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원수가 아버지가 되다니
“네가 모르니까 나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짐이 모르다니?”
“네가 아내 숫자가 많아서 헷갈리니까, 나도 헷갈릴 거라 생각해?”
“!”
내 말에 황제는 입을 벌리다가 닫더니 눈살을 구겼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자기가 뜯어낸 풀들을 내 치마 위에 다 쏟아버렸다.
단정한 치마폭이 순식간에 풀밭이 되어 버렸다.
“유치하긴.”
하지만 나는 고작 이런 쪼잔한 수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기에, 치마에 묻은 풀을 터는 대신 떡고물이 묻은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서 끌어당겼다.
“놓아라!”
“싫어!”
“놓아라!”
“싫어!”
그러고서 그의 뺨에 딱 달라붙어 매달리자, 떡돌이는 버둥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뒤로 엎어졌다.
넘어지면서 그가 나를 잡는 바람에 얼결에 나 역시 그의 품 안에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떡돌이는 두 팔을 벌린 채 대자로 누워 있고, 나는 그 위에 떡돌이를 감싸고 누워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너…….”
다행이야. 내가 위쪽에 있어서 머리를 박은 것도 등을 부딪친 것도 떡돌이잖아. 난 하나도 안 아파!
하지만 저 표정을 보자 문득 걱정이 되었다.
떡돌이는 나에겐 떡돌이지만 황제기도 한데, 이러다가 갑자기 황제로서의 자의식이 더 거대해져서 ‘감히 짐을 깔고 앉아?’라고 화를 내면 어쩌지?
권력자의 미움을 사는 건 질색이다. 그랬다간 내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다 사라지겠지.
기껏 몸이 바뀌어 평화를 찾았는데, 그 고궐이란 인간처럼 평생 황궁과 관부에 쫓길 걱정을 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천 귀인. 내려와.”
“잠시만. 내가 지금 생각을 좀 하고 있어.”
“……내려와서 생각해라.”
“중요한 생각이라 그래.”
“무슨 생각인데?”
“네가 화낼까 봐 걱정하고 있었어.”
“그럼 일단 내려와.”
떡돌이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빠지고 허탈한 기운이 어렸다.
슬쩍 눈치를 살피자 그가 피로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황제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재차 말했다.
“내려와.”
일단 이 일로 화를 낼 것 같진 않기에, 나는 알겠다고 웅얼거리고서 내려갈 길을 찾았다.
하지만 이게…… 높이가 낮은 건 아닌데 참으로 애매했다.
앞으로 내려가자니 떡돌이의 얼굴이 있고, 옆으로 내려가자니 치맛자락이 너무 풍성해서 기우뚱 넘어질 게 뻔해서.
그렇다고 밟고 일어날 수도 없고.
당황해서 쩔쩔매고 있자니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알아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나는 그의 두 팔에 안겨 있고.
‘어라. 의외로 움직임이 빠르잖아?’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바라보자 떡돌이는 나를 바닥에 척 내려주더니, 내 얼굴 옆에 묻은 풀잎을 떼어 주고서는 간단 말도 없이 가버렸다.
* * *
“세상에, 소주! 왜 그렇게 옷이 엉망이세요?”
처소에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궁녀들은 난리가 났다.
그들이 내게 새 옷을 입혀야 할지 풀을 털어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나는 황제의 소인배스러움을 한숨에 섞어 조금씩 잊어냈다.
그런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연비의 태감이 찾아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알렸다.
“귀인. 천 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귀인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천 대인? 천 대인이면 천 씨일 테고. 연비 태감이 ‘천 대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내 아빠?”
아닌가? 내가 묻자마자 연비의 태감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옆에 선 원웅을 쳐다보았다.
내 아빠 아냐? 얼결에 원웅을 쳐다보자, 원웅이 눈치 빠르게 나서서 대답했다.
“네, 소주의 아버님이 천 대인이세요. 1천도의 총서서시고요.”
“그 너구리 새……!”
원웅은 천소여가 그를 ‘아빠’라 부르지 않는단 걸 알려주려 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른 데 더 화가 나서 더 심한 말이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마지막 단어이자 제일 욕 같은 ‘끼’를 빼고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원웅과 연비의 태감은 표정이 아주 기괴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서 인자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 어디 계시는가?”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젠장.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1천도의 총서서 그 자식은 관부 인물 주제에 무림, 특히 정파인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수시로 날 괴롭혀댔던 새끼란 말이다!
그런데 그 너구리 새끼가 천소여의 아빠라고?
* * *
사적으로는 언니이고 아버지라지만, 공적으로는 연비이자 대관이기에, 결국 풀이 묻은 옷은 갈아입었다.
나는 평소보다 좀 더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게 차려입고서 마지못해 오월궁으로 갔다.
연비의 처소로 가 보니 그곳에는 이미 영빈까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연비와 영빈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마지못해 연비 애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자식이니 좀 싹싹하게 굴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전에 이놈 때문에 내 다리가 덫에 걸렸던 적이 있던 걸 생각하면 차마 고운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놈 침상에 같은 덫을 설치해서 고생이야 똑같이 했겠지만.
다행히 천소여가 원래도 싹싹하게 굴진 않았던 듯 연비 애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무심하게 물을 뿐이었다.
“크게 다쳐 기억을 잃었다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애비, 아, 아비, 아니, 아버지는 잘사셔요?”
“음?”
“건강해 보이시네요. 어…… 네.”
나는 부모님이 없어서 부모님하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부모자식은 보통 다정하고 끈끈한 사이라지만, 예외도 많으니까.
자식 같은 말을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연비 애비가 갑갑하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겠구먼.’
하지만 연비 애비는 의외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얼른 앉으시지요. 아직 몸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 태도로 이렇게 말할 뿐.
뭐. 그래도 딸내미라고 소리는 안 질러대는 건가.
하여튼 앉으라니 앉자. 하필 빈 자리가 연비 애비 옆자리뿐이란 게 떨떠름하지만.
그런데 내가 그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연비 애비가 뜬금없이 영빈을 싸늘하게 혼냈다.
“영빈 마마께서는 언니가 이렇게 몸이 좋지 않은데 잘 보살피지 않고 뭘 했던 겁니까.”
영빈은 입을 다문 채 탁자에 놓인 찻잔만 보다가 연비 애비의 꾸중에 입을 다물고 더 고개를 숙였다.
어…… 연비 애비는 영빈은 싫어하나?
그 모습이 좀 의외다 싶어 둘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연비가 나서서 연비 애비의 손을 잡았다.
“그만 하세요, 아버님. 우여는 소여보다도 나이가 어립니다.”
연비 애비는 그 말은 또 잘 들으며 순순히 “그러지요.” 하고 대답했다. 영빈 태감이 아닌 연비 태감이 날 부른 이유가 있네.
나도 모르게 힐긋 영빈에게로 시선이 갔다.
평소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로 늘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오늘은 고개도 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연비 애비가 영빈을 차별하나?’
의심은 연비 애비의 행동을 볼수록 더욱 강해졌다.
연비 애비는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세 딸에게 목걸이를 줬는데, 연비에게 준 거나 나한테 준 거는 딱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
반면 영빈에게 준 목걸이는…… 자기가 수제작한 거 아닌 이상 엿 먹으란 수준으로 형편없었다.
용돈으로 쓰라면서 돈 봉투를 줬는데, 돈 봉투 역시 영빈에게 주는 것만 두께가 얇았다.
말하는 것에서도 영빈을 차별하는 게 티가 났고.
“듣자 하니 천 귀인께서 폐하의 성총을 독차지하고 있으시다지요. 천 귀인께서는 순하신 데다 독한 계략은 알지 못하시니, 영빈 마마께서 천 귀인을 잘 챙겨주셔야 합니다.”
“예.”
“언니가 잘되는 게 영빈 마마에게도 좋은 겁니다.”
“……예, 아버님.”
“어차피 영빈 마마는 서녀라, 높이 올라가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고 두 언니를 높이 올리는 데 집중하세요. 언니들이 밟고 올라갈 계단이 되도록 하세요.”
나는 말 없이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영빈을 살폈다. 영빈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내내 찻잔만 보고 있었다.
마침내 차 두 잔을 마시고 대화가 끝났을 때는 긴장감이 풀리면서 어깨가 내려올 정도로.
어휴. 이게 부모자식 간에 대화냐. 하여튼 저 너구리는 적으로 만날 때도 별로였는데 부모자식으로 만나도 별로야.
그런데 툴툴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처소로 돌아가려는 나를 연비 애비가 쫓아오는 게 아닌가.
영빈은 연비와 같은 궁에서 살기에 나와 너구리 애비 둘 뿐일 때였다.
그런데도 연비 애비는 눈짓으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다 물리더니, 둘만 있게 되자 내게 따로 작은 상자를 더 내밀었다.
“이걸 챙기십시오.”
“뭔데요?”
내키진 않았지만, 돈이나 보석이라면 받을 요량이 있기에 나는 손을 내밀어서 상자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동그란 통이 있었다.
역시 뭔지 모르겠어서 뚜껑을 한 번 더 열자, 보드라운 향이 나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너무 뜬금없어서 묻자, 그가 얼른 뚜껑을 도로 닫게 하더니, 상자 뚜껑까지 확실하게 닫아 쥐여주었다.
“북대륙에 있는 청호도 산 분첩입니다. 그곳의 분첩은 아주 고운 향이 나고 피부에도 좋기로 유명하지요.”
“근데 이걸 왜 나한테……?”
“하나밖에 구하지 못해서 따로 드리는 거니, 숨겨두고 혼자 사용하세요.”
놀라서 쳐다보자, 너구리 애비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외척인 데다 가까이 지내지 못해 이렇게밖에 못 챙기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아팠단 이야기를 듣고 많이 속상했습니다.”
“!”
“성총을 받아 품계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건강을 해치면 무슨 소용입니까.”
* * *
“피부에 뭐 발랐느냐?”
연비 애비가 준 그 청호도 분첩이 효과가 좋긴 한가보다.
황제가 시침에 부를 때 조금 바르고 갔는데 대번에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걸 보니.
“뭘 어떻게 했기에 빛나는 계란이 된 거지?”
황제가 신기한지 얼굴을 여기저기 살피는 걸 보다가 나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아버지가 다른 이에게 나쁜 아버지일 수도 있을까?”
황제는 어리둥절해서 나를 쳐다보더니 “아아.” 하고 조금 차갑게 중얼거렸다.
“오늘 천혜음이 너희 자매를 만나고 갔다 했지. 천혜음이 뭘 바리바리 싸 와서 주고 갔다더니. 얼굴에 바른 게 그건가?”
그런데 그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좀 냉랭했다. 게다가 ‘너희 자매’라는 표현을 왜 저렇게 기분 나쁜 투로 말해?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해?”
그게 이상해서 묻자, 황제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웃었다.
“짐이 네 아비를 말할 때 말투까지 신경 써야 하나?”
웃고는 있지만 비딱한 웃음이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웃는 미소.
내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황제는 그제야 손을 들어 자기 관자놀이와 이마를 몇 번 누르더니 평소같은 얼굴로 돌아와 내 이불 위를 토닥거려주었다.
“자거라.”
“너 이상해.”
“…….”
황제는 말없이 눈을 감았고, 나는 그의 옆모습을 살피다가 일단 같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황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오 공공을 불러 지시했다.
“오원요!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와라!”
그리고 잠시 뒤 오 공공이 대야에 물을 받고 거기에 수건을 걸쳐 가져오자, 황제는 물에 손가락 끝을 넣어 뜨거운지 살피더니, 수건을 가져다 물기를 쭉 짠 다음 그걸로 내 얼굴을 마구 닦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