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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87화 (87/283)

##  87화.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는 상황

몇 시진이 지나자 황제가 지시를 내린 그림자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황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상소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살폈느냐.”

“예.”

“어떠했지?”

“제대로 은신술을 익힌 자였습니다. 흔적이 아예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황제는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천년비.”

전에 기몽 장군이 한 추측이 떠올라서. 그 이름이 천 귀인이 입궁하기 전 사용한 이름일 수도 있다 했던가.

황제는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천년비. 천소여. 은신술. 저주. 입가에서 단어 몇 개가 줄지어 맴돌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 * *

‘어제는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어.’

비밀 장소에 가져다 둘 새 의복을 챙기면서, 이제는 황제가 언제 내 처소로 올지 모른다는 전제를 하고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온 귀인이 회임한 날에 바로 날 찾아올 줄 내가 짐작이나 했겠어?

하지만 황후와 손만 잡고 잔다 말하자마자 온 귀인이 회임한 게 밝혀졌는데도 저렇게 뻔뻔하다니.

‘황제가 되려면 원래 좀 뻔뻔해야 하나?’

* * *

새 의복을 숨겨두기 위해 비밀 장소에 가긴 했으나, 평소처럼 거기에서 수련을 하진 않았다.

대신 바로 내 처소로 돌아와서 평상에 앉아 부채질만 했다.

어젯밤, 혜비가 우 귀인과 그 수상한 자의 만남을 다시 주선해주겠다고 했지.

그 시간이 될 때까지 여기서 버티려는 것이다. 날이 더우니까.

사실 어제 숨어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차라리 나도 혜비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어쩌구 하며 접근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 수상한 자는 자꾸 내 이름이 써진 종이를 묻으라 내밀잖아?

그자가 내가 천 귀인이라는 걸 알고서 그러는지, 아니면 모르고 행동했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드디어 우 귀인의 약속 시각인 술시 초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한여름의 술시 초는 날만 맑으면 하늘이 파래서 아직 한낮처럼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어두워지겠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고서 산책을 좀 하겠다며 얼른 처소 밖으로 나갔다.

“소주, 어디 가세요?”

“산책. 혼자 다녀올테니 다들 여기 있어.”

* * *

우 귀인이 궁녀를 데리고서 찾아간 약속 장소는 이전과는 다른 곳이었다.

우 귀인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담장 앞에 서서 연신 초조하게 사방을 살폈고, 나는 그 담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커다란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지척에 있는 나무는 아니고, 건너 나무에.

너무 가까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오늘은 지난번과 목적이 다르니 위험도 조금은 감수해야 한다.

그곳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속 시각이 넘은 게 분명한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우 귀인은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궁녀에게 물었다.

“혜비마마가 제대로 전한 게 맞겠지?”

신경질이 섞인 불안한 목소리에 궁녀는 얼른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혜비마마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진 않을 겁니다.”

왜, 할 수도 있지.

어쨌든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는지라, 우 귀인은 입술을 짓씹으면서 연신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폈다.

다행히 혜비가 제대로 전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제 오네.’

나는 우 귀인보다 한발 먼저 약속 상대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약속 상대는 지난번과 달리 담을 사이에 둔 곳에 나타났다.

우 귀인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최대한 가까이 붙어도 사이에 담이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는 곳에.

이유는 딱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자. 지난번과 달리 관리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관리로 위장을 한 거야, 진짜 관리야?’

의아해하는 사이.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내쪽을 볼 듯 말 듯 고개를 드는 바람에 나는 인기척을 더 죽이고서 머리를 숙였다.

그 자세로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수상한 사람이 내는 특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 찾으셨다고요, 귀인.”

“왜 거기에 있지?”

이어 우 귀인이 내는 놀란 목소리.

나는 다시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아까보다 머리 위치를 낮추고서 보자,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선 수상한 사람과 우 귀인이 보였다.

우 귀인은 수상한 사람이 가까이 오지 않자 당황스러운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는 이 벽 너머에 있습니다.”

“나도 안다.”

“계속 두리번거리시길래.”

수상한 사람의 말에 우 귀인은 그 자리에 딱 얼어붙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지도 않은 상대가 벽 건너편에 있는 그녀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자 겁이 난 눈치였다.

하지만 우 귀인이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오래 지나지 않아 주위 살피기를 멈추더니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어디부터 들었는지 모르니 다 얘기하지. 천 귀인이 날 찾아왔다.”

“예. 들었습니다.”

“천 귀인은 꼭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했어. 내가 이상한 사람과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라. 혹시…… 네가 뭔가 흔적을 남겨서 그런 건 아니냐.”

우 귀인의 추궁에 수상한 사람은 대번에 대답했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 대답이 기분이 나쁜지 우 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네를 만났을 때 외엔 난 아무 행동도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절 만나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귀인께선 제가 의뢰를 완수했는지 아닌지만 지켜보시면 됩니다.”

수상한 자의 대답에 우 귀인은 팔짱을 끼고서 벽이 그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쪽이 의뢰를 완수했는지, 촉비나 천 귀인이 제풀에 사고를 쳐 몰락하는지 어떻게 알지?”

“임무를 마치면 그 자리에 나비 모양 비녀를 꽂아두겠습니다. 이거면 됐습니까?”

“…….”

“이젠 절 더 찾지 마시지요.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대화는 길지 않았고 이번에는 오가는 물건도 없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수상한 자는 자기가 온 방향으로 가버렸다.

우 귀인은 담벼락에 귀를 대고서 그자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주?”

이 상황이 두려운지, 우 귀인의 궁녀는 그런 주인에게 겁먹은 얼굴로 졸라댔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또 누가 볼까 무섭습니다.”

발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된 건가. 우 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상한 자와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이번에는 수상한 사람 쪽을 따라갔다.

나무에서 담벼락을 한 번에 건너뛴 다음 치맛자락을 위로 잡아 올리고서 속력을 빠르게 냈다.

후궁 복장으로 뛰다 보니 무복을 입었을 때만큼 다리가 편하진 않았다.

담벼락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도 눈에 잘 띌 테고.

그래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긴 하다.

“천 귀인께 인사드립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냥 멈춰 서기만 해도 위장이 되거든.

웃으면서 지나가는 궁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람들이 지나가자마자 나는 다시 속도를 내어 뛰었고 마침내 그자를 발견했다.

그자는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한 손으로 벗으면서 다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진짜 관리인가?’

다리 쪽에는 바짝 추적할 만한 곳이 없어서 나는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 들었다.

하지만 뒷모습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 모양은 잘 보이지만 관리들 머리 모양이야 거기서 거기고.

그런데 다리를 건너가던 그 수상쩍은 인물은 다리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서더니 더 나아가지 않았다.

물고기 밥이라도 주려는 건가? 왜 저러는가 유심히 보고 있자니 그자가 뒷짐을 지고서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빙그레 올라간 입꼬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웃지?’

이상하단 생각을 하는 순간. 그자가 건방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만 나오지.”

* * *

상대가 나를 발견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치마를 슬쩍 들춰 종아리에 묶어 두었던 단도를 꺼내 쥐었다.

지체없이 뛰어나가자 뒷짐을 지고 다리에 서 있던 자가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손을 뻗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생각나진 않지만.

하지만 지금은 놈과 손을 섞는 게 더 중요하기에 나는 이자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리는 대신 공격하고 피하고 막고 방어하는 데 더 집중했다.

원래의 몸이었더라면 손쉽게 상대할 정도이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그렇게 쉽게 제압할 실력자가 아니다 보니 신중해야 했다.

그러다 누군가 지나가는 인기척이 나는 순간.

우리는 무기를 감추며 서로 흩어져 다른 방향을 향해 섰다. 다른 방향으로 다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스쳐간 사람들처럼.

어쨌든 잠깐 생긴 여유 덕에 이자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 한림원 학사다. 똑똑한 사람.’

젠장, 똑똑한데 강하기까지 하다고? 믿을 수 없다!

분노가 솟아나자 아까보다 좀 더 감각이 예리해진다. 나는 온 신경을 사방으로 집중했다.

둘 다 정체를 감추는 처지인지라 잠시 생긴 이 틈.

인기척을 내던 사람이 떠나가면 저 학사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공격하겠지.

누가 먼저 공격을 할지에 따라 싸움의 승패가 갈릴지도 몰랐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다리 너머 잉어를 구경하는 척하기를 잠시.

인기척을 내던 사람이 지나가자마자, 나는 다리 난간을 박차고 호수를 향해 뛰었다.

내가 바로 자기에게 뛰어들 거라 여겼던 학사는 헛손질을 하다가 놀라 내 쪽을 보았으나, 그땐 이미 내가 던진 단도가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

관리복을 입고 복면을 착용한 다음 우 귀인을 만나야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이자가 오간 길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나는 기절한 학사를 비교적 수월하게 근처의 빈 궁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궁궐에서 좋은 건 빈 궁은 빈 궁 티가 난다는 거야.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게 딱 보이거든.

빈 궁에서도 안쪽에 있는 방까지 학사를 끌고 간 다음, 나는 문을 단단히 닫고서 학사를 먼지투성이 침상에 던졌다.

떨어져 있던 올가미 모양 밧줄을 주워 팔을 단단히 묶은 뒤 점혈까지 하고서 깨우자, 학사는 눈을 번쩍 뜨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제야 학사의 이름이 기억났다.

“비원.”

내가 이름을 부르자 학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묶인 채 들어올려 나를 가리켰다.

“천 귀인.”

목소리 변조를 푼 건지, 아까 우 귀인을 대할 때의 그 괴이한 목소리가 아니라 전에 들었던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나는 녀석의 코앞으로 다가간 다음 단도를 꺼내 눈앞에 들이밀고서 물었다.

“왜 염 귀인과 우 귀인에게 이상한 종이를 주고 묻게 했지?”

“천년비진쾌도래. 이거 말입니까.”

“그래.”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방 안을 한 번 살폈다. 전에 태감 시체가 떠오른 우물도.

상황에 따라 이자를 죽여 입을 막아야 할 가능성도 생각은 해야 하니까.

그런데 미친놈인가. 비원은 앞으로 죽을지 살지도 모를 상황인데, 눈앞에 칼이 들이밀어 졌는데도 낄낄 웃어댔다.

왜 저러나 싶어 보고 있자니 그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무술을 오래 익히지 않았는데도 움직임이 예리하고. 내공이 깊지 않은데도 무공의 고수를 제압하고. 멍청한데도 결투에선 지형지물을 응용하는 방식이 뛰어나고. 경험은 노련한데 수련의 흔적이 없다. 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가 돌연 정색하더니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은 딱 하나뿐입니다. ……천 귀인, 천년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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