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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1화 (91/283)

##  91화. 천년비의 마지막 기억

왜 웃는 거지? 나는 그 갑작스러운 미소에 경계심을 품었다.

개원이는 웃는 얼굴로 내가 죽기 전까지 날 속였다.

그의 미소는 억만금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으나, 내게는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꺼림칙한 미소를 내 칭찬을 듣고서 띠고 있으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귀인께선 안목이 좋으시군요.”

게다가 이런 말까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미심쩍어하며 묻자 개원이는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리며 대답했다.

“천년비는 세간에서 떠들어대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하는군.”

“제 정인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개원은 자신이 한 말을 조금 정정했다.

“정인이었죠.”

개시시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서 괜히 그릇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원했던 대화는 이런 게 아니란 얼굴로.

하지만 나는 개원에게서 내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이놈이 무슨 이유로 날 죽여놓고 저렇게 말해대는지 어디 좀 들어보고 싶었다.

“답응에게 들어서 그건 안다. 하지만 헤어졌다 들었는데?”

실제로 개시시가 쓴 표현은 ‘헤어졌다’보다 더 과격한 표현이었지만.

어쨌든 돌려서 ‘헤어진 거 아는데 왜 아직도 사귀는 척이야?’라는 뜻을 담아 묻자, 개원은 순순히 그것까지 인정했다.

“헤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자기 나쁜 사람이 되진 않습니다, 귀인.”

“천년비를 참 좋게도 말하는군.”

그럼 죽이지 말지 그랬어. 속으로 빈정거리는데, 개시시가 못 말리겠단 투로 내게 알려주었다.

“원 오라버니가 저래요, 귀인. 다 큰 사람이, 저렇게 고강하고 대단한 사람이 순진하다니까? 뭐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오라버니한텐 나쁜 사람이 없나 봐요.”

“답응.”

“아, 알았어 알았어. 또 그 말 하려는 거지? 사람들은 다 장점이 있다고? 믿어 믿어. 악적에게서까지 장점을 찾아내는 오라버니가 하는 말인데 믿어야지.”

“답응.”

“하지만 세상엔 천 귀인처럼 좋은 사람도 있지만 온 귀인처럼 못 돼 먹은 사람도 있다고, 오라버니. 그 여잔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괴롭혔어. 그런 사람한테도 장점이 있다곤 생각이 안 들어.”

개시시가 툴툴거리고 개원이 누이를 위로하는 사이.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가라앉았다.

개원이 왜 뜬금없이 나를 좋게좋게 말해주나 깨달아서.

‘나에 대해 좋게 말해줄수록 자기가 아량이 넓은 대인으로 보이니 그런 거구나.’

개원이 날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사람들은 개시시처럼 반응하겠지.

자기 적까지 저렇게 좋게 포장해주다니, 개원은 정말 영웅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니 나와 사귈 때도 그는 늘 저랬다.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도 되도록 나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예 화를 안 내는 맹탕은 아니었다. 남에 관해 나쁜 말을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싫어했을 뿐.

그런데 참 이상하지? 개원이 저렇게 나오니, 오히려 나는 그의 말을 전부 다 반대하고 싶어졌다.

저놈의 눈앞에서 저놈이 하는 말을 죄다 반박하고 싶은 욕구와, 그래도 내 욕은 하고 싶지 않다는 자기방어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개시시를 달랜 개원이 나를 향해 빙그레 웃는 순간.

심장과 콩팥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면서 몹시 불쾌해졌다.

그가 너무 밉게 여겨졌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나 스스로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더라도 괜찮을 만큼.

내가 잠시 날 나쁘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난 천년비가 좋은 사람이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라 좋아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파 영웅이란 사람이 사파 악적을 칭송하다니. 그대는 안목이 없나보군?”

반응은 좋았다. 내가 자기 술수에 넘어가 그의 인성을 칭송하지 않자, 개원은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오라버니.”

개시시가 그의 팔을 잡고서 경고하는 목소리를 낼 만큼 뚜렷하게.

“천년비에 대해선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안 그런가.”

그걸 보자 비틀렸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려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실실 웃으면서 조롱하자 개원의 손가락에 힘이 하얗게 들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뚜렷하게.

“본 적도 없으면서 귀인께선 왜 함부로 남을 평가하십니까.”

“전해 들었으면 됐지 꼭 사람을 봐야 아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기 어려운데, 귀인께서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시는군요. 이렇게 경솔하시니, 답응께선 이런 분에게 배울 게 있나 모르겠군요.”

“오라버니!”

개시시가 개원의 팔을 꽉 잡았으나, 개원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나를 경멸에 가득 차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 속내를 꿰뚫은 게 싫다 이거지.

여기서 더 뭐라고 하면 그가 얼마나 더 기분 상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개원이는 충분히 기분이 상해 식식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충분히 기분 상한 듯하니 이 정도면 내 입으로 내 흉을 더 볼 필요는 없을 거다.

화가 났단 핑계를 대고서 슬슬 돌아갈 수도 있고.

판단을 내리자마자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 있어 봐야 의견이 좁아지진 않겠군. 나는 그만 가지. 생일 축하해요, 답응.”

* * *

천 귀인이 나가자마자 개시시는 개원을 타박했다.

“오라버니, 미쳤어? 왜 귀인께 말을 함부로 해?”

개시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서, 그녀가 천 귀인을 얼마나 편드는지 쉬이 짐작이 갔다.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그래도 개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죽은 천년비를 흉보는 소리가 나오는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말을 함부로 한 건 그 귀인이다.”

“여기서 날 편들어주는 건 천 귀인뿐인데. 이젠 천 귀인도 나를 싫어하게 생겼어.”

개원은 천 귀인에게 여전히 화가 났으나, 사이 좋은 사촌 동생, 그것도 이제 입궁하게 되어 언제 만날지 모르는 사촌 동생이 외톨이로 지내는 건 싫었다.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도 않았고.

“알았다.”

결국 개원은 마지못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내 찾아가서 사과하마. 나간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내 속도라면 가서 잡을 수 있어. 이러면 되겠어?”

“폐하의 후궁이 만나고 싶다고 그냥 툭툭 만나지는 줄 알아? 입궁 허락서에는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날 보러 오는 거라 써 놓고서. 뒤에서 천 귀인을 만나다가 걸리면 얼마나 위험한데.”

개원은 난처해졌다. 그럼 이러지도 말고 저러지도 말고 어쩌란 말인가.

“내년에 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개시시는 잠시 생각하다가 요구했다.

“서신을 써줘. 아주 예의 바르게.”

* * *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너무 혼란스럽고 이상해서 제대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나는 주먹을 쥐고서 연신 표정을 구겼다.

“소주, 안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내 표정이 좋지 못한 걸 알아본 원웅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대답해 줄 기분조차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중얼거렸지만, 내 목소리에서부터 이미 ‘아주 별일이야. 난 지금 몹시 화가 났어’ 이런 티가 났다.

목소리만 들으면 이미 다른 사람과 마구 싸우고 온 것 같았으니.

“처소로 돌아가면 수정차를 드릴게요, 소주.”

이 와중에 원웅이 날 달랜다고 꺼낸 차가 하필 수정차다. 개시시가 나와 개원에게 대접할 거라면서 꺼낸 차.

“아니. 수정차는 싫어.”

“평소엔 잘 드셨잖아요?”

“지금은 싫어.”

단호하게 말하자 원웅은 의아한 듯했지만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상에 몸을 묻고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하게 양파를 깔 때 느낌이 들었다.

몸을 비틀고 있자니 개원이와 함께 지냈던 짧은 동굴 생활이 생각났다. 아무도 오지 못하고 우리 단둘만 있던 그 동굴이.

추운 날에는 불을 피워놓았고, 더운 날에는 바닥에 늘어져서 바위에 얼굴을 식혔다.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쓰지 않고 둘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어린아이들처럼 첨벙거렸다.

목욕을 하고 싶으면 나는 개원이에게 업혀서 호수 이름을 외쳤다.

내가 직접 가는 게 더 빨랐지만 그래도 무조건 개원이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개원은 나를 업고 호수로 가주었고, 나는 개원을 끌고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우리를 감쌌고 뿌연 호숫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차가운 공간에서 맞잡은 개원의 손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지.

그런 순간이면 심장이 너무 부풀어서 이대로 나 혼자 호수 위에 동동 떠버릴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 개원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면 개원은 호숫물에 제멋대로 퍼진 내 머리카락을 보면서 웃다가…….

하지만 우리의 추억이 얽힌 그 동굴에서 그는 나를 죽였다.

-이거 신기하게 생기지 않았어? 널 위해 가져왔어.

그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내게 과일을 건넸고, 나는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과일을 먹었다.

근처에서 열린다는 축제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축제는 과꽃 축제였고, 과꽃은 개원이 내게 선물한 최초의 꽃이었다.

우리 애정의 상징과도 같은 꽃. 사방이 그 꽃인 곳에서 개원이와 놀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행복. 개원은 내게 있어서 그 자체로 행복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개원은 내 제안에 웃으면서 그러자고 대답했다.

“나쁜 새끼.”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심장이 녹아갔다. 보지 않아도 내 심장이 녹아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과일은 용고였다.

용고를 떨어뜨리고서 괴로워 몸을 비트는 내게 개원은 다가왔다. 눈앞에 그의 신발이 보였다.

-이거. 이상한 건가 봐. 넌 먹지 마, 개원아.

멍청한 개원이가 이상한 과일을 따왔구나, 생각하면서 괴로운 와중에도 개원이에게 절대로 그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지.

개원이는 당연히 먹지 않을 거라며, 내가 떨어뜨린 남은 용고를 조각내어 하나하나 내 입에 다 넣어주었다.

그가 강제로 턱을 닫게 하고 목을 누르자 용고는 전부 다 식도를 넘어갔다.

차가운 동굴 바닥은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괴로워하면서도 바보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개원이는 내 손을 잡아주는 대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옆에 있기 괴로웠다. 미련하고 멍청한 천년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의 발뿐이었다. 그리고 동굴 바닥은 다시 차가워졌다. 몹시도.

“개새끼.”

개시시 옆에서 만난 게 아니라면, 만나자마자 그 새끼의 목덜미를 뜯어 놨을 거야. 어째서 이런 데서 재회한 거지?

베개를 움켜쥐고 몸을 비틀고 있자니 식은땀이 흘렀다.

멀쩡한 심장이 갑자기 또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나는 듯해 괴로웠다.

“계란아? 소여야. 천 귀인!”

누군가 내 몸을 흔들면서 부르는 걸 듣고서야, 나는 지금 내가 동굴 바닥에서 몸을 뱀처럼 꼬며 죽어가는 도중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기는 내 처소, 아니 천소여의 처소였고 내 앞에 있는 건 개원이 아니었다.

“폐하.”

“괜찮으냐? 왜 이러고 있어? 어디가 아파?”

“과꽃을…….”

“과꽃이라니?”

“과꽃 좀 갖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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