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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70화 (70/283)

##  70화. 너도 비슷한 아픔이 있구나

멍하게 앉아 만두를 먹는데 이게 매운지 싱거운지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반쯤 넋을 놓고 젓가락질을 하다가, 나는 기운이 나지 않아서 결국 음식 먹기를 그만두었다.

“소주, 괜찮으세요?”

부성은 옆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주다가 걱정스럽게 내게 물었다.

“어젯밤에도 거의 안 드시고 아침도 안 드셨는데, 간식까지 안 드시면…….”

원웅은 내가 어제 커다란 그릇을 쳐버리는 바람에 푹 패어버린 바닥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혹시 개 답응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에요? 개 답응이 다녀간 후로 계속 이러시잖아요!”

개시시 때문이 맞긴 하지. 정확히는 개시시가 전해준 소문이랑, 개원을 똑 닮은 얼굴 때문에.

차라리 사자 친왕에게 소문을 들었으면 이 정도로 충격받진 않았을 텐데.

개원이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런 말을 하니 심장이 섬뜩할 정도로 기분이 상했다.

자기가 정성껏 만들어 온 요리가 망가졌는데, 내 손부터 챙겨주던 모습 역시 친절했지만 개원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싫고.

“개 답응은 멀리하는 게 낫겠어요.”

측근 궁녀들은 내가 기운 없는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자 더욱 걱정했다.

평소라면 억지로라도 기운이 나는 척했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소주?”

“함께 가요.”

“아니. 혼자 있고 싶어.”

* * *

처소를 나가자마자 바로 비밀 수련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온몸에 땀이 날 때까지 근력과 체력을 기르는 위주로 수련을 했다.

다음으로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내가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무공인 천견비의 보법을 반복해 펼쳐 보았다.

온몸이 지칠 때까지 움직이고 나자 그제야 멍해졌던 머릿속이 진정이 되었다. 그 자리를 분노가 차지했지만.

“개원이 이 개새끼.”

내가 진짜…… 아무리 평화롭게 살더라도 너는 내 손으로 죽이고 만다.

우리 둘이서 놀러 가던 그 동굴에 네 시체를 버려두고 짐승들이 찢어먹게 둘 거라고!

후! 일단 진정하자. 너무 흥분하는 거 좋지 않아. 차분하게. 차분하게.

……차분은 얼어 죽을! 젠장, 개원이 이놈은 기억만으로도 날 괴롭히는구나.

한 번 분노에 잠식되자 이번에는 수련에 몰두할 수가 없다. 이건 다 개원이 때문이다.

결국, 나는 청적으로 갔다. 떡돌이가 필요해. 떡돌이가.

온 귀인과 시침을 할 때 떡돌이가 청적에 있던 일. 그게 어떻게 된 건지나 알아보자.

그런데 막상 청적에 가서 보니 오늘은 떡돌이도 표정이 칙칙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떡돌이는 아예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몸 좀 풀었어.”

“무슨 몸을 어떻게 풀었길래?”

“생각할 게 있어서 그냥 마구 뛰었어.”

사실 마구 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둘러대고서 내가 풀밭에 털썩 앉자, 떡돌이는 황당하단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계속 그 자리에 있자 그가 미안하단 투로 사과했다.

“오늘은 떡이 없는데.”

“내가 여기에 맨날 떡 먹으러 오는 줄 알아?”

“아니었나?”

널 만나러 온 거야. 하지만 이 말을 하면 떡돌이가 오해를 하겠지? 오해를 하면 안 된다.

나는 떡돌이를 연모하는 게 아니니까, 이런 데는 선을 확실하게 그어야 한다.

“사실은 맞아.”

결국 거짓말을 하자, 떡돌이는 빙그레 웃더니 승언을 불러 지시했다.

“떡 가져와라.”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승언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떡돌이를 보았다.

떡돌이는 발치에 난 은방울꽃을 줄기째 꺾어서 종을 흔들듯 흔들고 있었다.

“넌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아닌 척하지만 표정이 어두워서 나는 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떡돌이는 “응?”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내 입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기가 굳어 있어.”

떡돌이는 덩달아 자기 입을 자기 손으로 두드려 보더니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내렸다.

그러고는 입을 닫고 생각에 잠기기에, 나는 그가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떡돌이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누님 기일이라.”

나는 손을 뻗어 그가 든 은방울꽃의 꽃망울을 툭툭 치다가 놀라서 손을 도로 내렸다.

“장공주 마마?”

전에 얼핏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아, 그런데 이거 아는 척해도 되나?

괜찮은가보다. 어두운 얼굴이지만 떡돌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아이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어두운 일이 있어 떡돌이한테 온 건데, 얘도 오늘은 어둡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머뭇거렸다.

나는 이런 데 좀 약하다. 누구를 위로해주고 그런 거. 어느 지점에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전에 연얼 군주를 위로할 때도 얼마나 민망했던가.

그러다가 내가 말 할 시기를 놓쳤나 보다. 떡돌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님을 가장 행복하게 만든 것도 가장 비참하게 만든 것도 한 사람이었지.”

“아이고. 어떡해.”

먼발치에서 승언이가 떡 그릇을 손에 든 채 여기에 안 오고 있는 게 보인다.

그는 이미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어서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는 게 분명했다.

오라고 눈짓을 보냈지만 승언이는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했다. 치사하기는!

결국 부족해도 내 선에서 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두 손을 꼭 쥐고서 떡돌이에게 상투적인 위로를 건넸다.

“힘내.”

“계란아.”

“응?”

“네게도 그런 사람이 있느냐?”

“어…… 있어.”

개원이라고, 안 그래도 어제오늘 내 기분을 돼지죽처럼 쑨 놈이 있지.

떡돌이는 내 말에 의외란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은방울꽃을 내게 건네며 물었다.

“어떻게 이겨냈지?”

“못 이겨냈어.”

이겨냈으면 어제오늘 밥도 제대로 못 먹을 리가.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면서 꽃을 받아 쥐었다.

떡돌이는 내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쓸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한 사람이 방법을 찾으면 다른 한 사람에게 말해주면 되겠다.”

가을 다음에는 겨울이 오지. 떡돌이의 쓸쓸하고 외롭던 미소 뒤에도 차가운 목소리와 시린 눈동자가 따라왔다.

“고궐 그자는 무림인이다. 아직 살아 있지. 찾아내면…… 반드시 죽여 버릴 거다. 그러면 누님의 한이 풀릴까?”

나와 떡돌이는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말하다 보니 비슷한 점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네.

아니, 나와 장공주가 닮은 건가?

하지만 장공주에겐 자신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고 울어줄 사람이 있는데, 나한텐 그런 사람은 없고…… 두 번 죽이겠단 사람만 많구나.

나는 떡돌이가 꽉 깨문 입술을 쳐다보다가 그쪽으로 손을 뻗어 입술을 구해주었다.

그러자 떡돌이는 자기 입술에 닿은 내 손을 잡고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너 같은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중얼거리자마자 손가락을 콱 깨물었지만.

“뭐 하는 거야?”

아프진 않지만 황당해서 은방울꽃으로 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내려치자 떡돌이는 손가락을 놓아 주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친구 예찬이더니, 이번에는 동생 예찬이냐.”

* * *

-‘천년비진쾌도래’라고 쓴 종이와 풍랑공의 머리카락을 묻었는데 쓰러진 후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종이를 도로 파내자 다시 깨어났지요.

타천천은 궁궐에서 온 비원의 서신을 읽다가 몹시 신경 쓰이는 부분을 발견하고 눈썹을 치켜떴다.

“후궁?”

그는 서둘러 뒷부분을 읽었다.

-혹여 풍랑공일까 싶어 확인해보았으나, 너무 무식했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계속 주시 중입니다.

타천천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주 찰나, 천년비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떠났지만.

‘후궁…….’

타천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비원이 보낸 서신을 보다가 새 종이를 꺼낸 다음 먹을 갈았다.

비원에게 그 시기가 언제인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먹을 다 갈기도 전에 부하가 찾아와 알렸다.

“단주님. 용화노가 찾아왔습니다.”

“용화노?”

타천천은 의외의 이름에 먹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에 먹물이 조금 튀자, 부하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넨 뒤 다시 뒤로 물러났다.

“예. 단주님께 긴히 드릴 말이 있다 합니다.”

“용화노라.”

타천천은 부하가 건넨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용화노는 무림 사적 중의 하나로, 별호가 묻히고 이름이 욕이 된 천년비와 달리 철저하게 별호만 알려진 인물이었다.

성이 고씨란 이야기가 은밀하게 돌긴 했으나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왜 날 찾아왔을까.”

철저하게 홀로 다닌다는 인물이?

“찾아온 이가 용화노인 건 확실하더냐?”

“개천문주의 목을 증거로 가져왔습니다.”

타천천은 의아해하면서도 손님맞이를 하기 위해 객실로 갔다.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타천천은 조금 놀랐다. 사내가 알려진 악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빼어난 미남자여서.

눈썹은 아래로 눈매는 위로 뻗은 사내는 눈 주위에 붉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얼핏 비열한 인상 같기도, 얼핏 슬픈 인상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아름답단 것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가득 찬 피비린내는 그가 옷과 눈화장뿐만 아니라, 손 역시 붉으리란 걸 짐작게 했다.

“유명한 용화노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니 기쁘군요.”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타천천은 한 마리 여우처럼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용화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건지.”

용화노는 따라 앉으면서,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하비단 단주가 영혼을 담은 강시를 만들 수 있다 들었소.”

타천천은 용화노의 얼굴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영혼을 담은 강시는 아직 그에게도 불완전한 분야였다.

심지어 사하비단 내부에도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완전히 외부인인 용화노가 어떻게 이 일을 알았을까?

“노력 중이지요. 하지만 불완전합니다. 쉽지 않더군요.”

“살려내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소.”

타천천은 빙그레 웃고서 계속 말해 보라 손짓했다.

“계속 말해 보시지요.”

“최근 사하비단이 무림과 황실을 상대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이려 들던데. 내가 원하는 사람을 살려준다면 거기에 힘을 보태주겠소.”

“그렇게 해준다면 저로선 기쁩니다만…….”

타천천의 눈가가 가늘게 휘었다.

“누구를 죽일 때 외엔 무림에 발도 안 붙이던 용화노께서, 그 마음까지 꺾고 살리려는 사람이 누군지 무척 궁금하군요.”

“신경 쓸 것 없소.”

“신경을 안 쓰면 못 살려서요.”

“…….”

“게다가 살려낸 사람이 적이어도 곤란하지요. 또 적이든 적이 아니든, 시체는 꼭 있어야 합니다.”

“시신은 내가 알아서 모셔오겠소. 적이 될 일도 없을 거요. ……그분의 적은 나 하나뿐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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