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초대받지 않은 사람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동안 푹 자고 나니, 개원을 보았단 것 외에는 생각나는 일이 많이 없었다.
천소여 머리가 나쁜가? 그게 이상해서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자니, 침상 근처에 서 있던 원웅과 부성이 훌쩍이면서 나를 병자처럼 대했다.
“소주,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괜찮으신 거예요?”
“소주, 저희를 알아보시겠어요?”
“왜 이래?”
그 행동들이 너무 황당해서 내가 떨떠름하게 묻자, 원웅과 부성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더욱 울먹거렸다.
“소주께서 하루 내내 깨어났다 주무시길 반복하셨으니까요.”
“계속 과꽃이 보고 싶단 말씀만 하셨어요.”
“폐하께서 오셨는데 과꽃 가져오란 말만 하다가 도로 주무시고…….”
“기억나지 않으세요?”
내가 황제한테 과꽃 가져오란 말을 하다가 잤다고? 내가?
“…….”
자세히 떠오르진 않지만 듣고 보니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기도…….
내가 기억이 좀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지, 원웅은 따뜻한 차를 가져오겠다면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부성은 조금 더 누워 있으라고 이불을 위로 끌어올려 주면서 나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더 누워 계세요, 소주. 탕 궁의를 불러올게요.”
딱 그 말을 듣는데, 모든 게 다 떠올랐다.
개시시의 생일이라 해서 갔더니 뜬금없이 개원이 있었던 것. 그와 말다툼을 한 것.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분에 차 내 처소로 돌아온 것.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데 황제 얼굴이 보인 것.
그에게 과꽃을 달라하고 까무룩 기절해 버린 것.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기억이 멀쩡해지자마자 나는 부성을 말리고서 침상에서 일어났다.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일어나자마자 잠시 균형을 잃었지만, 부성이 얼른 부축해준 덕에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소주! 아직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네?”
걱정스럽게 권하는 부성에게 손을 저어 보이고서, 나는 옷이나 갈아입혀 달라고 부탁했다.
“옷이라니요?”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부성은 내가 움직이는 걸 걱정스러워했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부성이 옷을 입혀주는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개원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애썼다.
그래. 이건 슬퍼할 일이 아니야. 개원이 개시시의 사촌이고, 개시시를 통해 그를 부를 수 있단 것도 알았잖아?
어쩌면…… 내가 무공 실력을 완전히 되찾으면 개원을 따로 찾아가지 않고서도 복수를 할 수도 있어.
개시시를 통해 그를 불러서!
‘그러려면 앞으로는 개시시와 친하게 지내야겠다. 안 친하게 지내다가 개원을 불러 달라고 하면 이상하니까.’
* * *
개원이를 본 충격을 서서히 잊어갈 즈음.
날씨는 더욱 무더워져서 이제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고, 무공을 수련하러 비밀 장소에 가는 것조차 내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날씨가 되었다.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원웅은 부성을 볼 때마다 이 소리를 해댔지만, 안타깝게도 원웅에겐 날씨를 조절할 능력이 없었다. 계절을 빨리 불러올 능력도 없고.
물론 이런 재주는 나도 없기에 우리는 그저 더위 속에서 푹 늘어져서 하루 종일 땀만 뻘뻘 흘렸다.
“이대로 가다간 소주께서 더위로 쓰러지시겠어요. 내무부에서 얼음을 얻어 올게요, 소주.”
결국, 견디다 못한 부성이 팔을 걷어붙이고서 더위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원웅은 부성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온 귀인의 처소는요, 소주. 궁녀들이 얼음을 가지러 가지 않아도 태감들이 알아서 얼음을 가져다준대요. 온 귀인이 유일하게 황손을 회임한 사람이니까 다들 가만히 있어도 기나 봐요.”
“그런가 보네.”
“한 번 만에 회임이 되다니. 온 귀인도 참 운이 좋아요.”
“그런가 보다.”
“황후 마마께서도 온 귀인에게 날이 더우니 문안을 오지 말라 하셨대요.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요.”
“그래?”
“우리 소주도 여러 번 쓰러져서 조심해야 하는데…….”
내가 쓰러진 건 몸이 약한 문제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데.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조용히 있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원웅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를 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부성이 얼음 상자를 들고서 나타났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 부성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훨씬 거칠었다.
표정 역시도 단순히 더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험악하고.
“조심해!”
얼마나 세게 걸어대던지, 얼음이 상자 안에서 깨질까 봐 걱정한 원웅이 얼른 달려가서 상자를 받아 들 정도였다.
부성은 가져온 상자를 원웅에게 건네더니, 자기 부채를 꺼내 미친 듯이 부채질을 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자, 부성은 더위가 조금 가시는지 부채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하소연했다.
“소주, 내무부에 갔다가 제가 뭘 알게 됐는지 아세요?”
“온 귀인한테 얼음을 제일 많이 챙겨주는 거?”
“아니요!”
“그럼?”
“폐하께서 온 귀인이 회임해서 힘들 거라고 오늘 하루 영빙정에서 쉬는 걸 허락해 주셨대요!”
영빙정은 심궁과 동쪽 구역 사이에 있는 정원으로, 황제만의 정원이었다.
황제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정원.
황제가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아무도 오지 말라’는 신호일 정도이니 뭐.
그런 곳에 온 귀인이 혼자 갈 수 있게 해준 건 떡돌이가 정말로 큰 총애를 베푼 거였다.
“회임해서 그렇겠지 뭐.”
어쨌든 부성이 저렇게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부성의 부채를 가져다 두 개를 다 내게 부치면서 달랬다.
더워 죽겠는데 저런데 화내는 건 기운 낭비지.
하지만 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영빙정에 가게 허락하신 것뿐이면 저도 이 정도로 화나진 않아요, 소주!”
“그러면 왜? 뭐 다른 게 더 있어?”
마침 원웅도 부성에게서 받은 얼음을 넣어 시원한 음료수를 만들어 왔다.
“이거 드세요, 소주.”
하지만 부성이 하는 말이 다 들렸는지, 내게 잔을 건네면서도 원웅 역시 부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성은 더욱 시무룩해져서 털어놓았다.
“폐하께서 온 귀인에게 마음에 드는 비빈들을 모두 다 데려갈 수 있게 해주셨대요. 그런데 온 귀인이 소주는 초대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래도 그리 화나지 않았다.
“뭐 어때. 나는 그 사람이랑 별로 안 친한걸.”
게다가 온 귀인은 너무 천소여를 따라 해서 별로야.
황후랑 황후 아버지랑 황후 가문이랑 아예 짜고서 천소여를 따라 한 사람이잖아. 친해질 마음도 없다.
부성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요 소주, 온 귀인이 소주 빼고 모든 비빈을 다 초대했단 거예요. 딱 소주만 빼고요!”
그 말에 눈을 멀뚱히 뜨고 있던 원웅이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서 소리 질렀다.
“뭐? 진짜야?”
나도 이 말에는 조금 의외다 싶어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진짜 나만 빼고 다 불렀어?”
“네!”
부성은 크게 대답하고는 속상한지 얼굴이 붉어져서 주먹을 꽉 쥐었다.
“회임하긴 했지만 폐하께서 여전히 소주만 총애하니까, 온 귀인이 소주를 따돌리려는 거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갔고?”
“가야죠. 온 귀인은 난생처음으로 황손을 품은 사람인걸요. 이대로 다음 회임하는 사람이 없으면…….”
온 귀인이 낳은 황손이 다음 황제가 되겠지. 부성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으나,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원웅도 분위기가 좋지 않고…….
두 측근 궁녀를 번갈아 보다가, 나는 눈가를 긁적였다. 음. 나는 어딜 가도 환영받진 못하나 보네.
그런데 이상하긴 해.
온 귀인과 나는 크게 싸운 적도 없는데, 왜 나만 쏙 빼놓은 거지?
온 귀인은 차라리 황후나 영빈과 문제가 있으면 있었지 나랑은 크게 싸운 적도 없는데.
* * *
사방에서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왔다.
더운 공기는 무겁게 피부를 눌렀고, 조금이라도 부채질을 멈추면 그 자리에는 땀방울이 고였다.
하지만 영빙정에 있는 정자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정자 중앙에는 얼음을 넣어 두는 커다란 보관함이 있어서, 그곳에 얼음을 두면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와 몹시 시원했다.
이 탓에 온 귀인이 초대한 비빈들은 다들 정자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그런데 한참 더위와 여름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개시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비빈들이 대화를 멈추고 개시시를 쳐다보자, 개시시는 초조하게 영빙정 출구를 힐긋거리며 중얼거렸다.
“천 귀인은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후궁인데, 이렇게 천 귀인만 쏙 빼놓고 보여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입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품계도 높지 않은 개시시는 온 귀인의 초대를 거절할 만한 힘이 없었다.
밉보였다가 나중에 어떤 짓을 당할지 모르기에 순순히 오긴 했으나, 천 귀인을 꽤 좋게 보는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하게 여겨졌다.
“개 답응은 너무 소심하네.”
하지만 개시시의 초조한 목소리는 규빈의 웃음기 섞인 질책에 묻히고 말았다.
“폐하께서 모든 후궁을 다 데려가라 한 것도 아니잖아. 온 귀인이 원하는 사람을 초대하라 했고, 온 귀인은 안 친한 천 귀인을 초대하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데 온 귀인이 못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면, 기껏 개 답응을 초대해 준 온 귀인이 뭐가 돼?”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어도 듣기 불편하네, 개 답응.”
온 귀인이 차갑게 건넨 말에 개시시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다물고 말았다.
사실 온 귀인뿐만 아니라 다른 후궁 몇 명도 천 귀인을 데려오지 않은 게 조금 걸리는 눈치이긴 했다.
후궁들 중 처음으로 회임한 온 귀인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을 뿐.
모든 후궁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지자 온 귀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모두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사실 싸운 적은 없지만 천 귀인은 나와 너무 비슷하게 보여서 좀 꺼려지긴 한답니다. 물론 그게 천 귀인의 탓은 아니지만요.”
말을 마친 온 귀인이 우 귀인을 보며 “안 그래요?” 하고 묻자, 우 귀인은 자연스럽게 온 귀인의 팔짱을 끼면서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닮기도 닮았지만, 온 귀인이 회임한 후로 천 귀인이 온 귀인을 따라서 치장하는 것 같기도 해요. 불쾌할 만하죠.”
“정말인가요?”
“그럼요. 옷 입는 색이라거나 장신구를 보면 딱 보이는걸요?”
불쾌하단 듯이 언성을 높인 우 귀인은 온 귀인의 표정이 삐뚜름해지자 만족스레 웃으면서 그녀에게 직접 부채질을 해주었다.
“물론 천 귀인 따위가 온 귀인과 비할 바가 못 되죠. 아무리 온 귀인을 따라 해 봐야 이 귀한 황손까지 따라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참 즐겁게 천 귀인을 흉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영빙정 입구에 황제의 황금색 일산이 나타났다.
곧이어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후궁들은 얼른 정자 아래로 내려가 황제에게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월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으로 후궁들을 빠르게 살폈다.
사실 영빙정을 빌려주긴 했으나, 그는 여기에 직접 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온 귀인이 모든 후궁을 다 데리고 영빙정에 갔단 이야기를 듣자, 의외로 마음 씀씀이가 괜찮구나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온 김에 며칠 전에 ‘과꽃 과꽃’ 중얼거리며 상태가 이상하던 천 귀인도 확인하고 싶었고.
“음?”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천 귀인은 보이지 않았다.
“천 귀인은?”
황제의 질문에 개시시가 움찔했으나, 그녀는 가장 뒤쪽에 서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천 귀인은 왜 여기 없지?”
황제는 재차 물으면서 영빙정에 있는 작은 호수 뒤편을 눈으로 살폈다. 그곳에도 천 귀인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천 귀인을 빼고 모였느냐.”
온 귀인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우 귀인의 말을 듣고 천 귀인을 부르지 않긴 했으나, 황제가 대놓고 그녀를 찾으니 기분이 나쁘면서도 덜컥 겁이 나서였다.
황제가 정말로 자신이 천 귀인을 따돌린다고 생각할까 봐.
그때. 우 귀인이 온 귀인 곁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슬픈 목소리로 알렸다.
“온 귀인이 초대했지만 천 귀인은 거절했답니다, 폐하. 온 귀인이 일부러 부르지 않은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