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두 번의 엇나감
계속 걷고는 있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쭉 걸어가다가, 나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폐하가 황후 마마한테 가서 베개 싸움만 하다 오시진 않겠지?”
원웅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애써 좋게 말해주었다.
“그러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황후 마마가 베개싸움을 좋아하실지도 모르니까요.”
“폐하는 황후 마마가 좋으신가봐.”
“국모시니까요……. 따뜻한 분은 아니시지만, 공정한 분이시고 나서서 다른 후궁들을 괴롭히지도 않으세요.”
그렇구나. 나도 다른 후궁들은 안 괴롭힐 수 있는데. 공정하진 않지만.
멍하니 걸어가고 있자니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내가 그 위에 앉자, 원웅은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연비가 그랬지. 황제는 먹이라고. 어쩌면 후궁들에겐 그 태도가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잖아. 황제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를 자주 시침에 부르고,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황후를 찾아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나랑 친해도, 황후이자 국모는 따로 있지.
연비 같은 마음가짐으로 있으면 다른 후궁들을 아군과 경쟁자로 구분해 내고 냉정하게 앞길을 도모할 수 있지만, 황제를 연모하면 모두가 연적이 되어 버리니 견디기 힘들어질 거야.
나는 걷다 말고서 아까 황제가 이동하던 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그의 금색 용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싼 등롱 불빛은 여전히 동동 떠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 사이에서 동동 떠가는 그 불빛은 환상적으로 보여서 꿈 같았다.
‘용포를 입은 떡돌이는…… 그저 빛으로만 보이는구나. 제대로 모습을 볼 수가 없어. 하지만 이게 진짜 떡돌이겠지. 황제.’
“소주?”
“난 신경 쓰지 않아.”
“네?”
“우리 처소로 돌아가자.”
내가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 앞서 걸어가자, 원웅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얼른 옆으로 붙어 등롱을 제대로 들었다.
“있지, 원웅. 지금 염 귀인을 찾아가면 이상할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데.”
“예? 어…… 너무 늦은 시간이니까요. 미리 말을 전하지 않았으니 실례일 거 같아요.”
“하긴. 요즘 염 귀인 안색이 많이 안 좋았어.”
“네. 그냥 내일 찾아가세요, 소주. 제가 내일 따뜻하게 호단탕을 끓여 드릴 테니, 그걸 가져가서 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 * *
황제는 찻잔을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면서도, 막상 차를 마시진 않았다.
손 외에 다른 부위는 미동도 없었다. 표정마저도.
황후는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며 그런 황제를 뚫어져라 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경 쓰시는 게 있나 봅니다.”
황제가 보자, 황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다시 태연히 물었다.
“사람 일입니까, 나랏일입니까.”
황제는 답해주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면서 찻잔에서 손을 뗐다.
“황후에게 약한 소리를 할 수야 없지. 내 혼자 앓겠소. 염려 마시오.”
다정한 목소리였고 배려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황후는 황제가 온화하게 선을 긋고 있단 걸 알아차리고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그러고 계시니 염려 안 할 수가 있나요.”
“억지로라도 웃고 있어야겠군. 황후가 신경 쓰게 할 수야 없지.”
그 말을 한 황제가 정말로 화사하게 웃자, 황후는 잠시 주춤하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꽃보다 고우십니다. 폐하께서 그 면사를 거두고 다니면, 보는 사람마다 마음이 혼란스럽겠지요.”
황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떠나, 월요 황제는 분명 그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다웠다. 아니, 어떤 그림보다도 더욱.
“그래서 배려를 위해 늘 면사를 쓰지 않소.”
황제가 농담조로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면사를 가리키자, 황후는 덤덤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면사 뒤에서, 꼭 저런 형태의 면사를 쓰고 다니는 또다른 남자를 떠올린 황후는 바로 그곳에서 시선을 떼고 중얼거렸다.
“오기 귀찮으시면 제게도 연금을 보내도 됩니다.”
“황후에겐 예의를 다해야지. 그러지 않을 거요.”
황후는 다시 웃고서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으나, 찻잔과 손에 얼굴이 가려질 때 습관적으로 지었던 미소는 흐려져 있었다.
황제는 그 변화를 알아차렸으나 모른 척 다른 곳을 보다가 일어서 침상으로 걸어갔다.
“피곤하니 먼저 자겠소. 황후도 얼른 주무시오.”
* * *
새벽 공기는 서늘하고 조금 축축했고, 여기저기서 새소리가 들려와 생명력을 한껏 느끼게 했다.
황제는 새벽의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가마와 태감들은 저만치 물려 놓고 오원요만 곁에 두고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어제 천 귀인이 서 있던 곳을 지나가게 되자, 갑자기 멈추어선 그는 천 귀인처럼 어제 자신이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행동은 조용히 이루어졌고 황제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오원요는 그런 황제의 내색을 눈치채고서 물었다.
“폐하. 어제 천 귀인을 보셨던 건지요?”
오원요는 어제 황제가 천 귀인을 못 보고 지나친 줄 알았다.
황제는 내내 가마에서 눈을 감고 있었고, 오원요 역시 사방을 살피며 걷다가 천 귀인을 먼발치에서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원요는 황제에게 천 귀인이 다녀갔단 이야기를 따로 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황제가 황후에게 가던 걸음을 천 귀인에게로 돌릴까 봐.
오원요는 천 귀인을 좋게 보았으나, 황제의 지나친 총애로 내명부의 질서가 깨어지길 바라진 않았다.
“보았다.”
“그렇군요. 폐하께서 귀인을 쳐다보지 않으시기에, 신은 폐하께서 귀인을 못 보신 줄 알았습니다.”
오원요는 황제가 ‘어제 천 귀인을 봤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혼을 낼까 봐 괜히 엉덩이를 뒤로 빼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황제는 천 귀인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만 볼 뿐 오원요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마치 천 귀인이 어젯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나 따라 해 보려는 것처럼.
면사 위로 드러난 눈이 깊게 생각에 잠겨 있어서, 오원요는 괜히 송구해졌다.
“짐이 천 귀인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가마를 돌리라 했겠지. 짐은 자제심이 부족하니.”
“폐하께서 자제심이 부족하시다니, 그럴 리가요.”
“우리 계란이한테 가봐야겠다. 그 늦은 밤에 찾아올 정도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생각을 끝낸 건지 황제가 방향을 바꾸어 후궁들이 모여 사는 구역으로 가려 하는데, 오원요가 급히 “폐하.”하고 불렀다.
황제가 돌아보자 오원요가 눈으로 그의 금빛 용포를 가리키며 물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시는 게 어떨지요? 어제 차림 그대로 가시면, 어제 일이 생각나 귀인께서 괜히 싱숭생숭하실지도 모릅니다.”
오원요의 제안에 황제는 감탄하며 칭찬했다.
“그렇군. 네가 현명하다.”
오원요가 뿌듯하게 웃자, 황제는 다시 방향을 가꾸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가자. 아. 그리고 오원요.”
“예, 폐하.”
“구름떡을 만들어 오너라. 따뜻하게 해서. 우리 계란이에게 주어야겠다.”
* * *
옷 색, 모양, 면사 무늬, 심지어 머리 형태까지 어제와 다르게 한 황제는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천 귀인이 자신을 보았을 때 밤의 일을 떠올리지 않도록 꾸몄다.
그러고서 천 귀인의 처소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자니, 불그스름하던 하늘이 파랗고 깨끗하게 변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밝게 알렸다.
우리 계란이를 어찌 달래야 하나. 황제는 속으로 기분 좋은 고민을 하며 동영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 근처로 가 보니 몹시 소란스러웠다.
늙은 탕 궁의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무거운 몸을 끌고 뛰고 있었고, 그 곁에서는 한 태감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고 있었다.
“빨리요, 제발 더 빨리요!”
“저건 귀자 아니냐.”
황제는 그 태감을 알아보고서 중얼거렸다.
귀자는 천 귀인이 수오부 군왕 사건의 목격자가 된 후 암습을 받자, 그가 특별히 붙여준 무공을 익힌 태감이었다.
그런데 천 귀인의 태감이 탕 궁의 앞에서 저러고 있자 불안한 마음이 든 그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황제가 조용히 찾아온 데다 워낙 경황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귀자와 어의는 이제야 황제를 발견하고서 황급히 무릎을 굽혔다.
황제는 일어나라 손짓하며 재차 무슨 일이냐 물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귀자가 울먹이며 외쳤다.
“폐하. 천 귀인께서, 저희 소주께서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그 말에 황제는 의아해 물으려다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황급히 천 귀인의 처소로 달려갔다.
오원요도 얼결에 같이 뛰었고, 귀자도 뛰었고, 탕 궁의도 황제가 앞서 뛰어가자 헉헉거리면서 더욱 열심히 달렸다.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천 귀인의 처소에 도착한 황제는 사립문 안쪽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놀라 주춤하다가, 황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가 처소 안으로 들어서자 궁녀들이 울면서도 무릎을 굽혔다.
“무슨 말이냐. 천 귀인이 숨을 쉬지 않는다니!”
내실까지 한걸음에 간 황제는 침상에 누운 천 귀인을 발견하고서 놀라 “소여야!” 하고 외쳤다.
천 귀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곁에서는 부성과 원웅이 목이 들끓는 소리를 내며 흐느끼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숨을 쉬지 않아?”
그가 천귀인의 곁으로 가며 원웅에게 묻자, 원웅은 끅끅거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폐하를 뵈러 갈 때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천 귀인이 밤에 자신을 보러 왔단 소리에 황제의 표정이 얼었으나, 원웅은 우느라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서 계속 말을 이었다.
“자다 일어나서 한 번 혼자 산책도 하셨고, 아침에 일어나셨을 때도 괜찮으셨습니다. 오늘도 염 귀인께 가서 수를 배우실 거라고…….”
“천 귀인. 계란아.”
황제는 침상 바로 옆으로 가서 천 귀인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다가,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목에 가만히 손을 짚었다.
정말로 맥이 느껴지지 않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탕 궁의는 이제야 도착해 헉헉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오다가, 황제가 “빨리 진맥하라! 빨리!”하고 외치자 황급히 침상 가까이로 왔다.
원웅은 천 귀인의 손을 조심히 들었고, 어의가 데려온 조수는 얇은 천을 꺼내서 손목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손은 왜 그런 거냐.”
그런데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갑자기 초조하게 끼어들었다.
“네?”
원웅이 고개를 돌리자, 황제는 천 귀인의 손을 낚아채며 으르렁거렸다.
“왜 손이 흙투성이냐 묻고 있다.”
“저희도 잘 모르…….”
황제가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보자, 원웅과 부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무릎을 꿇었다.
천 귀인이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던 걸 떠올린 황제는 더욱 화가 났지만, 상태를 보는 게 우선이라 손을 놓아주고서 궁의에게 다시 지시했다.
“진맥하라.”
궁의는 분위기에 짓눌려 손을 덜덜 떨면서, 조수가 천 귀인의 손목에 천을 깔자 그 위에 손가락을 대었다.
황제는 용포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젯밤,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지나간 그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아팠다.
아침에 깨어났다고 하니, 옷을 갈아입겠다며 바로 오지 않은 것까지 떠올라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꽉 쥔 주먹 안쪽에서, 구름떡이 뭉개지며 홀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