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과연 그편이 더 빠르겠군요!
내가 망신을 당하고 있는데 떡돌이는 황후만 쳐다보다니. 털레털레 방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
“소주, 괜찮으세요? 기분이 나빠 보이세요.”
이 기분은 얼굴에도 금세 드러났는지, 대중궁에서 멀어지자마자 원웅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차 이름 맞히기를 했는데 내가 못 맞혔어. 다른 후궁들이 마구 웃어대더라.”
못 할 얘기는 아닌지라 솔직하게 털어놓자, 원웅은 오만상을 지었다.
“다들 너무하네요! 이름 좀 모를 수도 있지! 소주는 기억을 잃었잖아요.”
“그치.”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소주. 폐하가 소주를 가장 총애하니까 괜히 그런 거로 트집 잡고 재밌어하는 거예요.”
원웅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소주는 너무 너그러우세요. 비웃음을 당했는데도 다른 후궁들을 편드시는 거예요?”
“아니, 날 비웃은 후궁들은 죄다 못됐지. 난 날 비웃은 사람을 편들어주고, 그런 거 안 해.”
원웅은 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후궁들 얘기가 아니시라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폐하 말이야.”
“폐하가 왜요?”
“날 가장 총애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설명을 했는데도 원웅은 이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헷갈려하는 얼굴.
“폐하는 소주를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게다가 한 번 더 같은 말을 하기에, 나는 고개를 젓고서 딱 잘라 말해주었다.
“황후 마마한테서 시선을 아예 못 떼던데 뭘. 황후 마마가 웃으니까 넋을 잃고 쳐다보더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 * *
절대로 황제를 의식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궁으로 지내고 있으니 그에 걸맞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궁녀들에게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차를 구해오라 한 다음 방 안 가득 늘어놓고 죄다 향을 맡고 마셔댔다.
‘타천천 그 변태가 나를 부활시켰다고 했지. 그러면 내 몸은 지금 강시 상태인 건가? 그런데 단순히 강시로 있는 게 아니잖아. 가짜 내가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고 있다 들었는데. 그럼 내 몸 안엔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 있는 게 맞나?’
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차향을 계속 맡고 있자니, 나중에는 차에 관한 생각은 나지 않고 비원이 한 말만 떠올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젯밤에 내내 외우고 외운 차 이름의 대다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나 혼자 멍청이가 되고 싶진 않아서, 결국 나는 꾀를 부리기로 하고 부성에게 네 종류의 차를 준비해 달라고 한 다음 청적으로 갔다.
그러고서 바위 위에 찻잔 네 개를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늘 한가한 떡돌이가 나타났다.
떡돌이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다가오다가 바위에 놓인 찻잔을 보고 눈살부터 찌푸렸다.
“내 자리에 왜 얘들이 앉아 있지?”
설명하는 대신 나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구했다.
“내가 저 차 이름을 하나씩 다 알아맞혀 볼게. 내가 잘 맞히나 봐줘.”
하지만 떡돌이는 내가 설명을 했는데도 영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런 걸 굳이 왜?”
심지어 이렇게 묻기에, 아주 조금 부끄럽지만 어제 일을 끄집어냈다.
“어제 일을 만회하고 싶거든. 난 하루 사이에 달라진 천 귀인이 됐어. 이제 나는 도사야 도사. 차 도사.”
“…….”
떡돌이는 잠시 시름에 잠긴 얼굴로 찻잔 네 개를 내려다보았으나, 내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위엄 넘치는 자세를 보여주자, 내 위압감에 눌려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먼저 차향을 맡은 다음 나한테 줘. 그러면 내가 이름을 맞힐게. 일부러 찻잔 모양을 다 똑같이 해뒀어.”
“그러지. 이걸 왜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떡돌이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두 번째에 놓인 찻잔을 짚더니 냄새를 한번 맡은 다음 내게 내밀었다.
나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받은 다음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뭐 같아?”
내가 대가의 모습으로 향을 음미하고 있자, 떡돌이가 덩달아 긴장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향은…… 갈대 향이 나.”
“이게?”
“이건…… 홍롱차다!”
떡돌이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네 번째에 놓인 찻잔을 가져다 자기가 냄새를 맡고서 내게 내밀었다.
“이건?”
“녹차.”
“이건?”
“……수월화차.”
내가 거침없이 대답하자 떡돌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중얼거렸다.
“굉장한데? 그럼 이것도 알겠어?”
대가는 겸손해야 한다. 함부로 막 자랑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나는 하루 사이에 이토록 차에 정통해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지만,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지막 찻잔을 받아 향을 맡은 다음 덤덤하게 말했다.
“우롱차로군.”
그러고서 찻잔을 승언이에게 준 다음 떡돌이에게 “어때?” 하고 묻자, 떡돌이는 엄지를 척 내밀었다.
“우리 계란이는 참으로 영특하구나.”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더이상 겸손을 떨지 못하고 ‘히히’ 웃자, 떡돌이는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하면서 연한 녹색 천으로 싸온 떡을 내밀었다.
“이건 상이지? 내가 다 맞혀서 주는 상?”
“그럼! 우리 계란이가 영리하니까 주는 상이지.”
나는 활짝 웃고서 떡을 하나 먹은 다음 그에게 어제 이 성과를 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자랑했다.
떡돌이는 ‘아이구 아이구’ 맞장구를 치면서 내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그 태도를 보자 어제 무시 받은 기분이 약간이나마 가라앉았다.
승언이도 내가 하루 사이에 영민해진 게 신기한지, 괜히 찻잔 뚜껑을 열어서 자기도 냄새를 맡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는 냄새를 맡아봐도 모르겠다 이거지. 나처럼 하루 사이에 차 박사가 되기가 이리 힘들다 이거지.
흐뭇해져서 떡돌이를 보고 배시시 웃자, 떡돌이는 다시 입에 떡을 물려주었다.
“계란아. 그거 아느냐?”
“뭐가?”
“난 네가 정말 좋다. 네가 이러면 정말 좋아.”
하지만 나는 아주 세심한 고수이기에, 떡돌이가 저 말을 하자마자 좋았던 기분이 금세 싹 가라앉았다.
대신 어제 떡돌이가 나를 내내 무시하고 황후만 보던 게 떠올라 조금 화가 났다. 절대로 많이 나진 않았다.
나는 대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기에 아주 조금 났다.
“우리 계란이가 왜 갑자기 만두가 됐을까.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좋다는 말 믿지 않아.”
“또 왜. 또 뭘 생각하는 건데. 승언이?”
여기저기 차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던 승언이가 깜짝 놀라 이쪽을 보았다.
나는 승언이에게 네 얘기 아니라고 손을 저어 보인 다음,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아니란 투로 어제 일을 꺼냈다.
“어제는 완전히 홀린 눈으로 황후 마마만 쳐다봤잖아. 그런 눈으로 황후 마마만 보고 나는 무시하고. 그래 놓고서 내가 좋다고?”
“내 말이 믿기 어려우냐?”
“그래.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똑똑해서 잠시 감탄하는 거 같아.”
떡돌이는 내 말에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주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만 사항을 말하는데, 저렇게 웃다니.
그 표정을 보자 왠지 괘씸해져서, 나는 어제 떡돌이의 행각을 한 번 더 또박또박 짚어 주었다.
“어제 말이야, 너는 온몸과 온 시선으로 티를 냈어. 황후 마마가 좋다고. 다른 후궁들도 문안 마치고 나가면서 그랬어. 폐하가 아무리 날 예뻐해봐야 나는 첩일 뿐이래. 역시 아내인 황후 마마를 따라가진 못한다더라.”
“…….”
“그러니까 나한테 막 빈말하면서 좋아한다 안 그래도 돼. 앞으론 내 지식에 감탄하면 그냥 ‘넌 참 지혜롭구나!’ 이 말만 하라고.”
* * *
주는 떡은 죄다 잘 먹은 천 귀인이 갑자기 토라져서 가버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상황을 지켜보던 오원요가 황제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폐하. 천 귀인께서 죄다 틀린 답을 말씀하셨는데 왜 다 맞다 해주셨는지요?”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제 일로 애가 기가 죽었지 않느냐. 안 그래도 염 귀인은 죽고 온 귀인은 회임을 해서 좀 시무룩해 있는데. 굳이 정답이다 오답이다 따질 필요 있느냐.”
승언은 그 말에 감탄하고서, 내내 ‘이게 우롱차라고? 이게?’라고 생각하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제를 칭송했다.
“참으로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폐하.”
하지만 오원요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 알려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또 망신당할 텐데요.”
승언은 오원요의 말도 그렇다 여겨서 덩달아 걱정스러워졌으나, 황제는 이번에도 태연히 대답했다.
“황후와 연금에게 전하라. 앞으로 ‘차 이름 맞히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이번에는 오원요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그편이 더 빠르겠군요.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하지만 오원요까지 자기 논리도 납득시킨 후에도 황제는 영 표정이 이상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좋아 보이지도 않는 표정.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저 멀리서 태감들이 반 시진이 지난 걸 알리는 나무 치는 소리를 낼 때쯤에야, 황제는 팔짱을 풀면서 지시했다.
“연금에게 하나 더 전하라. 마음을 품는 건 자유이나 드러내는 건 자유가 아니라고.”
* * *
자랑스럽게 처소로 돌아왔으나 평상에 앉아 시원한 냉국을 한 그릇 먹고 나니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떡돌이가 황후에게 눈도 못 떼던 게 새삼 눈에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래, 황후 마마는 눈썹이 안 쳐졌다 이거지. 눈썹이 올라가서 아주 새침하게 고우시다 이거지.”
“네?”
“내 눈썹도 원래는 안 쳐졌다고. 그리고 쳐진 눈썹이 어때서. 그윽해 보이고 좋잖아?”
“소주?”
“너한테 하는 얘기 아니야.”
내가 손을 젓자, 원웅이 빈 냉국 그릇을 챙겨 가면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슬쩍 알려주었다.
“소주, 소주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눈썹이 처졌어요.”
그러나 내가 눈썹을 최대한도로 치켜뜨고서 쳐다보자, 원웅은 얼른 입을 다물고서 부엌으로 뛰어갔다.
원웅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다시 떡돌이 생각을 하면서 냉국으로 차가워진 속을 분노로 덥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어제 황후한테 푹 빠져서 쳐다보긴 했는데. 그 태도가 평소랑 많이 다르긴 했어.
황제가…… 나 말고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건 맞는데.
그게 황후는 아닌 눈치였잖아. 그런데 왜 어제는 황후 옆모습에서 그리 시선을 못 뗐지?
‘그러고보니 황제는 둘일지도 모르잖아. 혹시 어제 황제와 오늘 떡돌이는 다른 사람이었나?’
그럼 황후를 사랑하는 황제가 있고, 떡 먹기 좋아하는 황제가 따로 있나? 황후를 사랑하는 황제가 온 귀인이랑 시침한 황제이고…….
‘헷갈리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결국 평상에서 내려섰더니, 내 모습을 내내 빤히 바라보던 부성이 두 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소주. 소주는 진심으로 폐하를 좋아하시네요!”
“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말에 내가 질색했지만, 부성은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투였다.
눈을 얼마나 반짝거리던지, 내가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해도 믿지 않았다.
결국 설득하기도 지쳐서, ‘어차피 후궁인데 남들이 저렇게 착각하는 게 무슨 대수야?’라고 여길 즈음이었다.
슬슬 방에 들어가려는데 개시시의 궁녀가 오더니 내게 인사를 올리고서 뜻밖의 말을 했다.
“천 귀인께 인사드립니다. 혹시 잠시 시간이 괜찮으실지요?”
“시간이 되긴 하는데. 왜 그러느냐?”
“오늘이 사실 저희 소주의 생일이랍니다. 저희 소주께서 괜찮다면 함께 있어 달라고 천 귀인을 모셔오라 하셨어요.”
개원이 사촌 생일이 오늘이라고? 몰랐다. 귀인 생일은 떠들썩하게 챙기지 않는구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생일인데 당일에 말하면 어떡해. 선물 하나 준비하지 못했는데.
“선물이 없는데.”
곤란해서 중얼거리자 개시시의 궁녀는 방긋 웃으면서 재차 권했다.
“부담가지실까 봐 일부러 지금 얘기하신걸요. 그저 와 주시기만 하면 좋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