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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85화 (85/283)

##  85화. 번쩍거리는 침입자

황제의 명령을 받은 승언은 기척을 감춘 채 빠르게 습격자를 쫓아갔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을까. 동영궁 돌담을 넘을 즈음, 습격자가 힐긋 뒤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속력을 더 빠르게 올렸다.

‘어딜!’

승언 역시 속력을 한층 더 높이면서 벽을 연달아 세 번 딛고서 높은 담장을 눈 깜짝할 사이 넘었다.

하지만 담을 넘자마자 바로 쏟아진 공격에 그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비틀어야 했다.

원래 목표한 자리를 벗어나 바닥을 딛자마자 상대의 공격이 다시 연거푸 쏟아졌다.

내내 도망치는 것 같던 습격자가 먼저 담을 넘어가서는 숨어서 공격을 대기하고 있던 거였다.

습격자도 몸이 날랬지만 승언 역시 황제를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호위답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서 물이 튀었으나, 빗소리가 거센 데다 저녁인데도 벌써 밤처럼 어두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연달아 몇 합을 주고받았지만 싸움에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습격자가 나무와 담을 딛고서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

위에서 공격하다니, 멍청하다. 코웃음을 치며 상대의 공격을 역으로 돌려줄 준비를 하던 승언은 깜짝 놀랐다.

습격자가 높이 뛰자 어딘가의 등불을 받아 습격자의 옷에 박힌 은박과 금박이 번쩍 찬란하게 빛이 난 것이다.

‘무슨 저런 요란한 옷을!’

차갑게 달려들던 승언은 그 눈부신 빛에 순간 당황해서 조금 비틀하고 말았다.

이것까지 상대의 전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승언이 재빨리 균형을 다시 잡으며 이어 달렸을 땐 이미 상대는 사라진 후였다.

먼저 공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승언의 발을 묶을 생각이었을 뿐, 헤칠 마음은 없던 모양이었다.

승언은 지붕 위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거센 빗줄기 탓에 상대의 기척도 흔적도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내려왔다.

* * *

승언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황제에게 돌아가자, 황제는 천 귀인의 침상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습격자는. 어디로 갔지?”

승언은 황급히 황제의 발치로 다가가 부복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놓쳤습니다.”

황제가 대답 없이 차만 홀짝이자, 승언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재차 설명을 이었다.

“잠깐 대치했는데, 방심해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습격자 주제에 요란한 옷을 입었던 상대를 떠올리자 승언은 좀 억울해졌으나, 어쨌든 거기에 놀라 방심한 것도 그의 실책이었다.

황제는 찻잔을 옆의 다탁에 내려놓았다.

“방심해서 놓쳤다?”

“……송구합니다.”

“너보다 강하더냐.”

“저보다 강한진 모르겠사오나 강한 사람은 맞았습니다.”

황제가 일어나라고 손짓하자 승언은 얼른 부복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텅 빈 침상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승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 뒤쪽에 눕거나 앉아 있어야 할 천 귀인이 보이지 않았다.

몰래 여기에 들어올 때 보기로는, 분명 외출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러면 천 귀인이 어디로 간 거지? 목욕하러 갔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승언의 귀로, 황제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그 습격자가…… 혹시 천 귀인 같으냐.”

승언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습격자가 천 귀인 같으냐니?

승언은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빛 한 점을 받아 요란하게 반짝거리던 습격자의 의상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예상치 못한 점은 확실히 천 귀인 같기도 한데…….

* * *

“사하비단의 천년비가 마교에 방문한다고?”

가짜 천년비를 한 번 더 확인하고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몇 개월.

드디어 개원은 그녀를 한 번 더 만날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마교.

가짜 천년비가 중소 흑도 방파들을 돌아다닌단 얘기는 있었으나, 그녀가 방문하는 방파들은 대부분 명성 없는 곳들이라 천년비가 다녀가기 전에는 관련된 소문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방문지로 택한 마교는 흑도 단체 중에서도 가장 명성이 드높은 곳이었고, 여러 번 정파와의 싸움을 계속하면서도 여전한 위상을 유지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아직 방문하기도 전인데, 벌써 천년비와 마교의 만남에 대한 소문이 쉬쉬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이긴 하나? 대체 어디서 나온 얘기야?”

“모르지. 하지만 천년비나 마교나 자기들이 헛소문에 연루되는 걸 두고 본 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천년비와 사하비단은 대체 흑도 방파들을 오가며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하군.”

“그러니까. 하지만 다녀간 문파들에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해주니 알 길이 있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흑도끼리 손을 잡아서 이번에야말로 무림을 손에 넣자, 이런 거겠지. 마교 쪽 놈들 원하는 거야 늘 고정된 거 아니던가.”

“거기에 천년비가 포함되니까 그러는 거지!”

“천년비도 무림인들에게 원한이 깊지 않나. 독불장군은 그만두고 손을 잡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개원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흑립을 쓰고서 차를 마시다가, 반 정도가 남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찻값을 치르고 곧장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개원은 어떻게 해야 마교에 다녀올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마교는 정파 영웅인 그와는 천적 같은 곳이었다.

그가 천년비가 보고 싶어서 방문했다고 하면, 들여보내 주긴 할 것이다. 감옥 어딘가로.

그때, 생각을 정리하기 전. 방문이 발칵 열리더니 그의 동생이 들어왔다.

“형님!”

동생은 다급한 얼굴이어서, 개원은 흑립을 벗으면서 의아해 쳐다보았다.

동생 운호는 황급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개원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물었다.

“마교에 숨어 들어가려는 거지?”

운호 역시 천년비와 마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달려온 듯했다.

개원은 흑립에 달린 끈을 돌돌 말아 옆에 두면서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아직 마음을 안 정했는데. 네가 어찌 이리 빨리 알았지?”

“동생이니까!”

“그러면 내가 마음을 안 바꿀 거란 것도 알겠구나.”

개원은 동생의 팔을 툭 두드리고서 거추장스럽게 묶어 놓은 옷의 매듭도 풀었다.

운호는 장난칠 기운이 아닌지 이를 세우며 외쳤다.

“천년비를 보려고 그래? 그 여자 자결했어. 형이 자기 시체를 볼 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죽었잖아!”

“안다. 천년비는 죽었지. 사하비단과 다니는 건 가짜일 거고.”

“그런데 왜 보러 가겠단 건데! 가짜인 거 안다며!”

운호가 버럭 언성을 높이면서 형을 붙잡자, 개원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칭범을 죽일 거다. 천년비의 이름을 아무도 더럽히지 못하게.”

그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개원의 현재 감정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운호는 기가 막혀서 형의 팔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형에게 상처만 주고 죽은 여자 뭐가 어디가 예쁘다고!”

“누군가 민신을 사칭하면 너도 가만히 있지 못할 텐데?”

“민신은 그 악적과 달라! 비교도 하지 마, 형!”

“민신은…… 좋은 여자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개원은 잠시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 서늘하게 운호를 보더니 진짜로 화가 난 눈빛으로 말했다.

“천년비도 좋은 여자다. 민신만큼. 아무도 보려 하지 않았을 뿐.”

그 표정을 본 운호는 팔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운호의 팔이 아래로 뚝 떨어지자, 개원은 벗은 겉옷을 의자에 걸고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운호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다가, 얼른 앞으로 가 시선을 맞추고서 말의 방향을 바꿔보았다.

“그럼 형, 시시라도 보고 가.”

시시 이야기에 개원은 손을 멈추고서 돌아보았다. 아까와 달리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시시는 입궁했다 들었는데?”

“곧 생일이잖아. 생일엔 가족들이 보러 갈 수 있대.”

운호는 어떻게든 이걸로 시간을 번 다음 그사이에 형을 말릴 생각이었다.

개원은 동생의 그 속내를 뻔히 다 알았으나, 사촌 동생인 시시의 생일이라고 하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시시가 평범하게 사가에서 지낼 때라면 한 번이나 두 번쯤은 바빠서 못 챙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시는 후궁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후궁이 되면 얼굴을 보는 게 자유롭지 않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또 언제 올지도 몰랐다.

내년 생일 시기에 하필 황후나 황제, 태후의 미움을 산다면 가족들을 부르지 못할 수도 있고.

운호는 형이 흔들리는 걸 눈치채고서 얼른 설명을 더해갔다.

“우리 가문이 좋은 가문이지만, 다른 후궁들 가문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 우리 가문 힘이 약해서 시시가 잘 적응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거라면 내가 가봐야 소용이 없을 텐데.”

“그래도 가족이 한번 가는 거랑 아닌 거랑 전혀 다르지. 게다가 황궁 높은 분들 중에도 무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대. 형은 무림에서 손꼽히는 영웅이니, 가면 누군가는 관심을 보일 거야. 시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응?”

* * *

‘승언이는 시력이 약하구나.’

승언이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자니, 나중에 좀 골치 아파지겠구나 싶어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얼핏 지나가면서 보니 황제가 내 처소에 오고 있던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내 처소를 보고 있는데 도로 그 안에 기어들어 갈 수는 없었는걸!

‘젠장. 오늘은 온 귀인이 회임을 했으니 분명 그 사람한테 갈 줄 알았지.’

어쨌든 지금 들어가나 나중에 들어가나 황제의 눈치를 보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같은지라, 나는 그냥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우 귀인의 처소로.

희원궁 안으로 들어가 우 귀인의 지붕 위에 올라가 우 귀인 처소를 빤히 보기를 얼마쯤 되었을까.

오늘은 우 귀인이 이동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드디어 그녀가 처소 밖으로 나왔다.

옆에는 궁녀가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 사립문을 빠져나온 우 귀인은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서 걸어갔다.

이상한 곳에 가는 게 아니니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로.

하지만 잘 걸어가다가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태도에서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 드러났다.

어둠과 비를 틈타 따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목적지가 드러났다. 혜비의 처소였다.

‘혜비? 왜 혜비에게 이렇게 은밀히 가지? 이 일에 혜비가 관련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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