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84화 (84/283)

##  84화. 우 귀인 찔러보기

우 귀인 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청천궁으로 돌아가 보니, 온 귀인은 침상에 누워 손목을 내밀고 있었다.

”어떤가?“

그 모습을 황후가 머리맡에 선 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주위에 둘러선 다른 후궁들도 다들 긴장해서 탕 궁의의 입만 쳐다보았다.

탕 궁의는 신중하게 맥을 짚다가, 마침내 얼굴이 환해지더니 손을 떼고서 황후를 향해 밝게 보고했다.

“회임하셨습니다, 황후 마마. 온 귀인께서 폐하의 첫 번째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후궁들 사이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탕 궁의는 활짝 웃으면서 황후를 보았다.

“경사로군요!”

이어서 탕 궁의는 침상에 누운 온 귀인에게도 함빡 웃으면서 인사했다.

“축하드립니다, 귀인!”

“고맙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귀인의 표정이 하얀 눈처럼 밝아졌다.

그녀는 자신의 배 위에 두 손을 얹더니 볼만 빨개져서 황후를 쳐다보았다. 칭찬이라도 바라듯.

하지만 황후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얼굴일 뿐.

아니, 여기서 활짝 웃고 있는 건 탕 궁의와 온 귀인 뿐이었다.

그건 얼마 있지 않아 온 오 공공 역시 마찬가지여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 * *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네고 다같이 흩어지자마자 원웅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오 공공은 표정이 왜 그랬던 걸까요?”

부성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더니 입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고서 수군거렸다.

“제가 보기에도요. 나중엔 기뻐하는 척했지만, 처음엔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나를 힐긋거리더니 곧 뿌듯하게 웃으면서 내게 아부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공공이 그런 이유는 뻔하지요.”

“그럼요. 폐하께서는 소주가 가장 먼저 회임하길 바라셨던 거예요.”

“그런데 뜬금없이 온 귀인이 회임해 버리니까 당혹스러우셨겠죠.”

“오 공공은 폐하와 자주 붙어 다니니 이런 속내를 알 거잖아요?”

이게 날 위로하는 말인지 본인들을 위로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다가 저 말들이 다 진실이라 해도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회임할 일이 없고 온 귀인은 시침 한 번에 바로 회임해 버린 게 진실인데.

나도 회임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복수를 60년은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단 걸 각오해야 하는데.

글쎄. 떡돌이가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두 궁녀와 걸음을 맞추어 앞으로 나갈 때마다 들려오는 흙 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진다. 잠깐 비가 왔던 걸까?

나는 걷던 걸 멈추고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이 시커맸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이런 날에는…… 은신술이 딱 제격이지.

“원웅아.”

“네, 소주.”

“검은색 무복을 하나 구해다 줄래? 그 뭐야, 말 타고 공 치던 거. 뭐였지?”

“마상 격구요.”

“그래, 그거 할 때 입으려고. 바지로 구해다 줘.”

“네.”

“최대한 빨리. 그리고 부성아.”

“네, 소주.”

“우 귀인한테 다녀오자.”

“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우 귀인은 왜요? 두 사람이 동시에 비슷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긴 왜겠어.

* * *

온 귀인이 확실하게 회임했단 소식을 듣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청천궁으로 향했다.

그는 온 귀인이 가진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걸 확신했지만, 그걸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진실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몹시 골머리가 아팠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지금 딱 그의 속내와 비슷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어쩌실 건지요, 폐하?”

“고민하는 중이다. 온 귀인에겐 아이가 죽었다 하고서 다른 가문에 입양을 보낼지. 키우긴 하되 적당한 때 계승권만 박탈할지.”

“태어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게 가장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황제는 “아이 성별을 보고 정하지.”라고 대답하다가 어딘가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오 공공이 그 방향을 보니 천 귀인이 길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 하늘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기 궁녀들을 번갈아 보더니, 무어라고 말을 했다.

대체 어떤 말을 한 건지 궁녀들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짓자, 오 공공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가 천 귀인을 못 본 척하고 황후에게 갔던 날.

천 귀인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두 사람 사이는 기적적으로 이전과 엇비슷하게 다시 맞춰졌다.

그런데 다시 이런 일이 생기자 옆에서 보기에 괜히 송구스러웠다.

차라리 온 귀인의 아이가 진짜 황제의 아이라면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란 걸 알다 보니 더욱 그랬다.

“천 귀인이 또 짐 때문에 상처를 받겠구나.”

하지만 이건 황제로서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다.

다른 후궁과 황후와의 시침은 그가 피하고 있었으나, 자신과의 시침은 천 귀인이 피하고 있는 거니까.

“폐하, 천 귀인께 가보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위로해주시면 한결 안심하실 겁니다.”

오원요의 제안에 황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이 상황에서 뭐라 하겠느냐. 저 성격에 지금은 짐의 얼굴만 봐도 흥분해서 화를 낼 텐데.”

황제는 검은 하늘을 천 귀인처럼 한 번 올려다보고서 중얼중얼 덧붙였다.

“이따 좀 어두워지면…… 그때 찾아가지.”

* * *

희원궁에는 아직 염 귀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우 귀인을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원궁에 오긴 했으나, 아직 비어 있는 염 귀인의 방을 지나가자 저절로 심장이 섬뜩해졌다.

당장이라도 열린 문 너머로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서 “나도 나지만 천 귀인도 진짜 수를 못 놓네요.”라고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아서.

죽은 사람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몹시 낯선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걸 표현하면 부성이 또 감당 못 하고 울어대겠지. 나는 염 귀인의 처소 근처를 말없이 지나가 우 귀인의 처소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날씨가 무덥기 때문인지 우 귀인은 처소 앞마당 평상에 앉아 있었는데, 궁녀의 부채질을 받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무섭게 구기고서 일어났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죠?”

몹시 더워하는 것과 달리 우 귀인은 격식대로 다 차려입고 있었는데, 아까 온 귀인의 회임 소식에 우 귀인도 왔기 때문에 그렇다.

“염치가 있으면 희원궁에 발도 들이지 말아야 할 텐데?”

우 귀인은 물론 우 귀인의 궁녀와 태감들도 괜히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전혀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았기에 나는 우 귀인의 근처로 다가가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우 귀인.”

“방금 내가 염치가 있으면 발도 들이지 말라 한 거 못 들었어요?”

“혹시 최근에 이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천 귀인. 내 말 무시해요?”

“아주 수상하고 목소리가 특이한 사람이요. 그런 적 있나요?”

“!”

우 귀인은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옆에 선 궁녀는 눈동자를 떨다가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우 귀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발칵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말아요!”

“그래요? 이상하네, 분명 우 귀인을 봤다고 그랬는데…….”

내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몸을 돌리자 우 귀인은 황급히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았다. 돌아보자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가 날 보다니?”

대답 대신 나는 그녀의 손에서 내 팔을 힘주어 빼냈다. 우 귀인은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천 귀인. 무슨 말이냐니까?”

“대낮에 대뜸 손잡고 그러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천 귀인!”

“내 할 말은 다 끝났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안녕.”

손을 흔들고서 몸을 돌리자,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우 귀인이 저주 비슷한 걸 마구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욕인지 저주인지 애매한 소리를.

“왜 저렇게 혼자 흥분하신 거예요? 무서운 말을 막 하시고.”

그게 이상한지 부성은 치를 떨며 중얼거렸지만 나는 모른 척 어깨만 으쓱했다.

* * *

동영궁 안으로 들어설 즈음부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내가 처소에 다 도착했을 때는 빗줄기가 굵어졌다.

“세상에. 흠뻑 다 젖으셨어요, 소주!”

원웅은 검은 무복을 구하고서 처소에 먼저 도착해 있다가, 나와 부성이 쫄딱 비에 젖어 들어가자 커다란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그녀가 마른 수건으로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닦아주는 동안 나는 게걸음으로 이동해 탁자 위에 원웅이 가져다 놓은 무복을 살폈다.

내가 말한 대로 검은 무복이었다.

“무늬가 너무 화려한 거 아냐?”

위에 이상한 장식이 너무 많이 달리기도 했고.

“마상 격구 할 때 입으실 거 아니에요? 가장 돋보이려면 이런 건 입으셔야지요.”

하지만 아무리 내 궁녀에게라 해도 ‘이건 마상 격구용이 아니라 은신술을 써서 돌아다닐 때 입을 옷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영 탐탁지 않았지만 대충 검은색인 데 만족하기로 하고서 나는 건성으로 원웅을 칭찬해주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가져오느라 수고했어.”

어쨌든 무복이 있으면 됐다. 나는 요란한 검은 무복을 두 손에 들고서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은 아직 검었고 비는 세차게 내렸다. 쉬이 그칠 비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아까 내가 우 귀인을 찾아간 건, 그녀가 내게 순순히 정보를 줄 거란 기대를 해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가 자극받을 말을 뱉어 들쑤신 거고.

제대로 찔러 놓았으니, 아마 우 귀인은 자신이 수상한 사람과 만나는 걸 보았단 그 목격자를 알아내기 위해 행동할 거야.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자.’

* * *

황제는 천 귀인을 위로하기 위해 업무를 몰아서 보자마자 동영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계란이가 분노해서 무슨 말을 해댈지 모르는데, 이를 어쩌나’ 고민하면서 걸어가고 있자니 천 귀인의 처소에서 누군가 쏙 튀어 나가는 게 보였다.

검은 무복 차림에 얼굴을 가린 차림새. 분명 수상한 자였다.

게다가 바로 옆에 있는 오원요는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은신술이 뛰어났다.

황제가 눈짓하자 기척을 죽이고 따라오던 승언이 얼른 그 침입자를 쫓아 달려갔다.

두 사람이 한 장소를 빠르게 오갔는데도 이곳은 비 내리는 소리만 고요히 울릴 뿐, 아주 조용하고 한적했다.

“폐하? 왜 그러시는지요?”

황제가 갑자기 멈춰서자 오원요가 의아해 불렀다.

“아니다. 가자.”

승언이 사라지는 걸 본 황제는 고개를 젓고서 발걸음을 더 빠르게 해 천 귀인의 처소 사립문을 얼른 열고 들어갔다.

피 냄새도 없고 비명 소리도 없던 걸 보아 도둑이나 밀정 쪽에 가까워 보이나, 혹시 모르지 않는가.

천 귀인은 갑자기 기절하는 일도 잦고.

“천 귀인은?”

“피곤하시다며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천 귀인의 궁녀에게 문을 닫고 나가라 하고서, 뒷짐을 지고 천 귀인의 침상으로 바빠 걸어갔다.

“계란아.”

천 귀인을 부르자마자 황제는 얼른 이불을 걷어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놀라서 이불을 도로 내렸다. 천 귀인이 없었다. 이불 밖으로 볼록 튀어나와 있는 건 베개였다.

황제는 사람을 부르려다가 멈추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천 귀인의 처소에서 은밀히 빠져나가던 누군가가 떠올라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