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누가 더 수치스러울까? 일단 나는 아냐
“소주, 뭘 했기에 얼굴에 바른 분이 다 사라진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처소로 돌아와 보니, 부성과 원웅이 기겁하며 분첩 효과가 사라진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값비싼 분이라더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떨어지는 거예요?”
“역시 소문만 요란하네요. 이게 뭐예요. 열심히 발랐는데.”
“분첩이 문제가 아냐. 폐하가 닦아버렸어.”
그것도 자그마치 세 번에 걸쳐서 꼼꼼히 야무지게 닦았지. 그래 놓고서는 내 얼굴이 열기로 발갛게 되자 익은 계란이라면서 혼자 재밌어했다.
청적에 있었더라면 찰싹찰싹 두드리면서 엄중히 혼냈을 텐데, 계란말이 상태로는 그것도 되지 않아서 혼자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웅과 부성은 자기들이 곱게 발라준 분첩을 황제가 닦아버렸다는 데도 서운해하지 않고 그 이유를 궁금해 했다.
“폐하가 왜요? 이상하다세요?”
“폐하께 갈 땐 이젠 바르면 안 되겠네요.”
“너희는 참 너그럽구나.”
두 궁녀가 ‘무슨 소리예요?’ 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아니라고 휘휘 손을 젓고서 내 침소로 돌아와 두 팔을 뻗고 편안하게 누웠다.
하지만 침상에 누워 눈을 감자, 자기가 박박 닦아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웃고 있던 그 얄미운 미소가 떠올라 다시 눈이 번쩍 떠졌다.
인상을 찡그리고서 침대에서 몇 번 굴러다니다가, 결국 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덮어버렸다. 황제라 그런가. 뭐든지 제멋대로야.
* * *
비원은 사각으로 잡은 서신을 곱게 싼 줄을 끊고 조심스레 그것을 펼쳤다. 서신 위에는 평이한 시구가 쓰여 있었다.
하지만 촛대를 가져다 서신 위로 기울여 촛농을 떨어뜨리니, 그 부분 위주로 희미한 글씨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추어진 서신을 다 읽어낸 비원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놀라워하는 눈으로 서신을 내려보다가, 촛대를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서 다 읽은 서신을 태워버렸다.
재까지 깔끔하게 치워낸 비원은 두 손을 가만히 책상 위에 올리고서 재밌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천 귀인이 혼절한 시각에 천년비의 영혼이 잠시 돌아왔었다……?’
* * *
천년비가 황제의 방종함에 씩씩거리고 비원이 타천천에게서 중대한 정보를 받아드는 그때, 심궁의 어실에 도착한 황제는 오원요로부터 예전에 그가 지시한 일의 결과를 보고 받고 있었다.
“천 귀인께서 이미 폐하의 정체를 아시니 이 명령이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사오나, 그래도 전에 시키신 일을 다 마무리해 지금 보고드립니다, 폐하.”
“내가 시킨 일?”
“예. 천 귀인께서 사가에 있을 적 혹시 구박받진 않았는가 살펴보라 하셨지 않습니까.”
“아아. 그 일 말인가. 그래, 어떻더냐.”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보았지만, 천 귀인이 사가에 있을 적 구박받았단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황제는 어젯밤 천 귀인의 얼굴에 반질반질하게 빛나던 분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하냐.”
“예. 오히려 천혜음은 서출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영빈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걸 방치했다더군요.”
“영빈이?”
“예. 영빈이 괴롭힘을 당할 때 챙겨준 이가 연비 마마여서, 사가에서 영빈이 연비 마마를 늘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천 귀인은?”
“천 귀인은 형제자매들에겐 관심이 없어서 늘 혼자 뭔가 바쁘게 하며 지냈는데, 꽁꽁 감추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뭔지는 그 집안 식구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오원요의 대답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도 자신만의 비밀 공간을 달라 청했던 천 귀인이니, 사가에 있을 때도 그러고 놀았다 해서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음식은? 귀하게 자란 귀족가 자제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왜 그리 급하게 주워 먹었던 거지?
“어디 조난을 당했다거나, 아니면 혼자 놀다가 창고 같은 데 갇혀서 며칠 굶었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더냐.”
“워낙 조용하고 얌전하신 분이라 한 번도 사고를 친 적이 없다 하니,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더욱 고개를 기웃했다. 조용? 얌전?
* * *
종일 무공을 수련하고서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처소에 돌아왔을 때였다.
문 앞에 어디서 본 듯 만 듯한 궁녀가 우두커니 서 있지 않는가.
누군가 싶어서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 귀인, 안비 마마께서 예전에 쓰러졌다 깨어난 후 몸이 계속 불편하시니, 새로 만드는 여름용 피풍의에는 천 귀인이 수를 놓아 달라 하십니다.”
“수는 수의방 가서 놓아 달라 해야죠.”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자, 어느새 곁에 온 원웅이 슬그머니 뒤에서 내 팔을 살짝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원웅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내가 해주라고? 내가 왜? 황당해서 나도 같이 고개를 저었으나, 원웅은 그 신호를 다르게 파악한 건지 얼른 앞으로 나서서 안비의 궁녀에게 대신 대답했다.
“안비 마마께서 원하시면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염려 마세요.”
안비의 궁녀가 수 놓을 피풍의를 건네고 사라지자마자 나는 원웅을 데리고 처소 안으로 들어가 항의했다
“난 수를 못 놔. 아예 못 해.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해?”
하지만 원웅은 오히려 자기가 더 갑갑해 하는 얼굴로 시무룩하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수의방 가서 놓아라’고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소주. 그걸 몰라서 온 게 아니잖아요.”
“그럼?”
“그냥 꼬투리를 잡으러 온 거예요. 소주가 총애를 받고 있으니, 자기를 무시하나 안 무시하나 살피려는 거라구요.”
“그런 거야?”
“네. 그냥 해줘서 보내는 게 훨씬 나아요. 굳이 적을 더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난 이런 건 정말로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결국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렇지만 별개로 여전히 걱정할 거리는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난 수를 못 놔. 기억을 잃기 전엔 놨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
“그래도 이참에 배워두는 게 편할 거예요, 소주. 원래 소주는 수를 잘 놓으셨으니까 손도 기억하고 있어서 빠르게 배우실 수 있어요.”
그건 네 생각이지! 원웅이 기억을 잃었다 찾은 게 아닌 이상, 이 문제는 원웅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안비의 궁녀가 원웅에게 주고 간 예쁜 연분홍색 피풍의를 노려보았다. 저기에 수를 놓으라고. 젠장!
“일단 수 놓는 법을 배우세요, 소주.”
* * *
누구에게 수 놓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할까 유심히 고민해보니, 몇 명 후보가 떠올랐다.
일 번. 동복언니인 연비. 기각. 전에 돈 꿔 달라 했을 때도 거절했잖아.
이 번. 이복동생인 영빈. 기각. 그냥 가도 안 가르쳐 줄 사람 같은데, 어제 연비 애비가 다녀간 후로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지금 가면 의자로 날 내려칠지도 몰라.
삼 번. 이제는 제법 많이 친해진 연얼 군주. 기각. 지금 궐 밖에 나가 있다고 들었어. 먼저 부르긴 좀 힘들다.
사 번. 염 귀인? 아. 괜찮겠는데?
“염 귀인한테 배울까?”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염 귀인을 찾아가 수 놓는 걸 알려달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부성과 원웅은 내 말을 듣자마자 두 손까지 휘저으면서 질색했다.
“안 돼요, 소주! 염 귀인은 수 놓는 실력이 형편없기로 손가락에 꼽힌다고요!”
“배워도 제대로 배워야지, 염 귀인한테 배웠다간 실력이 덩달아 이상해져요!”
아 그럼 어쩌라고!
내가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 태후 마마한테 가서 가르쳐 달란 것도 이상하고. 사자 친왕도 여기 살진 않으니 먼저 찾긴 힘들고.
흑합 장군한텐 당분간 가지 말라며! 그 외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있네.
* * *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데, 경사방 태감이 와서 시침 들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평소답지 않은 말을 하나 덧붙였다.
“오늘은 계란옷을 입지 말고 오시랍니다, 천 귀인.”
계란옷 아니라니까!
어쨌든 이불말이를 안 한 상태로 가면 나야 좋은 일이어서, 나는 알겠다 대답하고서 적당히 꾸민 다음 태감을 따라 이동했다.
그런데 침소에 가서 보니 떡돌이가 떡돌이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 황제 같지 않은 차림.
태감이 나가자 입가에 두르고 있던 면사까지 치워서, 정말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떡돌이 그 모습 그대로 보였다.
“세상에. 오늘 너 꼭 덕춘이 같아.”
그걸 보며 감탄하자, 떡돌이는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침상을 눈으로 가리켰다.
“피곤하지 않다면 저걸 입고 같이 어디 좀 가자.”
제대로 보니 침상 위에 놓인 건 후궁들이 평소에 입는 옷보다 좀 더 소박해 보이는 차림의 의상이었다.
“저걸 입고 어디 가는데?”
의아해서 묻자, 떡돌이는 갑자기 옷고름을 매는 척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야시장.”
“야시장에는 왜?”
“네가 답답할까 봐.”
뭐?
놀라서 그를 쳐다보자, 떡돌이가 “안 입어?” 하고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내가 주저하며 서 있자 떡돌이가 결국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싫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밖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잖아.”
“좋아하긴 하는데…….”
“는데?”
“난 오늘 따로 할 일이 있었단 말이야.”
“일이라니?”
떡돌이가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시침 들러 오라 했을 땐 그런 말 없었잖아, 하는 투로.
그야 그렇지. 떡돌이랑 같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뭘 하려 했는데?”
“너한테 자수를 배우려 했어.”
“!”
다시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떡돌이가 확 내 쪽을 쳐다보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짐한테 자수를 배우려 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비가 내게 뭘 요구했는지 알려주자, 떡돌이는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끙 소리를 냈다.
“자수도 못 놔?”
그걸 보고 혀를 차며 묻자, 떡돌이는 발끈해서 반박했다.
“너도 못 해서 배우려는 거 아닌가?”
“난 기억을 잃기 전엔 잘했대. 기억을 잃어서 못하게 된 거야. 사실 기억 잃은 시점을 기준으로 치면 난 아직 한 살인 거잖아. 내 뇌는 아직 ‘응애’ 하고 있다고.”
“하……”
떡돌이는 기도 안 차다는 듯이 내 머리통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더니 밖을 향해 “오원요!” 하고 외쳤다.
그 말에 오 공공이 얼른 들어오자, 그는 짓궂게 웃으면서 지시했다.
“짐의 후궁이 자기는 한 살이라고 주장하니 업고 다녀와야겠다. 커다란 포대기를 가져오라.”
그 말에 오원요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나를 미친 인간처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른 눈을 내리깔고서 “예.” 하고 웅얼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정말로 커다란 포대기를 가져다주고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설마 진짜로 저걸로 날 업으려 들겠어…… 싶어서 보고 있자니, 떡돌이는 포대기를 두 손으로 탁탁 털어 펼치고서 날 향해 방긋 웃었다.
“이리 와라 천 귀인. 한 살밖에 안 된 머리통이 놀라면 안 되니 잘 싸매고 다녀오자.”
저놈 저거. 해보자는 거지?
업혀 가는 내가 부끄러울까 업고 가는 자기가 부끄러울까.
지금 끝까지 가 보자는 거지?
쯧쯧…… 황제여. 모르는 게 있군. 이 몸은 사파 악적 천년비, 절대로 이런 데 물러나지 않아!
“오 공공!”
내가 황제의 말투를 따라서 외치자, 오 공공이 잠시 뒤 황당해하며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한 손을 척 내밀며 장군처럼 요구했다.
“딸랑이도 주시오. 내 품고 가겠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