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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0화 (90/283)

##  90화. 원치 않았던 배려

“개 답응은 뭘 좋아하지?”

또래 친구들끼리는 생일에 보통 뭘 해 주나? 열심히 고민해 보았지만 통 알 수가 없어서, 개시시의 궁녀를 따라가다가 그냥 대놓고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개시시의 궁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선물하고 싶으신 건가요? 답응께선 형산이범의 시를 좋아하세요.”

그게 뭔데……라고 물어보면 내가 무식해 보이겠지.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만 잘 기억해두었다.

형산이범. 형산이범. 형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라고 기억해두자. 그러면 외우기 쉬울 거야.

“음, 나도 그거 좋아해. 그거. 그 뭐야. 용맹하거든.”

그러고서 호랑이처럼, 하고 덧붙이려는데 궁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해석이네요. 형산이범은 늘 꽃을 노래하잖아요. 하지만 용맹한 꽃도 운치 있게 들려요.”

호랑이 소리는 안 하길 잘했구나. 내가 운치는 없어도 눈치는 있었네.

“난 그 뭐야, 늘 독창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중시해. 시 말이야.”

“귀인께서는 참으로 영민하시군요.”

“암. 그렇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더 말을 섞으면 내 좁은 식견이 들통날 것 같아서 나는 진중한 척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행히 개시시의 궁녀는 더 말을 걸지 않았고, 우리는 서둘러 개시시의 처소로 걸어갔다.

“안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열려 있는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그란 탁자에 앉아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는 순간. 가볍게 나아가던 발이 갑자기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개원이가 왜 여기에 있어?’

* * *

한림원 학자들이 다 같이 모여 있는 서가 안에서는 말린 종이와 굳은 먹물의 향이 났다.

그곳의 학자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행동을 했으나, 아무리 똑같이 행동해도 눈에 띄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지금은 비원이 그랬다.

학자들은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고고하게 서책을 읽는 비원의 모습을 오가면서 연신 힐긋거렸다.

수많은 학자들 틈에서도 어딘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비원은 가만히 있어도 눈길을 사로잡는 편이었다.

그러다 일정한 간격으로 책을 넘기던 비원이 갑자기 책을 탕 덮어버리고 눈을 감자, 몰래 곁눈질하던 학자들은 덩달아 움찔했다. 책이 많이 어렵나?

학자들은 비원이 무슨 책을 보기에 저러나, 생각하면서 괜히 눈에 힘을 주어 책 제목을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비원은 내용 때문에 서책을 덮은 게 아니었다. 그가 책을 덮은 건 천 귀인 때문이었다.

‘멍청한 천 귀인이 천년비 님이라고.’

아직도 이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비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여전히 천 귀인이 천년비라는 충격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럴 수도 있지, 애써 이해해 보려고 해도 철두철미한 그의 이성은 이해를 거부했다.

비원은 저도 모르게 값비싼 고급 종이를 손안에서 마구 구겼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내가 천년비 님을 오해한 거고…… 천년비 님이 원래 저렇게 멍청한 게 맞다면 이제 어떻게 되지? 천년비 님의 저런 모습이 대업에 도움이 되긴 하나?’

어쨌든 본인이 천년비가 맞다고 인정을 했고, 정황상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우 귀인이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우 귀인이 제대로 그의 부탁을 완수하지 않았으면서 거짓말을 한 거라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전에 누군가 우 귀인이 묻은 종이를 파냈을 가능성도 있고.

한숨을 내쉰 비원은 서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싫다고 숨길 일은 아니지. 단주님께 서신을 써야겠군.’

게다가 그가 해야 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촉비.

우 귀인은 천 귀인과 촉비의 몰락을 의뢰했다. 천 귀인이 진짜 천년비라면, 우 귀인의 소원은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지게 된다.

천년비의 영혼이 다시 자신의 몸을 찾아가면 천 귀인은 죽어버릴 테니까.

반면 촉비는 그가 직접 나서야 했다.

우 귀인이 그의 의뢰를 진짜로 완수했는지 아닌지 애매한 상황이다 보니, 사실 이 부분을 따지고 들자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 귀인과 다투다가, 촉비가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걸 정통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그나 촉비나 둘 다 꺼리는 구석이 있기에 적당히 눈치싸움을 하다가 헤어졌지만, 촉비도 슬슬 정신을 차렸을 터.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 무언가 행동을 할 게 분명했다.

폐궁에 태감을 끌고 와 때리면서 심문하고, 범인이 아니란 걸 알았는데도 죽여 입을 막으라 할 정도면 촉비는 비원 자신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 거리낌 없는 사람일 터.

촉비가 나서기 전에 그가 먼저 나서서 촉비를 쳐내야 했다.

* * *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반면 상에 앉아 있던 개시시는 나를 보자마자 일어서더니 반갑게 인사를 올리고서, 탁자에 앉은 개원에게 밝게 말했다.

“천 귀인이셔. 인사해, 원 오라버니.”

쟤가 왜 원 오라버니냐, 개 오라비라고 해라.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런 데서 원수인 개원이를 만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절대로 개원이와 만날 일 없는 곳이 있다면 황궁 안일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그런데 정말 개원이가 왜 여기에 있어?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개원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잔잔한 가을바람 같아서, 내 마음은 또 거기에 우스스 흔들리고 말았다.

“귀인께 인사드립니다.”

개원이를 만나면 내 천수비로 바로 쳐버려야지, 늘 다짐했는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는 무공조차 펼칠 수 없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서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였다. 거센 분노 탓에 평이하게 호흡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반면 개시시는 나와 개원이 서로를 향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민망했는지, 일부러 나와 개원의 사이로 다가와 상냥하게 말했다.

“원 오라버니는 무림에서 아주 고강한 영웅이에요, 귀인.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죠?”

“…….”

“오라버니, 이분은 천 귀인이셔. 왜, 날 많이 도와주신다고 한 분.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분이시다?”

개시시는 나와 개원 사이를 오가며 밝게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거기에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분노뿐인데, 귀하게 자란 명문대갓집 아가씨가 처음 보는 무림 영웅에게 화를 내는 건 이상하잖아?

개원이도 개원이 나름대로 후궁들에겐 관심이 없는지 그저 무뚝뚝한 표정이긴 매한가지였다.

무림에 있을 때는 영웅이라 칭송을 받아서 그런가, 그래도 내내 온화한 표정으로 다니던 놈이. 지금은 아주 죽을상이네.

개시시는 자신이 계속 서로를 소개해도 나와 개원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자, 더욱 초조해지는지 괜히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내게 가장 상석을 권하고는 자기 궁녀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한 청초육사와 수정차를 가져다줘.”

“네, 소주.”

개시시의 궁녀가 나가자 개시시는 나와 개원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었다.

반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미소를 거두고 머쓱해 했지만.

미리 요리를 준비해 둔 덕에 개시시의 궁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록달록한 음식이 담긴 커다란 접시와 덜어 먹을 접시들, 연한 녹색의 잔에 따른 맑은 수정차를 가지고 왔다.

“귀인, 이리로 오세요.”

나는 개시시의 안내를 받아 상에서 탁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원은 내가 다가가자 일어났다가 내가 자리에 앉자 같이 앉는 둥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려는 시도는 보였으나, 여전히 내 쪽으로는 거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랑 다닐 때는 매일 웃고 있더니. 그건 날 방심시키기 위한 가짜 표정이었나 봐. 지금 이 딱딱한 표정이 평소 모습이겠지?

무림에서 웃고 다니는 건 정파 도련님 같은 분위기를 선호해서 일거야. 확실해.

그걸 생각하자 몹시 가소로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와 말도 섞기 싫어서 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개시시는 재차 나와 개원을 번갈아 보다가 직접 찻잔을 들어 내게 건네주면서 따뜻하게 말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고 불러 놀랐지요? 미안해요, 귀인. 예전에 귀인께서 무림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서요.”

“……괜찮아요.”

“생일에는 가족들을 궁으로 초대할 수 있다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까요. 내년에는 초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해서, 꼭 귀인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이 이상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소용없을 텐데도.

“고마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서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기분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왔으니 적당히 먹는 시늉은 해야겠지.

먹는 시늉을 하다가 체한 것 같다 둘러대고 자리를 비키면 자연스러울 거야.

내가 젓가락을 들자, 개시시의 궁녀는 얼른 다른 커다란 숟가락으로 갖가지 야채와 고기를 덜어 내 앞에 놓인 빈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는 젓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면서 몹시 배고픈 척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눈길은 앞으로 갔는데,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앞에는 개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개원이도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데 몰두해 있어서, 맞은편에 앉은 나는커녕 생일을 맞이한 사촌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냥 이렇게 적당히 식사하다가 서로 헤어지면 참 좋을 텐데. 그 기색을 알아차린 개시시는 내게 실례라 생각했는지, 수정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자연스럽게 개원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오라버니, 얘기해 봐. 뭐 재밌는 얘기 없어? 멋진 무림 고수들 이야기 많잖아. 응?”

그래, 많잖아. 수많은 무림인들이 네 뒤를 쫓아다니는데 많겠지.

나랑 사귀면서 잠시 평판이 떨어졌지만 날 죽인 후로 도로 올라갔을 거 아니야.

나는 익은 가지 조각을 후후 불면서 열기를 식히는 척 개원이를 살폈다. 속으로는 마구 빈정거리면서.

그러나 개원이는 정말로 할 만한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지, 그저 웃으며 개시시를 짓궂은 막냇동생 대하듯 달래기만 했다.

“미리 언질을 주었더라면 준비라도 하지.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잖니.”

“보고 겪은 일이나 소문 같은 거 얘기해달라는 건데, 그런 것도 준비해야 해? 준비해서 하는 이야기라면 굳이 오라버니에게 들을 필요가 없잖아.”

“귀인께선 내 이야기에 그리 흥미 없어 보이시는데.”

“오라버니가 아무 말도 안 하니 흥미가 없으신 거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개원이가 내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놈에게 얼결에 젓가락을 던질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아예 손에서 힘을 뺐다.

당연히 젓가락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딱 딱’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당황해서 얼른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개원이도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우리는 탁자 아래에서 허리를 숙이고 마주 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같은 젓가락을 향해 손을 뻗는 바람에 손등이 부딪칠 뻔했다.

“내 거다.”

그것조차 화가 나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차갑게 말하고 젓가락을 휙 낚아채듯 집고서 다시 허리를 폈다.

그러고서 보니 개시시의 궁녀가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내가 직접 허리 굽혀서 젓가락을 주우면 안 되나 보다.’

뒤늦게 이 사실이 떠올랐지만 이미 알아서 주운 후였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다가 화제를 돌려버렸다.

“무림 얘기. 할 거 있으면 해보아라.”

나까지 이렇게 이야기하자 어쩔 수 없는지, 개원이는 곤란한 미소를 띠고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무림에서 손꼽히게 강한 고수 중 하나인 천년비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까요?”

하지 마. 욕하려는 거잖아? 나는 발끈해서 거절하려 했으나, 개시시가 먼저 나서서 개원이의 팔목을 잡았다.

“천 귀인께선 천년비를 좋게 보셔. 그러니 다른 얘기로 해, 오라버니.”

내가 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개시시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내 욕 하려거든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특히 너는!

그런데 어째서일까? 개시시가 그 말을 하자마자 내내 나를 냉담하게 쳐다보던 개원이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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