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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83화 (83/283)

##  83화. 급한 일은 아니고

염 귀인의 죽음으로 궁궐 전체의 분위기가 우중충하게 변한 이때, 비원은 뒷짐을 지고서 난각 앞에 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염 귀인이 죽었다…….”

사람들은 염 귀인이 무리한 수사로 마음고생을 하다가 제대로 자지 못해 급사했다 말하지만, 비원은 염 귀인이 죽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혼령을 다루는 건 몹시 위험한 데다 후유증이 컸다.

비원이 자신이 직접 주술을 쓰지 않고, 굳이 다른 이들에게 시키는 것도 그 위험성 때문이었다.

즉, 염 귀인이 죽은 건 주술이 제대로 작용했다는 뜻.

“하면 정말 천 귀인의 몸에 천년비의 영혼이 있는 건가.”

비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확률은 7할.”

아직 여러모로 변수가 있지만, 이 정도면 정체를 의심할 만하다.

“한 번 더 확인해보면 좋을 텐데.”

비원은 혀를 찼다. 소원을 빌고 싶어 하는 이들은 넘쳐나니, 누구에게든 또 종이와 머리카락을 묻게 하면 되기는 한다.

문제는, 그랬다가 또 이유 없이 죽는 사람이 나오면 의심을 사게 될 거란 점이었다.

그 사냥개 같은 기몽이 지금도 코를 킁킁거리면서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우 귀인까지 죽는다면 확률이 9할로 올라갈 텐데.”

비원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우 귀인까지 제대로 죽어서 천년비의 영혼이 천 귀인 안에 있단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반.

제발 천 귀인이 천년비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반. 혼란스러웠다.

* * *

염 귀인이 죽었을 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진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시간도 다시 원래대로 빠르게 흐르고, 날씨는 더욱 무더워졌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흘러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 요즘 후궁들은 낮에는 처소에 틀어박히고 밤에는 평상에 나와 더위를 식힌다.

하지만 때로는 원치 않아도 낮에 이동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어서,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꾸역꾸역 황제를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천 귀인. 폐하께서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실 앞으로 가서 오 공공을 찾아가니, 내가 ‘폐하 안에 계시는가?’ 하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나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오 공공은 멋쩍게 웃었다.

“천 귀인을 콕 집어서 말씀하진 않으셨사오나,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으니…… 오늘은 그냥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

“예. 이럴 땐 사람이 곁에 오는 걸 아주 싫어하셔서…….”

오 공공이 슬쩍 어실 밖 기둥 쪽을 눈짓했다.

“승언이도 내보내셨습니다. 이런 날엔 밖에 나오는 것조차 싫어하시지요.”

그렇구나. 그래서 황후가 나더러 떡돌이를 찾아가 보라 했구나.

직접 가면 될 텐데, 뜬금없이 나를 콕 집어서 보내기에 무슨 일인가 했지.

“송구합니다, 천 귀인.”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오 공공이 다시 내게 사과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황제가 사람을 만나기 싫어한다니 이대로 가야 하나. 아니면 그래도 황제를 만나겠다고 해야 하나.

보통 일이면 그냥 갈 텐데, 황후가 꼭 전하라 한 이야기가 있어서…….

“천 귀인?”

“황후 마마께서 급히 전하라 한 일이어서.”

“그렇군요.”

오 공공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단 태도여서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은 꾀를 내었다.

“그러면 오 공공. 폐하께서 직접 나오시게 할 수 있으니 나를 좀 도와주시겠소?”

“그런 거라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승언이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오 공공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승언이에게 이리 오란 눈짓을 하자.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승언이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영 미심쩍단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승언아, 저쪽 봐봐.”

하지만 내가 손가락으로 심궁 어딘가를 가리키며 부탁하자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압!”

나는 승언이의 목 뒤를 팍 내리쳐서 빠르게 기절시켰다.

승언이 털썩 쓰러지자, 가만히 서 있던 오 공공이 한 박자 늦게 “승언아!” 하고 기겁해서 외쳤다.

“아니, 천 귀인, 이게 대체…….”

그리고 오 공공이 날 보면서 무어라 하기도 전에, 내 예상대로 떡돌이가 문을 박차고 황급히 나왔다.

“무슨 일이냐?”

“승언이가 더워서 쓰러졌어.”

내가 승언이를 가리키며 말하자, 오 공공은 눈을 부릅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입만 뻐끔거릴 뿐 진실을 토해내진 못했지만.

나중에 내가 가면 제대로 말하겠지만…… 뭐, 그 정도는 상관없어. 사람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키는 건 무공을 몰라도 가능하잖아.

물론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일단 내 생각엔 그렇다. 그리고 내 생각이니 아마 맞을 거야.

“이런.”

황제는 혀를 차더니, 오 공공 옆에 있는 젊은 태감에게 지시했다.

“승언이를 근처 방에 옮기고 황보염을 데려와 치료하라 이르라.”

“예, 폐하.”

황보염이란 어의는 그림자들 얼굴을 아나 보다. 딱 집어서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는 걸 보니.

어쨌든 젊은 태감이 사라지자, 황제는 이번에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그래, 우리 계란이는 무슨 일로 왔느냐? 아니, 일단 안으로 들어와라. 너도 더위 먹겠다.”

나와 오 공공이 따라 들어가자, 황제는 책상에 앉았고 오 공공은 내가 앉을 여분의 의자를 가져다가 곁에 놓아 주었다.

나는 거기에 앉으면서 별일 아니라고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황후 마마가 전하라 한 일이 있어서. 근데 내 생각에는 급한 일은 아니야.”

그러자 황제는 정말로 지금은 누구를 만나기가 싫은지, 바로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펴면서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얘기하자, 계란아. 지금은 골치 아픈 일이 있으니.”

“많이 바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보니 여러모로 고민하고 싶다.”

“알았어.”

그럼 그러지 뭐. 괜찮다. 황후에게는 ‘폐하를 뵈었지만 폐하가 말하지 말라 했다’고 전하면 되지.

어쨌든 이 안까지 들어오긴 했으니, 황후도 내가 자기 심부름을 건성으로 처리했다고 여기진 못할 거야.

그런데 내가 막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잠시.”

황제가 뒤에서 다시 불렀다. 돌아보니, 그가 피로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그냥 온 김에 말하고 가거라.”

“그럴까?”

그러면 그러자 싶어서, 나는 황후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온 귀인이 회임한 것 같대.”

그리고 황제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커다래져서 손을 도로 내리고 벌떡 일어났다.

“뭐?”

오원요 역시 눈이 커다래져서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급한 일이잖느냐!”

“그래? 열 달이나 임신하니까 그 안에만 말하면 되지 않나? 급한가?”

오원요는 내 말에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시선을 보냈고,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니구나.

하지만 난 부모님 없이 혼자 자랐다고.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친구 중에도 임신한 사람이 없는걸. 이런 쪽으론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게냐?”

“몰라. 황후 마마께서 탕 궁의를 부르는 것까지 보고 왔으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갑자기 화가 치솟아서, 나는 황제를 째려보다가 확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 * *

천 귀인이 나가자 오원요가 초조하게 황제를 보았다.

“정말일까요, 폐하?”

월요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금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다.”

“하면 다른 사내의……?”

“만약 회임을 했다면 그렇겠지.”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는데, 황제는 더욱 골치가 아파졌다.

그가 직접 후궁들과 시침을 하지 않는단 건 극비 중의 극비로, 아는 이들 숫자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태후 역시 가짜 황제가 있단 건 알았으나, 가짜 황제가 시침을 대신 드는 건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온 귀인의 회임이 진짜라 한들, 월요 황제는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밝히기 어려웠다.

상대가 이런 상황을 알고서 계책을 세운 건 아니겠지만.

“입궁한 지 오래되지 않은 온 귀인이 직접 나서서 이런 일을 꾸미진 않았을 거다. 아마 온씨 가문에서 황후가 오랫동안 회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쪽으로 미리 대비를 해서 들여보낸 거겠지.”

“삼 주 전쯤에 새로 입궁한 후궁 중에서 온 귀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침을 들었었죠. 날짜까지 정확하게 맞추다니. 분명 누군가 옆에서 같이 계산을 해주었을 겁니다.”

회임 이야기에 더욱 골치가 아파진 황제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 앉으며 손짓했다.

“우선 회임이 진짜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네가 다녀와라, 오원요.”

“예, 폐하.”

* * *

황후와 손만 잡고 잔다더니, 이 거짓말쟁이.

아니…… 아니네. 황후랑은 손만 잡고 잔 게 맞네. 온 귀인과 손을 안 잡고 잤을 뿐이지.

황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러 갔을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전한 다음 돌아오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난다.

그놈은 하여튼 맨날 입만 동동 떴지. 꽃 건네면서 연모한다고 하더니, 나는 자기를 연모하지 말라 하고.

황후랑 자기는 손만 잡고 잔다면서 내게 관심을 집중하는 척하더니, 다른 후궁들이랑은 배도 맞대고 자고.

이쯤 되니 알 게 뭐야 싶다. 다른 후궁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구는지 내가 어찌 알아?

내가 씩씩거리면서 발치의 돌을 뻥 걷어차자, 원웅과 부성이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위로하는 말을 했다.

“절대로 회임이 아닐 테니 안심하세요, 소주.”

“소주께서도 곧 회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온 귀인이 회임해도 폐하는 소주를 가장 총애하시니 염려 마세요…….”

다들 속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나랑 황제는 손만 잡고, 아니, 이불을 사이에 두고 잔다고!

물론…… 황제는 언제든 ‘진짜’ 시침을 하고 싶다면 말하라 했지만.

또다시 홧김에 돌을 확 걷어찼는데, 돌이 너무 빠르게 멀리 날아가 버려서 나는 얼른 다른 쪽을 보며 괜히 머리를 단장하는 시늉을 했다.

염 귀인 죽고 나서 무공 수련에만 몰입했더니…….

‘어? 잠시만.’

그런데 멍하니 걷고 있자니,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떠올랐다.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단 사실에 놀라고, 이후엔 갑작스러운 염 귀인의 사망에 더 놀라서 잊어버렸는데…… 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잖아?

염 귀인, 우 귀인과 거래한 사람!

그 사람이 준 종이와 머리카락을 묻으니 내 영혼이 이 몸에서 나가려 했지.

한 번은 반쪽짜리 성공이긴 했지만, 어쨌든 둘 다 효과가 있었는데. 그게 다 우연일 리는 없다.

그 사람은 분명 내 영혼이 천소여 몸에 들어온 비밀을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젠장.”

“소주…… 마음껏 욕하세요.”

“이럴 땐 욕 하셔도 돼요. 폐하를 욕하셔도 저희가 모른 척할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우 귀인 말이야.”

염 귀인은 죽었으니, 그 수상한 사람을 찾으려면 우 귀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

염 귀인이 죽은 후로 나를 늘 먼발치서 무섭게 노려보는 우 귀인이…… 과연 물어본다고 대답을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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