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돌아갈 수 있다고?
“죽은 내관이 발견된 우물가?”
“응.”
부성의 말처럼, 나는 시침에 불려가자마자 떡돌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부성이 본 것까지 전해주었다.
“그걸 적었다고 범인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떡돌이는 그리 촉비를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물 이름이야 적을 수도 있지, 하는 태도로.
“꺼림칙하니 거기를 피해 가기 위해 적어둔 걸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부성이 말로는, 거기 말고도 몇 군데 다른 이름이 있었대. 다 내관이나 궁녀 사망사고 위치였고.”
“…….”
“부성이가 혹시 모르니 너한테 말해두라 해서 전하는 거야. 네가 볼 때 별거 아니면 그냥 넘어가고.”
떡돌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내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하자 갑자기 날 향해 돌아누우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뭐가?”
“넌 촉비가 거기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
“솔직하게 말하면 좋지.”
“난 잘 거니까 말 좀 그만 걸었으면 좋겠어.”
“……범인이 아닌 것 같단 뜻인가?”
“아니, 정말로 잘 모르겠어. 난 머리 쓰고 그런 거에 약해.”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 딱 맞아떨어지는 게 좋지.
촉비가 사람을 죽이고서 그 위치를 적어둔 건지, 사람이 죽은 곳을 적어두고 피해 다니는 건지, 아니면 혼자 수사를 하기 위해 이름을 적은 건지, 솔직히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걸.
다행히 떡돌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난 네 머리가 맑아서 좋다, 계란아.”
“칭찬이야?”
“거봐.”
“욕이구나.”
내가 머리를 들어 올리며 항의하자, 떡돌이는 자기 턱으로 내 정수리를 한 번 약하게 누르고는 두 팔을 들더니 나를 이불째 꽉 끌어안으면서 웃었다.
“거봐라.”
* * *
천 귀인과 황제와 아옹다옹하는 그 시각.
염 귀인은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상에 앉아만 있었다.
차만 연달아 석 잔을 마셔대자, 측근 궁녀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다른 궁녀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소주, 천 귀인에게 비원과 혜비에 대해 말한 다음 만나보라 하실 생각이셨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신 거예요? 말씀드렸으면 지금쯤 편히 주무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말하려다 보니 천 귀인에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그 애는 맹하잖니.”
“그래도요…….”
“게다가 비원 그자가 정말 천 귀인에게 원한이 있는 거라면, 천 귀인 본인이 그를 만나려 하자마자 바로 죽일지도 몰라.”
염 귀인의 궁녀는 ‘무슨 상관이에요’ 하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주인인 염 귀인이지, 천 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소주 혼자 이렇게 끙끙 앓으실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실 거면 그냥 다 잊어버리시든가, 잊지 않으실 거면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세요, 소주. 불안해서 그래요.”
“뭘 그렇게 불안해해?”
“수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얼굴이 수척해지시고…… 요 이틀간 잠을 전혀 안 주무시니 이젠 입술까지 창백해지셨어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요.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잖아요.”
“입맛이 없어서 그래.”
염 귀인의 궁녀는 계속 걱정을 거듭했지만, 염 귀인은 결국 그날 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하다가 날이 밝자마자 우 귀인을 찾아갔다.
“염 귀인, 왜 이렇게 혈색이 나빠요?”
우 귀인 역시 염 귀인을 보자마자 놀라서 손을 잡고 물었다.
염 귀인은 괜찮다고 중얼거리고서, 우 귀인을 데리고 방 안에 들어가 혜비와 그녀가 소개해 준 비원이란 자에 대해 말한 다음 부탁했다.
“내가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우 귀인. 그대가 혜비에게 가서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해볼 수 있어요?”
“내가요?”
“우 귀인도 그자를 만나고 싶다 말하면, 혜비께서 그자의 이름과 위치, 만날 시간을 알려줄 거예요. 그자를 만난 다음, 그자가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뭘 요구하는지 듣고 와서 내게 알려줘요.”
염 귀인은 일부러 천 귀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건 천 귀인을 위한 조사는 아니었으나, 천 귀인에게도 득이 될 조사였기 때문이다.
우 귀인은 천 귀인을 싫어하니, 이 일이 천 귀인에게 도움이 된단 걸 알면 도와주기 싫어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우리는 친구니까요.”
우 귀인이 흔쾌히 대답하자, 염 귀인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 사이에 뭘요.”
“하지만 염 귀인, 이걸 명심해요. 비원이란 자를 만나도 절대로 거래는 하지 말아요. 그냥 뭘 요구하는지만 듣고 와야 돼요.”
* * *
‘아. 떡돌이한테 촉비 물건을 훔쳐 간 내관 발에 상처가 있단 얘기 안 했다.’
흑합 장군에게 답서를 보내기 위해서 먹을 갈고 있자니, 문득 어젯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게 다 떡돌이 때문이다. 떡돌이가 나더러 욕과 칭찬 사이의 애매한 말을 던지고서 놀려대서 그래.
‘어쩌지? 말을 해줘야 하나?’
“소주? 팔 아프세요?”
내가 먹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있자, 옆에서 물을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던 원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다시 먹 가는 걸 시작했다. 뭐. 말 안 해도 되겠지.
어제 도둑을 봤을 땐 일단 흔적을 남겨야 한단 생각에 돌을 차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말해주기도 참 애매하지 않은가.
뭐라고 말해. 도둑이 경공을 펼치면서 달려가기에 나도 내공을 담아 돌을 던져 발에 상처를 입혔다고?
발에 상처가 난 내관을 살피면 도둑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절대 안 되지. 고의로 돌을 찬 게 아니라 실수로 찼다고 해도 역시 이상해.
실수로 돌을 찼는데, 상대 발에 상처가 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
“소주?”
“아냐. 계속 먹 갈자. 물 더 부어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편지를 길게 쓰시려구요…….”
“흑합 장군이 멋들어지게 서신을 보냈으니 나도 그에 맞게 보내야지.”
“질보다 양을 택하는 거예요?”
“멋진 시 같은 거 뭐 적어넣을 거 없을까? 의미는 몰라도 돼. 멋져 보이면 돼.”
그렇게 한 시진에 걸쳐 온 공을 들인 서신을 쓴 다음, 서신은 원웅을 통해 흑합 장군에게 보내고서 나는 무공 수련을 하기 위해 비밀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어젯밤, 떡돌이가 ‘오늘은 시침에 널 부르지 않을 테니 기다리지 마라’고 했기에 좀 늦은 시간까지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이제 기초 체력과 근력도 좀 다졌으니 보법 위주로 몸을 익혀야지.
물론 보법이야 눈 감고도 쓸 정도로 내게 익숙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 몸 역시 내가 사용하는 보법에 익숙하게 만들고 싶어.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수련을 했을까. 주위가 깜깜해져서 움직임을 멈추고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안 그래도 서서히 날이 더워지고 있는데, 내공을 사용하지도 않고 몇 시간을 내내 움직여 댔으니.
가져온 손수건으로 이마며 목덜미를 닦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온몸이 축축해서, 나는 서둘러 연무장을 떠났다.
‘얼른 처소로 가서 통에 물 받아놓고 씻어야지.’
그런데 처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다 보니, 희원궁 쪽에서 우 귀인이 슬며시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뒤에 궁녀 한 명 데리고 있지 않은 채로.
‘무슨 일이지?’
나는 청적에 몰래 떡돌이를 만나러 다닐 때도 있었고, 혼자 수련을 할 때도 많다 보니 일부러 궁녀들을 떼어 놓고 다닐 때가 많다.
하지만 다른 후궁들은 귀하게 자라서 손가락 끝으로 궁녀와 태감들을 부리는 게 익숙해서인가, 대부분 아랫사람을 꼭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지금 우 귀인은 완전히 혼자였다. 게다가 걸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재밌겠다.’
딱 보아도 수상한 티가 나서, 나는 얼른 기척을 죽이고 은신술을 펼쳐 그 뒤를 쫓았다.
우 귀인은 희원궁 근처에 있는 화화정에 도착해서야 멈추어 서더니, 다시 한번 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곳 정자 위로 올라간 다음 기둥 사이에 몸을 숨기고서 팔을 괸 채 우 귀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하지만 우 귀인이 혼자 두리번거리는 걸 제외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우 귀인이 누구를 만나러 가지도 않고.
재미없어져서 그냥 이 자리를 떠날까, 싶을 즈음. 그때서야 다른 누군가가 우 귀인에게로 다가갔다.
모자 달린 검은 피풍의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사람이었는데, 딱 보기에도 엄청나게 수상해 보였다.
더욱 호기심이 느껴져서 기둥에 딱 달라붙자,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싶어. 가장. 이게 내 소원이다.”
이게 우 귀인의 목소리이고…….
“이런. 아무리 저라고 해도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방금 나타난 저 얼굴 가린 자 목소리인가? 목소리가 엄청나게 특이한데?
변조한 거 같은데. 보통 사람이 아무리 목소리가 낮아도 이 정도로까지 낮아지진 않지.
그보다 우 귀인. 뭘 하려나 했더니 웬 이상한 작자한테 소원을 비는 거야? 저게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러면…… 촉비와 천 귀인을 무너뜨려 줘.”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그다음으로 우 귀인이 빈 소원은 웃어넘기기 좀 그랬다. 날 무너뜨려 달란 소원이었으니까.
“그러지요. 그건 쉽습니다.”
게다가 정체 모를 녀석은 그 의뢰를 또 받아들이고?
참 재밌게 노는구나 싶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목소리 변조한 자는 우 귀인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과 이 종이를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 묻고 절을 세 번 하십시오. 내가 그쪽 의뢰를 들어주는 조건입니다.”
목소리 변조한 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바로 자리를 비켰다.
나는 잠시 그자를 따라갈지 여기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볼지 생각하다가, 우 귀인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기에 그녀를 쫓아갔다.
뭘 묻으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우 귀인은 한 번에 일을 해치울 셈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정자 아래로 와 그늘 부분을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방금 전 그자에게 받은 걸 후다닥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건성건성 절을 세 번 하고 달아났다.
“…….”
나는 이번에는 우 귀인도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우 귀인이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로 가서 흙을 파고 그녀가 묻은 종이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뭐야. 뭐길래 이 오밤중에 만나서 묻어라 소원을 들어달라 절을 해라 그래?
‘천년비진쾌도래……. 천년비? 나?’
그런데 종이를 펼쳐 보니 뜬금없이 거기서 내 이름이 나왔다.
나는 황급히 종이를 옆구리에 끼고서, 그녀가 함께 묻은 물건, 천으로 돌돌 만 것을 펼쳐 내용물을 확인했다.
잘라낸 머리카락이었다.
‘전에 염 귀인이 이런 걸 묻었다 파내다 기몽 장군에게 걸리지 않았던가?’
기몽 장군이 ‘염 귀인이 천년비란 사람을 저주했다’는 걸 전제로 조사하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이것 때문에 그런 거구나.
염 귀인도 아까 그 목소리 변조한 자에게서 이 물건과 머리카락을 받았나?
‘의심스러운데.’
게다가 더 신경 쓰이는 건, 염 귀인이 이런 걸 묻었을 때 내가 실제로 쓰러졌더란 것이다. 내 진짜 몸에서.
기몽에게 그 부분을 전해 들었을 때는 그냥 우연의 일치 정도로 여겼는데.
실제로 이걸 보고 나니 좀 수상쩍다. 이것도 아까 그자도 나도.
‘이걸 어떻게 하지? 아니, 이걸 묻으면…… 내가 다시 내 몸으로 깨어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