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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80화 (80/283)

##  80화. 모든 걸 다 조사하라

황제는 옆자리에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천귀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기몽 장군과 어의들을 전부 다 부르라.”

오원요가 얼른 “네.” 하고 밖으로 나가자, 황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물러나란 손짓을 했다.

탕 궁의와 궁녀들, 태감들까지 다 물러나자, 홀로 남은 황제는 천 귀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손을 깍지껴 꽉 쥐었다.

“일어나라. 소여야.”

그러나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어나라. 일어나.”

손을 꼭 쥐고서 속삭이다가 그는 마주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너는 이리 가지 마라. 제발…….”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와 기몽 장군이 바로 천 귀인의 처소로 달려왔다.

다들 소식을 듣고 왔기에 참담한 얼굴이었다.

장군과 어의들이 황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으나, 황제는 여전히 천 귀인의 손을 꽉 쥔 채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지시했다.

“천 귀인이 갑자기 쓰러진 원인을 찾아라.”

“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몽 장군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어의들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가 일어서서 어의들이 천 귀인을 잘 볼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자, 어의들은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잔뜩 긴장해 차례로 천 귀인을 진맥하기 시작했다.

* * *

어의들이 황제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으면서 진맥하는 사이.

기몽 장군은 날카롭게 천 귀인의 처소 근처를 살폈다.

기몽 장군의 부하들 역시 굳은 얼굴로 샅샅이 처소 주위를 살폈고, 태감과 궁녀들에게 탐문을 했다.

그때. 기몽은 얼핏 본 천 귀인의 손에 흙이 묻어 있던 걸 떠올리고서, 울먹이고 있는 원웅을 불러다 물었다.

“소저. 천 귀인께서 혹시 화단을 가꾸십니까?”

“아니요. 그런 쪽엔 관심이 없으십니다.”

“손에 흙이 묻어 있던데.”

“저도 어쩐 일인지 잘……. 새벽에 홀로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어쩌면 그때 묻은 건지도 모릅니다. 씻고 처음 주무실 때는 분명 손이 깨끗했으니까요.”

“산책을 언제 했습니까?”

“축시에서 인시 사이……요.”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원웅은 긴장하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쩔쩔맸으나, 다행히 근처에서 다른 수사관에게 탐문을 받던 부성이 대신 대답했다.

“인시 초입니다.”

“인시 초.”

기몽은 그녀를 향해 고맙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원웅에게 물었다.

“산책을 어느 정도로 오래 했습니까?”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오셨어요.”

“어디를 산책했는지는 압니까?”

“멀리 가지 않으셨다 했습니다.”

천 귀인이 몸소 흙을 팠다면 처소 후원에서는 아닐 거다.

사람들이 계속 있으니. 하지만 멀리 가지 않았다면…….

기몽 장군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원웅이 탐문이 끝난 건가 싶어 눈치를 살폈다.

기몽 장군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황급히 처소 밖으로 나가 근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천 귀인이 후궁의 몸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흙을 팔 것 같진 않았기에, 그는 일부러 산책로 주위 후미진 곳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몽은 마침내 흙을 새로 덮은 흔적을 발견했다.

그건 평범한 사람의 걸음걸이로는 ‘잠깐 산책’ 할 거리가 아니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잠깐 산책’ 할 만한 거리였다.

천 귀인에게 내공이 없단 걸 확인했으나, 기몽 장군은 여전히 천 귀인이 마차 바퀴를 뚝 떼던 걸 아직 기억하기에 바로 그 자리를 파보았다.

흙을 헤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종이와 작고 검은 상자가 나왔다.

깊숙이 숨겨 묻어야겠단 생각이 없었던지 그냥 건성으로 묻은 덕에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기몽 장군은 종이와 상자를 들고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상자는 옆구리에 끼고서 종이를 펼쳐 보자, 일곱 개의 글자가 드러났다.

“천년비. 진쾌도래.”

또 그 글자였다. 염 귀인이 묻었다 파냈던 그 글자.

그러면 이번에는 천 귀인이 직접 이걸 파묻은 건가?

기몽 장군은 아까와 반대로, 이번에는 종이를 다시 접어 옆구리에 끼고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서 나온 것 역시 머리카락 한 뭉치. 전에 염 귀인 사건 때와 같은 물품이었다.

“전에는 염 귀인이. 이번에는 본인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기몽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상자 뚜껑을 덮었다.

그러고서 다시 처소 쪽으로 돌아서는데, 마침 그 방향에서 부하가 황급히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장군! 천 귀인께서 살아나셨다 합니다!”

“!”

부하는 기몽 장군이 따라오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초조하게 “장군.” 하고 다시 불렀다.

그래도 이동하는 대신, 기몽 장군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이 든 종이와 상자를 보았다.

“역시 관련 있는 것 같은데.”

“예?”

“아니다. 가자.”

* * *

누군가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뜨거울 정도였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엉엉 우는소리와 코훌쩍이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시끄러웠다.

그리고 “왜 일어나지 않는 게냐.” 하는 황제의 목소리…… 황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코앞에 황제가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아 손을 잡은 채로.

“……떡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름을 부르자 이번에는 원웅이 훌쩍이며 속삭였다.

“어떡해요. 우리 소주, 정신이 안 돌아오시나 봐요.”

황제에게 떡돌이라 부르니 내가 미쳤나 싶은 눈치였다.

그래. 사람들 앞에서는 떡돌이라 부르면서 반말 안 하기로 했지.

뒤늦게 아차 싶어서 가만히 있으려니, 황제가 “소여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소여라니, 내가 왜 소여……지.”

그 말을 듣자 나는 이제야 제정신이 다 돌아와서 얼른 황제를 “폐하.”하고 부르며 바라보았다.

황제는 내가 자기를 알아보자, 안심한 얼굴로 손을 꽉 잡고 한 손으로 머리 쓸어주며 타박했다.

“이 사고뭉치. 짐에게 화가 날 때마다 왜 자꾸 쓰러지는 게냐.”

“폐하에게서…… 냄새가 납니다.”

“냄새?”

“떡 냄새요.”

“널 주려고 떡을 챙겨왔는데, 네가 쓰러져 있더라. 짐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전 폐하가 아니니까 모르죠.”

“…….”

“그냥 푹 자고 일어난 기분입니다. 왜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프진 않으냐.”

“네.”

“그러면 되었다. 두 사람이 아픈 것보다 혼자 아픈 게 낫지.”

황제가 좋은 말을 해주는 건 알겠는데. 그보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대체 뭐가 문제였지? 왜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 종이를 묻으려니 꺼림칙하고 싫었지만, 그래도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묻은 건데. 이렇게 바로 깨어나니 허탈했다.

“혹시 제가 기절해 있던 동안에요 폐하. 제가 기억을 다 찾고서 깨어나진 않았나요?”

“기절? 숨이 멎었다. 기절이라니.”

진짜 천소여는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은 건가…….

생각하는 사이, 황제는 내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일단 쉬어라.”

그러고서 손을 놓고 일어서는 그를, 나도 모르게 빤히 보았나 보다.

황제는 기몽 장군과 어의들에게 따라 따라 나오라 눈짓하다가, 내 손과 눈짓을 발견하더니 다가와 손을 다시 잡아 주었다.

“급한 안건만 해결하고 오겠다. 온종일 옆에 있어 주마.”

그러고는 달래듯 약속하고서 등을 두어 번 두드린 다음에 나갔다.

“안 그래도 되는데요.”

뒤에서 작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는 이미 나간 후였다.

황제가 나가자 방 안을 꽉 채웠던 어의들과 기몽 장군도 우르르 따라 나갔고,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던 원웅과 부성은 엉엉 울면서 달려왔다.

* * *

황제는 심궁으로 걸어가면서 어의들에게 우선 천 귀인의 몸 상태에 대해 보고 받았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별 이상이 없단 소리에 그들은 일단 물리고, 이번에는 기몽 장군을 불러 물었다.

“처소 주위에 수상한 흔적은 없었느냐. 전에는 염 귀인이 천 귀인을 저주해서 벌어진 일이라던가, 그런 말이 있었지. 이번엔 그 비슷한 게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황제가 오원요에게 눈짓을 보내자, 오원요는 사람들이 더 물러나도록 손을 휘저었다.

주위가 텅 비자 황제가 기몽 장군에게 계속 말해보라 손짓을 했다.

“염 귀인은 전에 ‘천년비진쾌도래’라고 쓰인 종이와 머리카락을 파내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천 귀인의 처소 근처에서 그 종이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습니다.”

황제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우뚝 멈추어 서서 기몽을 보았다.

“이번에도 염 귀인이 한 짓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천 귀인의 손에 묻어 있던 흙을 보아서는……”

“직접 했다?”

“예.”

“그러면 천 귀인은 자기가 그 종이를 묻었을 때 죽을 거란 걸…….”

황제는 말을 하다가 잠시 목이 막혀서 입을 꽉 닫았다.

자결한 누이가 생각나서. 하지만 그는 곧 호흡을 가다듬고서 무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았단 뜻이냐.”

“송구하옵니다. 거기까진 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

“어쩌면 수사 내용을 알고서 단순히 시험해보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르지요.”

“목숨을 걸고서?”

“…….”

황제는 어젯밤 자신이 천 귀인을 모른 척하고 지나갔던 일이 떠올라 얼른 질문을 이어갔다.

“왜 그 종이를 묻었을 때 천 귀인이 쓰러지는 거지? 그건 알아냈느냐.”

“천 귀인께서는 부정하셨지만…….”

“만?”

“소신의 생각엔, ‘천년비’가 천 귀인께서 입궁 전에 사용하신 이름이 아닐까 사려되옵니다.”

“가명이라.”

“예.”

“천 귀인이 아니라면 아니겠지. 입궁 전에 잠시 사용한 이름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필요가 있느냐, 하고 말을 하려다가 황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 최근에 흑합에게서도 들었단 게 떠오른 것이다.

“‘천년비’란 인물들을 소신이 조사해보니,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행적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적이 불확실한 한 명이 그리 좋은 평판이 아니었더군요. 그래서 부정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림 사적.”

황제가 의외로 무림인에 대해 알자, 기몽 장군이 짧게 감탄했다.

“폐하게서도 아시는군요?”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년비란 자가 무림에서 가장 악한 넷 중 하나란 건 그렇다 쳐도, 흑합이 그 이름을 거론했던 건 현재 황제가 주시하는 ‘사하비단’이란 집단에 연루되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자 황당했다.

“저는 천 귀인께서 입궁 전에 이중생활을 하신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제들이 드물지만 있으니까요.”

“확실한 거냐.”

“확실하진 않습니다. 일단 천 귀인께서 강경하게 부정하시는 데다가, 잠시 행방이 묘연해졌던 천년비 그자가 지금은 공개적인 행보를 보여서요.”

“그럼 아니지 않을까.”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천 귀인께선 내공이 없으신데, 천년비란 자는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니까요. 하지만 그 이름을 묻을 때마다 천 귀인께서 쓰러지고 그 이름을 파낼 때마다 천 귀인께서 깨어나시니…… 자꾸 의심이 갑니다. 동일인은 아니라 해도 관련은 있는 것 같습니다.”

심궁에 다 도착했으나 황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기몽 장군은 할 말은 거의 다 했기에, 이젠 조용히 황제의 지시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서 명령했다.

“그 천년비란 무림인에 대해 모든 걸 다 조사해 보고하라. 좋아하는 것, 가족관계, 친구, 행적, 싫어하는 것…… 연인까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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