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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71화 (71/283)

##  71화. 네 남편이 누군데?

“다친 곳 없이 성히 잘 다녀왔느냐.”

돌아온 흑합은 군주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신 흑합, 폐하의 명령을 받들어 23천도와 그 일대를 살피고 왔습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외지를 다니다 왔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믿음직해 나라의 기둥이라고 할 만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면사 아래로 드러난 월요 황제의 입꼬리도 여유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어떠하더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더냐.”

몇 달 전, 월요 황제는 흑합에게 23천도로 내려가 수오부 군왕과 손을 잡은 무리를 찾아내라 명령했다.

‘흑합이 두 번째고 너는 세 번째다’라는 천 귀인의 선언이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영 쓸데없는 명령은 아니었다.

월요 황제는 그전부터 이 일에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고 있었고, 그 적임자를 찾기 위해 여러가지 조건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흑합이 오랜 수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중간에 한 번 서신으로 말씀 올린 것처럼, 무림의 흑도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고 있다 합니다.”

“심각한 정도이냐.”

“무림에서 가장 이름 높은 악적 넷을 무림 사적이라 하는데, 개중 천년비라는 이가 가장 유명합니다. 하지만 단독으로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관부에서 주시하는 명단엔 없었습니다.”

“한데?”

“그자의 행보가 바뀌었다 합니다. 사하비단이란 흑도 문파와 손을 잡더니, 중소 규모의 흑도 문파들을 차례로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그러하냐.”

월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천년비란 이름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보고받는 것이기에 큰 시름으로 여기지 않았다.

황실에서 무림인들을 주목하는 기준은 흑도이냐 정도이냐가 아니라, 규모와 영향력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하비단은 어떤 곳이지?”

“최근 행보가 가장 뚜렷한 흑도 문파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마교나 천무혈교에 비하면 영향력도 수도 적은 편이라, 수오부 군왕과 손을 잡을 만한 배후일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렇군.”

“게다가 원래 무림인들 자체가 자기들끼리 잘 뭉쳐서, 왕족들과 결탁했단 물증이 없는 상태에선 무작정 범인으로 지목하기 어렵습니다.”

황제의 권력이 있다면 범인이 아닌 자도 범인으로 만들 수 있으나 그렇게 해서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가짜 범인을 처단한다 한들 진짜 범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월요 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가짜 범인들을 무작정 잡을 생각이 없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듯해 송구하옵니다.”

말을 마친 흑합은, 보고를 끝내고 보니 자신의 조사 결과가 미흡한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고생하고 온 충신을 질책해서야 쓰나.”

월요 황제는 말도 안 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흑합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이자 흑합이 희미하게 웃었다.

기둥 뒤에서 사이 좋은 주종의 모습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본 승언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좋자 가까스로 안심했다.

‘다행이다. 흑합 장군은 폐하의 좁은 속내를 모르고 있어.’

* * *

그 시각. 한림원의 비원 역시 반가운 소식을 받아 살피고 있었다. 그 소식은 사하비단의 단주인 타천천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그 후궁이 쓰러진 시기가 언제인지.

서신은 짧았으나 강렬했다.

비원은 서신을 접어 촛대 위에 가져갔다.

촛불에 닿은 종이가 그 부분부터 조금씩 그을려 검어지다가 끄트머리만 남기고 다 타버리자, 비원은 그 끄트머리는 책 위에 내려두고 입김을 후 불었다.

검은 재가 날아가자 책상은 금세 깨끗해졌으나 그의 마음에는 오히려 얼룩이 들었다.

‘수장이 그걸 왜 묻는 거지?’

비원은 천 귀인에 관한 서신을 쓰긴 했으나, 분명 똑똑히 밝혀두었다.

그 후궁이 천년비일까 싶어 시험해 보았지만, 아니란 결론을 얻었다고.

타천천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주군이 아니었다.

비원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그가 서신을 보내 이런 질문을 할 때는 분명 물어보는 이유가 있을 터.

‘천 귀인 쪽을 좀 더 주시해보아야겠군.’

* * *

떡돌이는 고궐이 무림인이라 했지. 하지만 내가 아는 무림인 중엔 그런 이름이 없어.

물론 이 세상엔 내가 아는 무림인보다 나를 아는 무림인이 많을 테고, 나를 아는 무림인보다 내가 모르는 무림인이 많겠지.

처음 듣는 무림인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가 신경 쓰는 건 고궐이 황궁에서 잘 도망쳐서 아직도 붙잡히지 않고 있단 점이었다.

관부에 무공 익힌 사람이 없지도 않을 텐데, 웬만한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아닐 거라고 본다. 은신술이 뛰어나든 경공술이 뛰어나든 최소한 뭐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뛰어나겠지.

그래서 이상해. 그럼 이름이 안 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아직 결론을 내기도 전, 부성이 안으로 들어오며 내게 알려주었다.

“소주, 흑합 장군이 돌아왔대요!”

나는 책을 턱받침대로 쓰고 있다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흑합 장군이 돌아왔다고?”

“네. 소주는 흑합 장군과 친하시죠?”

“응. 지금 어디 있대?”

“곧장 심궁으로 갔으니 폐하와 있을 거예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얼른 일어났다.

“나 옷 좀 제대로 입을게.”

몇 달 전엔가. 떡돌이에게 서운해진 나는 이제부터는 흑합 장군을 내 두 번째 지기로 잡고 잘 지내보려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딱 떡돌이에게 그 선언을 하자마자 장군이 먼 곳으로 떠나는 바람에 제대로 2인자의 대우를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왔으니 제대로 2인자 취급을 해주어야지!

흑합은 우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데다 신의도 있다.

떡돌이는 내가 신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좀 보고 배워야 해.

‘내가 왜 떡돌이한테 화가 났더라?’

“저…… 소주.”

그런데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우리 대화를 들은 원웅이 얼른 다가오더니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지금은 서신만 보내고, 만나는 건 며칠 지난 후에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왜?”

그러면 너무 번거롭지 않나? 내가 의아해서 묻자 원웅과 부성이 서로 눈을 한 번 맞추었다.

서로에게 설명을 떠미는 눈짓들로.

결국 이 제안을 먼저 꺼낸 원웅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저 이었다.

“내명부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도 막고, 관리들과 교류하는 것도 막는 나라도 몇 있지만, 우리나라는 내명부에서 관리들과 교분 나누는 걸 꺼리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좀 직급이 높다 싶은 관리들은 모두 후궁이나 황후를 숭배하는 척 줄을 서고 파벌을 만들고요.”

흑합 장군은 내 파벌이 아닌데…… 하지만 이게 지금 핵심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런데?”

“다들 하는 방법이지만 이게 또 아슬아슬한 점이 있어서요. 잘못하면 오해를 사기 쉬워요, 소주.”

“어떻게?”

“측근을 만들려면 교분이 있어야 하는데, 교분을 쌓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몰려서 암투에서 밀려나는 일도 있거든요.”

“사통한다거나 그런 쪽으로?”

“네. 폐하가 소주를 총애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소주는 점점 더 위상이 높아지지만, 그만큼 적들도 많아지잖아요. 떳떳하시더라도 행동을 더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여전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하여튼 이거잖아.

“눈치 보다가 선빵 잘못 맞으면 도긴개긴인데 혼자 냉궁 간단 거지?”

“예?”

냉궁도 그리 나쁘진 않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게 부실하긴 했어. 원웅이랑 부성은 그 분위기를 많이 무서워했고.

그래. 생각해보니 꼭 오늘 만나야 할 필요는 없겠네. 나는 원웅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서신만 보낼게.”

“네, 소주. 제가 얼른 전하고 올게요.”

* * *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고생하고 왔는데 고작 편지 한 통 보냈으니 흑합이 섭섭해 할 수도 있다.

나라면 섭섭해서 편지에 ‘바보 멍청이는 당분간 말 걸지 마’라고 써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흑합 장군은 내가 보낸 서신에 아주 정중하고 다정한 답서를 보내주었다.

무슨 시구를 넣어서 만든 답서였는데,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읽기에 멋졌다.

그러면 된 거지. 심지어 안에 말린 꽃잎도 넣었어.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받아 본 서신중 가장 공손하고 정중한 서신이어서, 나는 청적에 가 떡돌이를 보자마자 그걸 자랑했다.

“흑합 장군은 글씨도 바른데 편지까지 꼭 자기처럼 잘 쓰더라. 한 획 한 획에서 그 사람이 묻어나는 느낌이야. 진짜 대단해.”

“편지?”

“두 달 만에 돌아왔잖아. 잘 다녀왔냐고 서신을 보냈거든. 직접 갔다가 오해를 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무진장 멋진 글씨로 답서를 써줬어.”

하지만 떡돌이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좀 부루퉁한 얼굴.

장난삼아 삐진 척하는 얼굴은 아니어서, 나는 그가 딴생각을 할까 봐 얼른 덧붙였다.

“이상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말하는 거에서 먹물 향이 난다고. 하긴. 흑합 장군은 이름에서도 먹물 향이 나고 사람한테서도 먹물 향이 나긴 해.”

내가 받아 본 서신에선 다 비린 철 냄새가 났단 말야. 아니면 피 냄새나.

그러나 설명을 했는데도 떡돌이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왜 이러나 싶어서 그의 얼굴 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그래도 표정은 그대로.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자 결국 표정을 피면서 단호하게 말했지만.

“찌르지 마라.”

“네 한계는 여기까지구나.”

“이상한 말로 넘어가려 하지도 말고.”

무슨 소리야? 의아해서 쳐다보자 그가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에 거무스름한 게 묻어 있어서 보니 먹물이었다.

어쩌라고 싶어서 찰싹 손바닥을 두드리자, 떡돌은 손을 도로 내리고서 항의했다.

“먹물 향이 난단 건 이런 걸 말하는 거다.”

“손 안 씻고 나한테 떡을 먹여준 거야? 그 손으로?”

“그게 아니라…….”

“항상 그랬어? 손 안 씻고 떡 줬어?”

“내 손에서도 먹물 향이 난다고. 늘 붓과 먹을 쥐고 살아서 먹물 향이 손에 뱄어. 손을 씻어도 계속 나. 먹물 향은 이럴 때 난다고 알려주는 거다.”

어쩌란 거야.

“그런데 넌 내 손에서 나는 먹물 향엔 관심도 없고, 흑합 장군에게선 먹물 향이 난다고? 세 살짜리 어린애가 낙서를 해도 거기에 코를 박으면 먹물 향이 날 텐데?”

그의 손에 코를 가까이 대 보지만 나는 건 떡고물 냄새뿐이다.

나는 그의 손을 콱 물어버리는 거로 떡돌이에게선 떡 냄새만 난다는 걸 증명했다.

떡돌이는 흠칫했다가, 내가 손가락을 물고 쳐다보자 다급히 손을 빼내면서 중얼거렸다.

“결론은, 그거다. 남편 앞에서 다른 사내 자랑은 하지 마라.”

무슨 소린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변명 조로 덧붙였다.

“모를 땐 몰라서 그랬다지만 지금은 알잖느냐. 내가 네 남편이란 걸.”

아아. 그래서 내가 흑합 장군을 칭찬했더니 떡가루 묻은 손을 들고서 먹물 향은 이거라고 말도 안 되게 우겨댔구나.

그럼 이건…… 질투? 떡돌이가 질투하는 건가? 나는 궁금해서 대놓고 묻고 말았다.

“질투해?”

떡돌이는 주춤하더니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질투하는 거 같은데?”

질투하지 않는다면 내가 흑합 장군을 칭찬하는데 왜 자기가 기분 나빠 한단 말인가.

그러나 떡돌이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부인했다.

“아니. 나는 누구를 질투하고 그러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과인이 질투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럼 왜 남편 운운한 건데?”

“실제로 내가 네 남편이니까.”

“그래?”

“그래.”

“하지만 넌 남편 같지 않은데.”

태연한 척 발치의 풀을 만지작거리던 떡돌은 아예 그걸 ‘우득’ 뜯으면서 물었다.

“그럼 네게 남편 같은 사람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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