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76화 (76/283)

##  76화. 염 귀인의 고민

수사를 마치고 돌아온 염 귀인이 밤늦도록 생각에 잠겨 있자, 측근 궁녀가 따뜻한 차를 우려 가져오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주, 왜 기몽 장군께 소주가 추측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 거예요?”

염 귀인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의식중에 찻주전자를 받았다.

하지만 한 손에 뚜껑을 쥔 채 가만히 있기만 하자 측근궁녀는 초조하게 “소주?” 하고 다시 불렀다.

“기몽 장군께 비원이란 자에 대해 다 말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자가 천 귀인을 노리고 있단 걸 알려야 소주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잖아요. 계속 수사청에 불려가시는 것도 좋지 않을 텐데…….”

염 귀인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기몽 그자가 예뻐서 계속 가고 싶겠니?”

“물론 그렇지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경위야 어쨌든 내가 흑합 장군과 천 귀인을 해칠 의뢰를 했단 걸 말해야 되잖아.”

“아.”

“저주를 이용한 복수를 원한 게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복수를 원했다고 말하면 기몽 장군이 뭐라 하겠어.”

“음…… 그러네요.”

염 귀인은 결국 밤새도록 잠을 거의 자지 못했으나, 다행히 잠시 깜빡 졸다가 깨어났을 때쯤 자신이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떠올렸다.

염 귀인은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궁녀에게 명령했다.

“옷을 가져오너라. 혜비 마마께 가야겠다.”

“소주, 우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고…….”

“아니. 당장 가야겠어. 비원을 소개해 주신 분이 혜비이니, 어떤 경위로 그자를 알게 되신 건지 물어봐야겠다.”

궁녀는 염 귀인의 재촉에 옷을 꺼내 입는 걸 도와주었지만, 그러면서도 연신 불안해했다.

“혜비께서는 소주와 사이가 좋으신데, 그런 걸 물었다가 괜히 화를 입으면 어쩌지요?”

하지만 염 귀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원이 위험한 자란 걸 알면서도 내게 소개해 주신 거라면, 그분은 어차피 날 진정으로 대하지 않으시는 거지. 이렇게 될 걸 모르고 소개해 주신 거라면, 그분께서도 내게 할 말이 있을 거다.”

* * *

염 귀인은 혜비가 관리하는 희원궁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염 귀인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해 상한 안색을 가리는 대신, 옷과 머리만 단정하게 하고서 혜비를 찾아갔다.

“세상에, 염 귀인. 왜 이렇게 초췌해진 건가.”

혜비는 얼음을 띄워 시원한 음식을 먹고 있다가 염 귀인이 찾아오자 얼른 다가와 두 손까지 꼭 잡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온 김에 같이 식사나 하고 가지. 안 그래도 혼자 먹기 적적했다네.”

하지만 그 다정한 태도는 염 귀인이 비원에 대해 넌지시 꺼내자 바로 끝나 버렸다.

“혜비 마마께 비원에 대해 여쭈고 싶은 게 있어 왔습니다.”

혜비는 비원이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표정이 굳더니, 자신의 궁녀에게 찻잔을 데워오라며 밖으로 내보냈다.

혜비의 궁녀가 나가자, 염 귀인의 궁녀도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둘만 남게 되자 혜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선을 그었다.

“비원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전에 마마께서 제게 소개해 주신 그 자 말입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내가?”

혜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그런 사람을 어찌 알겠어.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꿈이라도 꾼 건가?”

염 귀인의 측근 궁녀가 염려한 것처럼 화를 내진 않았으나, 아예 그런 일은 있지도 않단 것처럼 선을 긋는 태도였다.

혜비가 연달아 그렇게 나오자 눈치 좋은 염 귀인은 바로 알아차렸다.

혜비가 이 일에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본인이 저렇게 나오는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같이 언성을 높일 수도 없는지라, 염 귀인은 속으로는 기가 막혀 하면서도 겉으로는 마지못해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다른 마마와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럴 수도 있지. 궁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비슷비슷해서 가끔 구분이 안 가기도 하니.”

“…….”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군, 염 귀인. 자칫 서투른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똥이 튄다면 괜한 적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 * *

“소주가 수사청에 왔다 갔다 하니까 아예 얽히고 싶지 않다 이거겠죠.”

염 귀인이 별 소득 없이 혜비의 처소에서 나오자, 측근 궁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씩씩거렸다.

혜비가 ‘그 일은 꺼내지 말라’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다며 염 귀인을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자 더욱 화가 난 탓이다.

“되었다. 천 귀인은 폐하께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니, 거기에 안 얽히고 싶단 거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야.”

“그래도요! 애초에 그분이 비원이란 자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더라면 소주가 그자와 얽힐 일도 없었는데!”

“소개를 해준 건 혜비 마마지만 찾아간 건 나야. 됐어.”

“…….”

염 귀인이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자 궁녀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긴 했으나, 여전히 속상한 눈치였다.

처소로 돌아온 염 귀인이 침상에 편하게 걸터앉아 눈을 반쯤 감자, 궁녀는 더욱 속이 상해서 물었다.

“오늘도 천 귀인께서 수 놓는 걸 배우러 오실 텐데. 잠을 못 주무셨으니 내일이나 모레 오시라 전할까요?”

“아니. 나중에 천 귀인이 오면 천 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어.”

“예?”

* * *

“……래서 폐하한테 보여줬더니, 폐하가 거북이 머리를 토끼 똥이라고 하잖아요. 폐하는 안목이 진짜로 이상해. 안 그래요?”

한참 염 귀인에게 황제의 짓궂은 안목에 대해 하소연하는 와중이었다.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이다가 옆을 보니 염 귀인의 눈 밑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염 귀인, 왜 갑자기 동태가 됐어요?”

당황해서 묻자 염 귀인은 실뭉치로 나를 툭 치고는 바락바락하며 항의했다.

“누구더러 동태란 거예요? 그러니까 폐하가 토끼 똥이라고 부르지!”

“나한테 부른 거 아닌데요?”

“속으론 천 귀인한테 한 말일 거예요.”

“아닌데…….”

그런데 뭐지? 구시렁거리면서 바늘에 실을 꿰려 애쓰고 있자니, 날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자 염 귀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애틋해 보여서 “염 귀인도 원하면 토끼 똥이라 불러요.”라고 아량을 베풀어주자, 염 귀인은 아예 실뭉치를 내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저런 걸 데리고 내가 뭘 어쩌겠어. 내가 알아서 해봐야지.”

* * *

“염 귀인께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걸까요?”

염 귀인 상태가 좀 이상하던데, 생각하면서 돌아가고 있자니 옆에서 부성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성이 보기에도 오늘 염 귀인이 좀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렇지? 동태 같았지?”

“네. 잠을 못 주무신 거 같았어요. 어디 아프신가…….”

“모르겠어.”

그런데 부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희원궁을 나와 동영궁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우르르 나면서 누군가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도둑 좀 잡아줘요!”

도둑? 이 한낮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얼굴을 가린 내관 하나가 검은 보따리를 안은 채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고 있고, 그 뒤로는 가마와 내관들이 모조리 엎어져 있었다.

가마 부근에는 연한 하늘색 옷을 입은 후궁이 쓰러져 있었는데, 고함을 질러대는 건 그 옆에 선 궁녀였다.

“까악!”

얼굴 가린 내관이 이쪽으로 달려오자 부성도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감싸 옆으로 밀었다.

‘경공?’

하지만 내가 발에 힘을 주고 버티자, 부성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경공을 사용하는 내관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발에 힘을 풀었다.

부성은 그제야 나를 데리고 벽 옆으로 붙었고, 나는 그 틈을 타 바닥의 돌멩이에 미약하게 내공을 실어 그자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을 노려 그쪽으로 걷어찼다.

“!”

얼굴 가린 내관은 발목을 가격당해 잠시 주춤했지만, 바로 균형을 잡고는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속도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꽤 빠른 속도로.

하지만 발목 부근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 놨으니, 저자가 ‘진짜 내관’이라면 찾아내기 쉽겠지.

내관이 아닌데 내관으로 흉내 낸 거라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다 했겠지 싶어서, 나는 부성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아까 그자가 뭘 떨어트리고 갔어요, 소주.”

그런데 돌아가려고 보니 그 내관이 비틀거리다가 품에 든 것의 일부를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포장이 잘 안 되었던 모양이지?

어쨌든 떨어진 걸 발견했는데 그냥 가버리긴 좀 뭐해서, 나는 부성에게 그것을 챙기라 한 다음 가마 부근에 선 후궁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궁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서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는 촉비였다.

“촉비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얼른 인사를 한 다음 부성에게 가지고 온 것을 건네주라 눈짓했다.

“네.”

부성은 얼른 땅에 떨어졌던 것을 촉비에게 내밀었다.

“아까 도둑이 떨어뜨리고 간 물건입니다, 촉비 마마. 이것밖에 줍지 못하였어요.”

뭐에 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건 손바닥만 한 필첩이었다.

촉비의 궁녀는 부성이 내민 필첩을 낚아채듯 가져가 품에 넣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촉비가 무서운 눈으로 부성과 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 표정은 거의 정파인들이 나를 볼 때와 맞먹어서, 딱 보기에도 불안해 보였다.

왜 저러나 싶어 덩달아 보고 있자니 촉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았느냐?”

“그 내관이요?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못 보았습니다.”

그 질문에 내가 똘똘하게 대답하자, 촉비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나를 시험하듯 계속 쳐다보았다.

‘도둑 잡으러 사람을 안 보내고 여기서 저러고 있다니, 이상한데. 별로 안 중요한 물건인가?’

어쨌든 그 눈빛을 받으면서 같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니, 촉비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가마를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촉비가 탄 가마가 사라지자, 나는 부성에게 다시 우리 처소로 돌아가자고 팔을 잡아당겼다.

“얼른 가자. 폐하께 오늘은 내가 만든 게 거북이 똥이 아니란 걸 보여드려야겠다. 이번에 수놓은 건 호랑이니까.”

부성은 “네, 네.” 하고 황급히 중얼거리고서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아까의 그 자리에서 조금 거리가 벌어지자, 부성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소주, 혹시 모르니까 오늘 시침에 가거든 폐하께 방금 있던 일을 꼭 말씀드리는 게 낫겠어요.”

“왜?”

난 남 일엔 관심 없는데.

이해가 가지 않아 묻자, 부성은 연신 뒤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저, 그 필첩에 뭐가 적혀 있는지 얼핏 보았어요. 지금은 소주께서 내관 이야기를 하셔서 촉비 마마가 그냥 지나가셨지만, 나중에 불안해서라도 소주께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요.”

그 말을 하는 부성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눈 내리는 날 밖에서 밤을 지새우고 들어온 사람처럼.

“왜? 뭐가 적혀 있었는데 그래?”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