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적당할 때 끊어주지
“아니.”
나는 바로 부정했지만, 비원은 믿지 않았다.
“이렇게 약한 몸으로 이렇게 강한데. 아니라고요?”
그러고는 이번에는 갑자기 혼자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한 번 더 부정했다.
“아니, 그래요. 차라리 아니길 바랍니다. 천년비는 제 우상입니다. 당신처럼 멍청하기로 이름 높은 후궁일 리가 없죠. 제기랄, 절대 아닌 거야! 아니라고 해줘요!”
감히 후궁에게 대놓고 멍청하다고 해도 되나? 내가 알기로는 아니다.
하긴. 서로 무술을 드러내 겨룬 마당에 저런 말이 뭐 대수이련마는…….
‘에라, 한 대 맞아라!’
좀 괘씸하기에 힘을 실어 놈의 뒤통수를 내려치자, ‘빡’ 하는 소리가 나며 비원이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녀석을 옆으로 굴려 놓고서 팔짱을 끼고 한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심란했다. 우상? 내가 우상이라고?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놈은 대체 무슨 수로 내가 천년비라고 확신하는 거지?
난 이자가 내 이름을 자꾸 파묻고 다니라 했다기에 내 적인 줄 알았는데.
적이 아니었나? 누가 천년비인지 확인하려고 이름을 그리 파묻고 다녔나?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녀석의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노려보면서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이놈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는걸.
게다가 아는 게 좀 있어 보이는데, 이대로 죽이긴 아까워.
절대로 이자가 나한테 우상이라 불러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다.
마음을 바꾸자마자 나는 녀석을 점혈해 다시 깨웠다.
비원은 머리를 들어 올리다가 나를 발견하자 목에 힘을 빼고 드러누웠다.
“야.”
나는 그자의 다리를 툭 걷어차서 내 쪽을 보게 한 다음 다시 물었다.
“천년비는 왜 찾는데?”
비원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그 외에는 아예 몸에 힘도 주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쪽이 천년비가 아니라면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 단호한 태도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천년비가 맞다고 한 다음 사정을 캐낼까? 아닌가? 그래도 찝찝하니 아니라고 발뺌할까?’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무술을 하는 것까지 봤으니, 여차하면 이놈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할 수도 있어.
그럴 거라면 내가 천년비란 걸 밝히고 계속 캐묻는 게 낫지.
“내가 천년비다.”
“거짓말!”
하지만 내가 긍정하자마자 이 새끼가 또 말을 바꾸었다.
‘이거 지금 어쩌자는 거야? 나랑 장난하나?’
내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비원은 오만상을 하더니 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천년비 님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자유롭고, 자유로우면서도 강인하고, 돌풍처럼 휘몰아치는 분이란 말입니다! 당신처럼 멍청-.”
한 자 한 자를 입에서 꼼꼼하게도 뱉어내는데,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져서 나는 다시 녀석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녀석이 축 늘어진 걸 보자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녀석은 기절한 후였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녀석을 깨우려는데 웬걸. 또다른 인기척이 가까워지지 않는가.
나는 얼른 비원을 챙겨서 커다란 병풍 뒤로 몸을 숨겼다.
거기에서 숨을 죽이고 병풍에 난 구멍으로 슬쩍 쳐다보니, 잠시 뒤.
웬 태감들이 얼굴을 천으로 덮어 가린 태감을 위아래로 잡고 끌고 왔다.
이게 무슨 일이래? 왜 태감이 태감을 끌고 와? 이상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기절했던 비원이 정신을 차리려 한다.
그가 깨어나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녀석의 아혈을 눌러 입을 열 수 없게 했다.
녀석은 반항하려 했으나 병풍 건너에서 나는 소리를 듣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눈짓으로 다른 사람이 있으니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아혈을 풀어달라 손짓했다.
응, 싫어.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는 그의 손짓을 무시하고서 병풍 너머 상황에 다시 집중했다. 그쪽에선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태감들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이 놀랍게도 후궁인 촉비였던 것이다. 촉비는 여기에 왜 온 거지?
더욱 호기심이 들어 유심히 보고 있으려니, 비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병풍 너머를 살폈다.
끌려온 태감은 마구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끌고 온 태감이 얼굴에 강제로 씌워둔 복면을 벗기자 두려워하며 주위를 마구 살폈다.
그러다가 촉비를 보더니, 무릎을 꿇고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촉비는 용서는커녕 냉정하게 그자를 발로 퍽 차더니, 아예 머리에 발을 올리고서 차갑게 물었다.
“훔쳐간 물건은 어디에 있지?”
‘훔쳐간 물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마마. 저는 마마의 물건을 단 하나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마마. 정말입니다. 오해가 있습니다.”
태감은 두 손을 모으고서 싹싹 빌었지만 촉비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더니 다른 태감들에게 그 태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신호를 받자마자 태감 둘이 끌고 온 태감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고, 끌려온 태감은 자기가 아니라고 빌면서 온몸을 웅크렸다.
태감은 가엾게 울어댔으나 촉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서 그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훔쳐간 물건…… 촉비…… 태감……. 아. 혹시 전에 그 일 때문인가? 촉비의 물건을 어떤 태감이 훔쳐서 달아난 적이 있지.
그러다 필첩을 떨어뜨린 걸 내가 촉비에게 주워줬어. 부성의 말에 따르면, 그 안에는 죽은 태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필첩 외에도 다른 물건들이 있었나본데?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물건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하던 태감이 어디를 잘못 맞았는지 갑자기 악 하는 소리를 내며 기절했다.
촉비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서 있다가 기절한 태감을 살피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자도 아니군.”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쓰러진 태감을 쓰레기처럼 쳐다보았으나, 별도리가 없다 싶은지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잘 처리해라.”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자, 남겨진 태감 둘이 쓰러진 태감을 양 옆에서 부축하려는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혼자 나가버렸던 촉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들어와 태감들에게 물었다.
“전에 여기에 밧줄이 떨어져 있었던 거 같은데.”
촉비가 말을 하자마자 나와 비원은 동시에 그의 팔을 묶은 밧줄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촉비가 전에도 여기에 왔었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갑자기 비원이 나를 확 밀쳤다. 병풍 밖으로.
하지만 균형을 잡고서 나는 녀석을 바로 역으로 밀쳤고, 비원은 병풍 밖으로 튕겨 나갔다.
촉비와 태감들은 갑작스러운 밧줄의 부재에 긴장했다가, 비원이 툭 나타나자 놀라서 펄쩍 뛰었다.
“잡아!”
촉비는 버럭 외쳤고, 태감 둘은 비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학자이면서도 무술이 고강한 비원은 그 둘에게 당하지 않았다.
몇 합을 주고받지도 않아 태감 둘이 바닥을 구르자, 촉비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후궁이기 때문인지 비원은 촉비를 건드리진 않았으나, 우두커니 서서 악역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팔이 묶여 있어서 하나도 안 무서워 보였지만.
후궁에게 할 태도는 아니었으나, 이런 와중이기에 촉비는 그를 꾸짖지는 못했다. 비원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제가 촉비 마마의 약점을 하나 가지게 된 모양입니다.”
“태감 하나가 내 물건을 훔쳐 갔다. 그 태감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니, 약점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수사방에 맡기셔야지 직접 처리하실 게 아닙니다.”
촉비는 그래도 태연한 척 말했으나 비원이 넘어가지 않자, 이를 갈면서도 자신이 데려온 두 태감을 깨워 데리고 나갔다.
그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지자 비원은 이번에는 병풍 뒤쪽,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먼저 날 떠민 건 너다.”
그 시선에는 원망도 서려 있는 듯해서 나는 얼른 변명하면서 병풍 뒤에서 나갔다.
비원도 자기가 먼저 날 밀치려 했단 걸 인정하긴 하는지, 항의하는 대신 아까 촉비가 오기 전에 하던 말을 재차 반복했다.
“당신이 천년비란 걸 여전히 믿기 힘듭니다.”
그러면서 혼자 알아듣기 힘든 말을 작게 중얼중얼하더니, 내게 이렇게 물었다.
“천년비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내가 “타천천?”이라고 되묻자, 비원은 아예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너무 빠르게 중얼거려서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지만, ‘단주께서 몸을 가지고 있단 걸 알다니, 진짜 풍랑공인가.
저런 멍청한 사람이 풍랑공이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게 괘씸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비원은 한참 만에야 머리에서 손을 떼고서 일어나 설명해주었다.
“저희 단주께서 죽은 천년비 님을 발견했고 되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술법이 불완전해서 실패했지요.”
“술법?”
“그래서 일단 몸부터 부활시킨 다음 영혼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설명이란 것도 좀 상식적이지 않고 이상했다.
영혼을 되살리려 하다니? 몸을 부활시키다니? 너무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기에는, 분명 내가 정신을 잃고 진짜 내 몸에서 잠시 깨어났을 때. 그 몸에 심장이 없긴 했어.
강시? 그럼 내 몸은 강시가 된 건가? 하지만 강시는 영혼이 없잖아?
비원이 너무 건성으로 설명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더 구체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지 말을 하다 말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에서 설명하긴 어렵군요. 어쨌든 나중에 다시 뵙지요.”
* * *
갑자기 몰아닥친 진실 때문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런 이유로 문안에 빠질 수는 없다.
게다가 오늘은 문안에 황제가 같이 나온다고 해서 더 그랬다.
다음날, 나는 평소처럼 원웅과 부성이 도와주는 대로 의복을 차려입고서 대중궁으로 가 떡돌이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자꾸 어제 일이 떠올라서, 후궁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혼자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웬걸.
우리가 문안하는 곳 중앙에 평소에는 못 보던, 아니, 아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없던 길쭉한 탁자가 놓여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탁자 위에는 각양각색의 찻잔들이 있었고, 후궁들은 재밌어하며 그 앞에 서 있었다.
“천 귀인, 왜 우두커니 앉아만 있으세요?”
이게 뭔가, 싶어서 멍하니 있자니 개시시가 내게도 이리 오라고 해서 나는 어정쩡하게 그 후궁들 틈에 섞였다.
내가 다가가자 개시시는 밝은 얼굴로 물었다.
“이런 거 참 재미있지 않아요?”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앞 이야기를 전혀 못 들었기에, ‘이런 거’가 뭔지 알 수 없어서 개시시에게 살짝 물었다.
개시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단 걸 알아차린 듯 작게 속삭여 알려주었다.
“여기 놓인 차 중 하나를 짚은 다음, 향을 맡고서 차 이름을 알아맞히고 자기 자리에 가져가는 거예요.”
뭐야? 누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해? 게다가 음식도 아니고 차 향이라니? 누가 차 향을 맡고 차 이름을 알아맞혀?
“그런 걸 왜 해요?”
“재밌잖아요. 게다가…….”
말을 마친 개시시가 황제를 힐긋 눈짓으로 가리키는 걸 보니, 황제 앞에서 차에 대한 지식을 뽐내는 시간인가 보다.
떡돌이는 차 이름보다 떡 이름 맞추기를 더 좋아할 텐데.
하지만 사실상 황제는 핑계고, 후궁들은 그냥 놀이처럼 이걸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다들 이름도 딱딱 얼마나 잘 맞추는지. 보고 있자니 박수가 쳐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줄이 점점 줄어들면서 내 차례가 가까워지자, 이걸 신기하게 바라볼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젠장. 나도 이거 해야 하는 거잖아?
그 사이 줄은 또 짧아지고 있었고, 어느새 내 앞에 남은 후궁들은 마음에 드는 찻잔 무늬를 짚어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다음 이렇게 이야기했다.
"콩차네요.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 통통차로 마시겠습니다."
"이 퐁차가 좋네요."
뭐지. 차 이름이 왜 다 저따위지?
하지만 저따위 이름들이 다 맞는지, 황후의 측근 궁녀는 그때마다 웃으면서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맞아요.” 이런 말을 반복했다.
그러고 있자니 결국 내 차례까지 왔고, 사람들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더불어 떡돌이의 시선도.
나도 하나 고르라는 눈치인데…… 뭐 고르고 말고 할 거 없이 내 차례에는 이미 찻잔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슬쩍 떡돌이를 보았다. 떡돌이가 날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떡돌이는 웃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찻잔을 가져다가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았다. 제발 내가 유일하게 아는 녹차가 나오길 바라면서.
“…….”
젠장. 아니구나. 모르는 차야.
하지만 참으로 다행히도, 차 냄새를 맡는 순간 머리가 웬일로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차 이름에서 법칙을 찾아냈다.
내 앞에 차가 뭐였지?
콩차.
통통차.
퐁차.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홍홍차네요. 향이 참 좋아요.”
나는 우아하게 웃으면서 찻잔을 들고 황후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후궁들은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고, 곁에 서 있던 개시시는 얼굴이 빨개졌다.
어째서? 의아해서 둘러보자 후궁들은 더욱 크게 웃어댔다. 어리둥절해 있자니 개시시가 내게 살짝 알려주었다.
"그건 백호화차예요, 귀인."
"콩, 통통, 퐁, 다음은 홍홍이어야 하잖아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겠지만 아니에요.“
나는 찻잔을 들고 내 자리로 돌아가면서 힐긋 떡돌이를 보았다. 좀 적당할 때 끊어주지, 싶어서.
하지만 떡돌이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밝게 웃어대는 황후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도 떼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