 때문에 계속 저러겠지.
“괜찮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괜찮아요, 소주.”
“난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
내가 그 후궁들과 어울릴 일이 적다는 건 내 자유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단 거니까.
어설프게 천소여 흉내를 내면서 끼어 있느니, 그냥 무공 훈련이나 하면서 지내면 되지!
“소주…….”
하지만 부성은 내가 일부러 밝게 말한다고 여기는지 날 아주 가엾게 쳐다본다.
굳이 걱정하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어서, 나는 부성이 가져온 물에 두 손을 씻고서 원웅이 내민 천에 손을 닦았다.
이제 두 궁녀가 내가 먹을 음식을 날라올 것이다.
그런데 웬걸. 온종일 부성과 맞먹을 정도로 표정이 구겨져 있던 원웅이 아까보다는 표정이 좀 풀려 있었다.
이제 원웅도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단 걸 알게 된 건가, 싶어서 쳐다보자 원웅이 새초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얼음을 가지러 갔다 들었는데요, 소주. 승빈이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탕 궁의를 부르고 난리가 났대요.”
“진짜야?”
부성은 모르던 이야기인지 얼굴이 환해져서 되물었다.
“응. 승빈 궁녀가 자기 소주 죽는 거 아니냐고 난리 났어. 엄살은.”
부성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하다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소주도 기쁘죠, 하고 묻는 얼굴로.
기쁘냐고? 글쎄. 기쁠 일 없다.
“소주는 안 놀라시네요?”
놀랄 일도 없고.
놀랄 필요가 있나. 승빈 차 상자에 상한 찻잎을 넣어두고 온 게 나인데.
후궁들이 다 자리를 비웠다기에 잘됐다 싶어서 아까 얼른 다녀왔지.
내가 천소여 몸으로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승빈이 소주방 궁녀를 통해 나한테 이상한 걸 먹이려 했던 일은 다 기억하고 있었거든.
나한테 먹이려던 걸 그대로 돌려주었으니, 승빈도 억울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흐뭇하게 웃으면서 다시 서책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원웅이 “아.” 하고 품 안에서 반듯한 서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거요, 소주.”
“뭐야?”
얼결에 서찰을 받아 들고서 묻자, 원웅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무부에서 만난 개 답응 궁녀가 줬어요. 전에 개 답응의 사촌이 소주께 무례한 일이 있었다고, 사과하는 서신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