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너의 안목을 존중한다
황제와 싸우는 바람에 결국 그에게도 자수를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하긴. 어차피 떡돌이도 자수 놓는 방법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보다 어쩐다…… 안비에게 자수를 놓아주기로 약속하긴 했으니,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 할 텐데.
아침으로 물만두를 먹으면서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적당히 이 일을 해치워버리기로 결심하고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염 귀인한테 배울래. 자수.”
원웅은 멀리 있는 음식을 내 앞에 놓인 접시에 조금씩 덜어 주다가 깜짝 놀라서 “예?” 하고 되물었다.
부성도 새로 끓인 차를 가지고 들어오다 말고서 황급히 나를 말렸다.
“염 귀인은 진짜, 진짜로 수 놓는 실력이 엉망이에요, 소주!”
“알아. 어제 얘기 들었잖아.”
“그런데도 염 귀인께 배운다고요?”
“어. 이미 마음을 굳혔어.”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꼭 자수를 멋들어지게 놓아야 할 필요가 없잖아?”
부성은 내게 찻잔을 건네주다 말고서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웅은 당황해서 아직도 빈 접시를 든 채 입만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그러면 해주고도 욕먹지 않을까요, 소주? 안비마마께서 소주의 의도를 오해하실지도 몰라요.”
“맞아요. 옷감이 굉장히 값비싸 보이던데 그걸 망쳤다가는…….”
“뭐, 보고서 화는 나겠지만 다들 알게 되겠지. 나도 염 귀인만큼 자수를 못 놓는다는 걸. 기억을 잃어서 못 하게 되었다는데 어쩌겠어?”
부성과 원웅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기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를 닦고 얼른 희원궁에 있는 염 귀인의 처소로 찾아갔다.
마침 염 귀인은 상에 앉아 오만상을 한 채 실과 바늘을 잡고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잘됐단 얼굴로 던지듯 수틀을 옆에 내려놓았다.
“잘 왔어요.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어.”
“수 놓는 법 좀 가르쳐줘요, 염 귀인.”
내 말을 듣자마자 오만상을 도로 지었지만.
염 귀인은 ‘진심이야?’ 묻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방금 전 자기가 옆으로 집어 던졌던 수틀을 도로 들어 내게 내밀었다.
“이 꼴을 보고도 배우고 싶다면요.”
“개성적이네요.”
“개성적인 수준이 아니죠.”
“뭐 어때요. 하는 방법만 알면 되죠.”
내가 수틀을 도로 건네자, 염 귀인은 물론 염 귀인의 궁녀까지도 내 진심을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난 평수나 조금 흉내 낼 수준이에요, 천 귀인.”
“난 아예 못 놔요. 다 까먹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전혀 방법을 모른다는 데도 염 귀인은 도통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지, 연신 수틀을 만지작거리면서 또다시 약한 소리를 했다.
“그래도 이왕 배우려면 잘하는 사람한테 배우는 게 나을 텐데.”
몇 번이나 거듭해서 괜찮다고 하자, 염 귀인은 그제야 마지못해 알겠다면서 자신의 궁녀에게 싸구려 천을 끼운 새 수틀을 두 개 가져오라 지시했다.
잠시 뒤 염 귀인의 궁녀가 하얀 천을 끼운 수틀 두 개를 가져오자, 염 귀인은 하나는 내게 건네고 하나는 자신이 들고서 차근차근 수 놓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참 수 놓는 법을 배우는 도중이었다.
“소주, 수사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바깥에서 일하던 염 귀인의 궁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알렸다.
그 말에 염 귀인은 수틀을 탁자에 내려놓고서는 힘없이 말했다.
“곧 나간다고 해라.”
“네, 소주.”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보고 있자니, 염 귀인은 실과 바늘을 건성으로 퍽퍽 정리하면서 내게 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난 수사청에 가봐야 해서.”
언짢은 내색인데…….
“또 뭔 사고를 쳤기에 수사청에 가는 거예요? 염 귀인도 의외로 사고를 많이 치네요.”
그걸 보고 내가 혀를 차자, 염 귀인은 이를 꽉 악물더니 억지 미소를 지었다.
“천 귀인이 쓰러졌던 사건을 계속 수사하고 있는 거거든요?”
화는 나는데 자기가 잘못했던 일이라 애써 참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사고를 또 친 건 아니구나.
아니, 그런데 세상에.
“아직까지도 수사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받는대요?”
“기몽 장군이 만족할 때까지 받겠죠. 아니면 아예 포기할 때까지나.”
기몽 장군…… 그 사냥개 같은 남자 성격에 포기가 있긴 할까.
‘천년비진쾌도래’ 그거 하나 보고서 이 나라에 천년비가 총 몇 명인지까지 다 확인한 인간인데.
어쨌든 스승이 수사받으러 간다니 나도 이 마무리는 내 처소에 돌아가서 하지 뭐. 이 조그만 도안은 다 끝내 가기도 하고.
그런데 왜 저러지? 염 귀인이 힘없이 수 용구를 정리하다 말고서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마치 방금 엄청난 생각이 난 것처럼.
“왜 그래요?”
그 모습이 이상해서 묻자, 염 귀인이 입을 벌리고 내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말하기 싫은 눈치인데 물어봤자 소용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내일 또 올게요, 염 귀인. 수사 잘 받고 와요.”
* * *
“소주? 왜 그러세요?”
천 귀인이 떠난 후, 수사청으로 가는 길에도 염 귀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염 귀인의 궁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시면 오늘은 수사청에 가기 힘들겠다고 전할까요?”
염 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다.”
“그럼요?”
염 귀인이 앞서가는 수사청 심부름꾼을 힐긋 보자, 궁녀가 얼른 그에게 다가가 거리를 두고 가 달라 부탁했다.
심부름꾼이 좀 떨어져서 걸어간 후에도, 염 귀인은 목소리를 거의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낮추어 말을 꺼냈다.
“전에 혜비께서 내게 비원이란 자를 소개해 주었지.”
“네.”
“그자와 틀어졌지만, 그래도 혜비 마마를 보아서 난 수사청에선 그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어.”
“그렇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한 게 있다.”
“이상한 거라니요?”
“난 지금까지 내가 천 귀인과 흑합 장군에게 복수하고 싶다 청해서 천 귀인이 쓰러진 거라 생각했거든?”
“네에.”
궁녀가 불안한지 연신 수사청의 심부름꾼을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염 귀인도 슬쩍 뒤로 가 심부름꾼과 조금 더 거리를 벌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가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비원 그자는 이미 그 저주문과 머리카락을 챙겨왔어.”
궁녀는 염 귀인이 비원을 만날 때는 곁에 없었지만, 땅을 파고 저주문과 머리카락을 묻을 때는 곁에 있었기에 그 일에 관해서 잘 알았다.
궁녀는 겁먹은 얼굴로 속삭였다.
“그러면 소주께서 소원을 빌어서 천 귀인이 쓰러진 게 아니라…….”
“그래. 내가 순서를 바꿔 생각했어.”
“하지만 소주께서 그 종이를 묻었을 때 천 귀인이 쓰러졌고, 파냈을 땐 깨어났잖아요?”
“그러니까. 흑합 장군에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천 귀인만 그랬어.”
염 귀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기몽 장군은 비원의 존재를 몰랐기에 ‘천년비’란 이름에 주목했으나, 그녀는 중간에 낀 비원의 존재를 알기에, 그가 그런 종이를 묻어달라 한 이유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내 소원과 별개로, 비원 그자가 천 귀인에게 저주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궁녀는 걱정스럽게 염 귀인을 쳐다보았다.
“이 이야기를 기몽 장군에게 해야 할까요?”
* * *
염 귀인이 연습용으로 사용하던 수틀과 도안을 계속 가져가서 쓸 수 있게 해주어서, 나는 그걸 그대로 내 처소로 가져와 만들던 무늬를 마저 완성했다.
“짠.”
그런데 웬걸? 의외로 내가 손이 야무진 건가. 만들고 나서 보니 예상보다 제법 그럴듯한 거북이가 나타났다.
“이거 좀 봐라 부성아. 내가 만든 거 좀 봐.”
그게 신기해서 부성에게 내가 수 놓은 걸 보여주자, 부성은 입을 쩍 벌리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해요, 소주! 이거 그거…… 그거잖아요!”
“잘 만들었지?”
“네!”
원웅이와 귀자에게 차례로 보여주자, 두 사람에게서도 같은 반응이 나왔다. 원웅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거봐요, 소주. 소주는 원래 수를 잘하셨으니까 빨리 배울 수 있다니까요?”
세 사람의 칭찬을 듣자 흐뭇해져서 나는 떡돌이가 시침에 부르면 가져갈 생각을 하고 수틀에서 천을 빼내어 손수건처럼 만들었다.
그러고서 손수건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밤이 되어 찾아온 경사방 태감에게 이 손수건을 꼭 가지고 가고 싶다 말했다.
“아…… 이걸요?”
하지만 황제에게 갈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기 때문인지, 태감은 내 부탁에 쩔쩔매면서 연신 손가락을 꼬무락거렸다.
“그래. 폐하게 보여드리면 좋아하실 거 같네.”
“폐하께서 이걸…… 좋아하실까요?”
게다가 그는 섬세한 면이 없는지, 황제는 고작 연습용 수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단 투로 내 작품을 까 내렸다.
“암. 폐하는 보면 감동하실 거야. 확실해. 폐하가 이걸 보면 ‘천 귀인은 못 하는 게 없구나!’ 하고 엉엉 우실지도 몰라.”
“폐하께서…….”
내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설득이 되었는지, 경사방 태감은 결국 융통성을 발휘해주기로 했다.
“그러면 소신이 가지고 갔다가 도착해서 드리겠습니다.”
덕분에 나는 떡돌이에게 무사히 내 첫 작품을 보여줄 수 있었다.
“짠. 그거 내가 만든 거다?”
떡돌이는 목욕을 하고 와서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는데, 태감이 손수건을 침상 옆에 두고 나가자 그걸 한 손으로 집어 들어 올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희한하단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걸 주는 거지?”
그런데 그 말투 속에는 내 작품에 놀라워하는 티가 전혀 없어서,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설명했다.
“의도라니. 내가 처음으로 놓은 수라서 자랑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구구절절 설명을 했는데도 떡돌이는 내가 건넨 손수건을 찝찝하단 듯이 쳐다보기만 했다.
전혀 내가 원했던 반응이 아닌지라 좀 기운이 빠져서 “이상해?”라고 묻자, 떡돌이는 한참 동안 수 무늬를 바라보다 물었다.
“많고 많은 무늬 중에 왜 굳이 토끼를……?”
토끼 아닌데. 거북인데.
하지만 나는 기민한 눈치로, 떡돌이의 오해를 정정하는 대신 얼른 동의했다.
“토끼는 귀여우니까.”
현명한 처사였다.
여기서 ‘그거 거북이야’라고 말해봐. 떡돌이가 내 수 놓는 실력을 분명 비웃을걸?
하지만 내가 딱 잘라 토끼라고 해버리니, 떡돌이는 놀릴 게 없는지 심각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물었다.
“그럼 여기 토끼 다리 사이에 붙은 건 토끼 똥인가.”
거북이 머리다 이놈아!
그렇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내 수 놓는 실력이 나빠 보일까 봐, 나는 얼른 그 말도 인정했다.
“아무렴. 똥이지. 토끼는 똥을 자주 누니까.”
떡돌이는 그래도 영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머리 말리는 데 쓴 수건과 수놓은 손수건을 옆에 같이 내려놓으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자랑하기엔 이른 실력 같은데, 천 귀인. 짐이 아니라면 이게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구분도 못 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펑 터지는 기분에 입을 쩍 벌렸다.
이 새끼가? 자기 눈에도 거북이 같았네! 그런데 토끼라 한 거야?
내가 입을 닫지 못하고 쳐다보자, 떡돌이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더니, 거북이 머리를 가리키면서 재차 확인 사살을 했다.
“토끼 똥이라고?”
“돌려줘!”
“우리 계란이의 첫 작품은 똥 누는 토끼였나.”
“돌려줘! 버릴 거야!”
“왜. 이런 명작을 그냥 버리면 쓰나. 이건 짐이 소중히 간직하다가, 내일 조회에 가져가서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마. 우리 천 귀인이 토끼…….”
“아 그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