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귀엽다고 넘어가진 않는다
이렇게 어둑어둑한 데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은 남의 집 지붕에 납작 달라붙어 있기 딱 좋은 날이다.
어두운 데다 흑색 옷을 입고 있으니 잘 보이지 않기도 하거니와, 사람들도 죄다 우산을 쓰고 다녀서 지붕 위는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혜비의 처소 주위를 멀찍이 떨어져 살피다가, 인적이 드문 쪽을 통해 가까이 접근한 다음 창문 아래에 납작 달라붙었다.
* * *
“우 귀인,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혜비는 붓글씨를 쓰고 있다가 우 귀인의 뜻하지 않은 방문에 의아해 물었다.
우 귀인은 쓰고 온 우산을 궁녀에게 들려주고서 인사를 올렸다.
“혹시 제가 방해가 되었을까요?”
“그럴 리가.”
혜비는 방긋 웃고서 붓을 내려놓고 우 귀인의 손을 잡아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온 귀인의 회임 소식 때문에 나도 좀 심란하던 차였네.”
“최근에 시침을 든 건 황후 마마와 천 귀인, 온 귀인뿐이니까요.”
우 귀인이 점잖게 하는 말에 혜비는 미묘하게 웃었다.
“같은 후궁이라지만 온 귀인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낯설지. 그런데 가장 먼저 회임을 하니 영 기분이 이상해. 차라리 황후 마마나 천 귀인이 회임을 했다면 기분이 더 나았을 텐데.”
혜비의 궁녀가 뚜껑 달린 찻잔을 가져와 우 귀인의 앞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우 귀인이 찻잔을 들어 올려 뚜껑을 열자 안에서 뜨끈하게 김이 올라왔다.
거센 비를 뚫고 오느라 식었던 손이 도자기 찻잔의 온기로 따뜻해지자, 우 귀인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부터 혜비에게 하려는 이야기. 과연 정말로 해도 좋을까?
혜비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서 웃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리 눈치를 보나.”
혜비는 눈치가 빨랐다.
우 귀인은 혜비가 이미 자신이 목적 없이 방문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자, 찻잔을 무릎 위에 얹고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에 제게 소개해주신 그자 말입니다, 마마.”
“그자?”
“소원을 들어주는…….”
우 귀인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혜비가 벌떡 일어서더니 아까 붓글씨를 쓰던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우 귀인은 덩달아 같이 일어섰다.
“그자는 왜?”
“누군가 제가 수상한 사람과 만나는 걸 봤다는데. 인상착의가 꼭 그자 같아서요.”
헤비는 붓에 먹물을 묻히다 말고서 눈살을 찌푸리고 우 귀인을 쳐다보았다.
“정말인가.”
“네.”
“그런데 여길 왔다고? 누군가 자넬 의심하면 행동을 더욱 조심하고 아무 데도 가지 말았어야지!”
혜비가 꾸짖자 우 귀인은 얼른 두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혜비 마마.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요. 그자… 혜비 마마께서 알려주신 그자가 정말 믿을 만한 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염 귀인이 살아 있었다면 염 귀인에게 물으면 됐겠지만, 염 귀인은 이미 사망했으니 물어볼 사람이라곤 비원을 소개해 준 혜비뿐이었다.
혜비는 불쾌한 듯했으나 우 귀인이 고개를 내리고서 제대로 들지도 못하자,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주선해주지.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두 번 다시는 이 일로 나를 찾지 말게. 다음에 만날 방도는 그자와 직접 맞추든가 마음대로 하고.”
* * *
약속 시간과 날짜 등을 다 듣자마자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와 희원궁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알찬 수확이었다. 염 귀인과 우 귀인뿐만 아니라 혜비 역시 그 수상한 사람과 관련이 있단 걸 알았고, 혜비가 우 귀인보다 좀 더 수상한 인물과 가깝단 것도 알았고, 우 귀인이 그 수상한 자와 언제 만날지도 알게 되었으니까.
자…… 이렇게 됐으니, 우 귀인에 대한 건 내일이 되어 봐야 알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이제 어쩐다.
황제가 내 처소에 딱 붙어서 지키고 있을 텐데. 나한테 검은 무복 차림으로 어딜 다녀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 * *
“소주?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세상에, 소주! 쫄딱 다 젖으셨어요!”
사실은 내 비밀 훈련 장소에 옷을 좀 가져다 뒀지. 은신술을 조금씩 사용하게 된 후부터 만약을 대비해서.
하지만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라 하더라도, 자겠다고 한 내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까진 숨길 수가 없는지라 바로 소란이 일어났다.
그 상태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떡돌이가 홀로 차를 마시다가 나를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꾸벅 인사를 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녀들이 달려와서 내 머리카락이며 손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동안에도 떡돌이는 내 침상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면사 때문에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웃고 있는 건 확실히 아냐. 눈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잖아. 삐진 게 분명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승언이도 느꼈는지, 그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 초조하게 바스락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내 홀딱 젖은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 조금 문제가 생겼다.
궁녀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나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는데, 내내 아는 척도 하지 않던 황제가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건 것이다.
“나가 보아라. 천 귀인 옷은 짐이 갈아입혀 줄 테니.”
그 소리에 원웅과 부성은 입을 쩍 벌리더니 자기들끼리 묘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나갔다.
반면 나는 황제가 또 뭔 짓을 하려는가 싶어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상태로 뚫어져라 보고 있으려니 떡돌이는 내 앞에 조금 건성건성하는 태도로 다가와 자기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우리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떡돌이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 계란이는 대체 어디에 다녀왔을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어디 다녀오긴. 잠시 산책 좀 하고 왔지.”
“이 비 오는 날에?”
“암.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궁녀들에겐 잘 거라 말하고서?”
“암. 난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내가 당당하게 대답하자 떡돌이는 좀 헷갈리는지 미간을 찌푸리고서 뒤로 물러나 내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살펴도 내 옷은 멀쩡한 후궁 복장이니 이상할 부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기까지 한 다음, 아직도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원웅이 놓고 간 침의를 들어올렸다.
“누군가 네 방에서 나가는 걸 봤는데, 계란아.”
“그래? 누구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길래, 방 안에 들어와 보니 네가 없던 걸까.”
“나는 원래부터 산책 나가서 방에 없었잖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다녀갔는지는 나도 몰라.”
“…….”
“그런 간단한 걸 모르다니. 떡돌이는 나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네.”
내 변명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려서, 떡돌이조차 내 말을 의심하지 못하고 혹하는 기색을 보였다.
떡돌이는 유심히 나를 살폈으나 내가 눈도 깜짝하지 않자 결국 완전히 넘어가 수긍했다.
“하긴. 네가 없을 때 일어난 일을 네게 물으면 안 되지.”
“지금 이해하는 척하면 무슨 소용이겠어.”
떡돌이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고서 내 침의 끄트머리를 쭈욱 잡아당겼다.
왜 저래? 나도 얼결에 같이 침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러자 졸지에 옷 한 벌을 두고 나와 떡돌이가 잡아당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우리 둘 다 이 옷을 노리는 것처럼.
그게 의아해서 쳐다보니, 떡돌이는 떡돌이대로 날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당연히 내가 이 침의를 자기에게 줄 거라 생각했단 것처럼. 왜 그걸 당연하다 여긴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놓지 않고 침의를 잡아당기자, 이윽고 그의 입술 끝이 비틀리듯 올라가는가 싶더니 도발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잡다니. 짐에게 주기 쑥스러운가 보군.”
“네 거 입으면 되잖아. 난 여름용 침의가 두 벌 뿐인데 왜 내 걸 노려?”
내가 항의하자마자 기겁해서 바로 침의를 놓아버렸지만.
이윽고 그는 내가 침의를 소중히 안고 경계하듯 쳐다보자, 자기 관자놀이를 누르며 항의했다.
“짐이 입으려는 게 아니라 네가 옷 갈아입는 걸 도우려던 거다. 넌 어째서 항상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거냐.”
“돕긴 뭘 도와. 나한테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부끄러움은 없구나. 눈치도 없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황제는 곧 침상으로 걸어가더니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이상한 사람이야.
어쨌든 황제가 변명을 끝내고 내 침의를 포기하자, 승언이 얼른 다가와 그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사이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얼른 손을 움직였다. 비에 흠뻑 젖어 자꾸 다리에 달라붙는 치마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하지만 내가 홀랑 치마를 아래로 내리자마자 황제는 또 기행을 벌였다.
“젠장. 계란아!”
비명을 지르더니 갑자기 승언이를 패대기친 것이다. 놀라서 쳐다보자, 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쓰러진 승언의 눈을 가리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하나 싶어서 보고 있자니, 그는 승언을 번쩍 들어 올린 다음 그를 근처에 있는 커다란 병풍 뒤로 굴려 넣었다.
“왜 승언이를 괴롭혀?”
하도 이상해 묻자, 황제는 ‘그걸 모르겠어?’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자신은 다시 침상으로 걸어가며 손을 저었다.
“너 때문 아니냐. 너를 저기 넣을 수 없으니 승언이를 넣은 거다. 제발 아무 데서나 홀랑홀랑 벗고 좀 그러지 마라. 응?”
“온 귀인이 회임해서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계란아.”
“진짜야. 온 귀인이 회임했단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알아? 잠시 까먹었는데 이제 생각났네.”
“계란아.”
“변명하려고? 무슨 변명을 하려고? 온 귀인 애가 네 애가 아니기라도 하단 거야?”
“계란아.”
사람이 항의하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자꾸 ‘계란이 계란이’ 하며 불러대서 쳐다보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고서 자기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옷부터 마저 입고 따져라.”
“난 괜찮아. 개의치 않아.”
“짐이 신경이 쓰인다!”
* * *
다음날. 황제는 침상에 베개를 끌어안고서 비몽사몽 누워 있는 천 귀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얼굴에 미역처럼 흩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뒤로 넘겨주었다.
“떡돌아…….”
반쯤 눈을 뜨고 부르기에 눈꺼풀에도 입을 맞추자 안 그래도 처진 눈썹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황제는 천 귀인의 축 처진 눈썹을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면사를 착용하기 전 그 눈가에도 입을 맞춘 다음 밖으로 나갔다.
얼굴을 가려 제대로 표정을 볼 수 없으나, 황제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사람들은 온 귀인이 회임한 일로 골이 난 천 귀인을 황제가 잘 달래고 돌아가는 거라 확신했다.
그 기색을 살피며 승언은 황제가 어제저녁 아무도 몰래 천 귀인이 자리를 비우고, 그 사이에 복면인이 다녀간 일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시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침궁으로 걸어가자마자 황제는 다른 그림자를 불러 바로 지시했다.
“어젯밤 천 귀인의 처소에서 누군가 은밀히 빠져나가 동영궁 담을 넘어 승언이와 싸웠다. 비가 내려 흔적이 많이 지워졌겠지만 최대한 족적을 살펴 그자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