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69화 (69/283)

##  69화. 두 번이나 날 죽이고 싶어?

아니, 마차 부수는 걸 보았을 뿐인데 왜 여기서 갑자기 내 정체를 물어? 당황스럽다.

이 인간 대체 뭐지? ‘사냥개 사냥개’ 했는데 진짜 사냥개인가?

너무 놀라면 말보다 주먹이 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말보다 주먹이 나가면 더욱 곤란해지겠지. 나는 일단 고개만 열심히 저었다.

“아명이나 아호라거나.”

다행히 기몽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

깜짝이야. 영혼이 바뀌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구나.

“아닌데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내 측근 궁녀 둘도 초조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좋지 않은 분위기는 느껴지나 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염 귀인 저주 사건을 조사하면서, 염 귀인이 저주하고 싶어 했던 ‘천년비’란 이름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거 아직도 하고 있었어요?”

이 집요함이라니…… 대단하다 대단해. 다 마무리된 일인 줄 알았는데.

기몽은 ‘그러면 중간에 때려치우겠냐’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천년비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 중 행적이 아리송한 건 무림인 천년비 한 명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천년비는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요.”

“그래서 내 호나 아명이 ‘년비’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일부러 상대를 아주 얕잡아보듯 물었다. 그 정도로 어이없단 티를 내는 것이었다.

“나처럼 귀하게 자란 집 자제를, 무림인이랑 비교한다고요?”

최대한 거들먹거리면서 두 손을 펼치기까지 했는데도 기몽은 끄떡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궁 전에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 수도 있지요.”

이 편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영혼이 바뀌었단 생각까진 안 하지만 동일인이란 데까진 진짜 생각을 해냈어.

“원래는 귀인이 ‘천년비’ 본인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있어서, 염 귀인이 오해를 했을 거라 여겼지요.”

그것도 꽤 무서운 추측이네. 곱게 자란 귀족 영애를 순식간에 무림 악적과 한패로 만드는 거잖아.

“하지만 귀인께서 마차 바퀴를 떼어가는 모습을 보니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

“맞습니까? 맞는지만 알려주면 됩니다. 설령 둘이 동일인이라 한들, 귀인은 그 저주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천년비……란 무림인의 평판이 나쁘다지만 그건 지금 사건에서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똑똑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당신이 똑똑하게 둘 수 없어.

“난 입궁 전에 아주 조용하게 살았어요, 장군. 난 내 손으로 장작 한 번 안 패고 자랐다고요.”

“장작은 조용하게 안 살아도 보통 안 패고 삽니다.”

“예시를 들자면 그렇단 거예요.”

나는 흥 코웃음을 친 다음 우 귀인이 거들먹거리던 걸 흉내 내면서 손바닥을 쫙 펼쳤다.

“이봐요 기몽 장군. 내 이 상처 하나 없는 손가락을 봐요. 이게 무림인 손이에요? 이건 귀한 낭자의 손이라고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왜 표정에 변화가 없지? 젠장. 이 손을 봐! 무림 악적 할 손이 아니라고!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팔이 슬그머니 아플 즈음, 그가 제안했다.

“내공을 확인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럼요!”

* * *

무림인끼리는 괜찮지만, 이 몸은 지금 후궁인 관계로 밖에서 내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기몽은 내 손목 위에 아주 얇은 천을 올린 다음 내공을 확인했다.

“…….”

잠시 뒤. 기몽은 손을 내리고서 내게 깊숙이 허리 숙여 사과했다.

“괜한 의심으로 귀인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오해가 부끄러운지 정색을 하고서 나갔다.

하지만 나는 안심하지 못하고서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조심해야겠어. 저렇게 머리도 좋고 행동도 재빠른 수사관이 있다니. 지금은 의심을 풀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몰라.

* * *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하늘이 새카맣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수련을 못 하겠네.’

점심을 먹을 때쯤. 결국 나는 오늘은 수련 가는 걸 포기하고서 이제 반쯤 읽은 <양의억액의효과정>을 펼쳤다.

젠장. 볼 때마다 이거 이름 너무 길어. 차라리 ‘기초 서적’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으면 덜 두려울 텐데.

툴툴대지만 일단 책은 펼쳤다. 밑으로 동생 후궁들도 들어왔는데, 걔들보다 멍청하단 소리 들으면 안 되잖아?

“…….”

그렇게 얼마나 멍하게 있었을까.

“소주, 소주! 개 답응께서 오셨어요!”

부성이 처소 밖에서 외쳤다. 개시시가? 개원이 친척이?

나는 얼결에 일어났다가 인상을 구겼다. 아니, 걔가 왜 날 찾아와?

별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우중충한 날에 그 산뜻한 얼굴을 보면 개원이랑 구분이 안 가서 막 나쁜 말을 퍼부을지도 모르는데!

“들어오라 해.”

하지만 황후 친척이 한마디 했다고 시무룩 어깨 떨구고 있던 걸 떠올리니, 차마 가라고 말을 못 하겠다.

결국 같이 시무룩해져서 대답하자 바로 개 답응이 들어왔다. 오늘도 개원이 닮은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구나.

게다가 저게 뭐야?

“그게 뭔가요?”

손에 웬 알록달록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천 귀인께 인사드립니다.”

개시시는 해맑게 내게 인사를 하더니 들고 온 보따리를 자기 머리 높이로 들어올렸다.

“며칠 전에 귀인께서 절 도와주신 게 생각나 왔어요.”

그건 올 때부터 알았고, 들고 온 게 뭐냐니까.

“제가 직접 만든 수두부예요. 아주 부드럽고 고소해서, 사가에 있을 때부터 제가 이 요리를 하면 다들 바빠도 꼭 먹으러 오곤 했어요.”

“요리 잘 하나 봐요?”

“네. 잘하는 편이에요!”

개시시는 밝게 웃더니 탁자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매듭 안에서 뚜껑 덮은 커다란 그릇이 나왔다.

개시시가 직접 뚜껑을 벗기자, 그곳에는 김이 뜨끈하게 나는 하얀 수두부가 있었다. 본인 말처럼 무척이나 맛있어 보이는.

개시시는 뿌듯하게 웃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칭찬이라도 해 달란 거야?

“…….”

하지만 칭찬이 안 나가. 개원이가 딱 저런 얼굴로 나한테 독을 먹였단 말이야. 왠지 여기에도 막 독이 들어있을 것 같고 그래.

“지금은 배가 부른데…….”

결국 돌려서 거절하자, 개시시는 머쓱해하더니 다시 뚜껑을 덮으며 웃었다

“그럼 나중에 배고플 때 드세요. 식혀서 먹으면 나름대로 또 별미니까요.”

그리고는 민망해하다가 돌아가려 하기에 마지못해 붙잡고 말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차 마시고 가요.”

“그럴까요?”

바로 돌아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빈말한 거란 말이야.

* * *

탁자에 마주 앉아 있자 원웅이 재빨리 찻잔을 가져와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개시시는 뭐가 그리 좋다고 찻잔을 두 손으로 잡고서 나를 보며 한 번 더 맑게 웃었다.

그러고서 홀짝홀짝 차를 마셔대는 걸 보자, 다행히 개원의 모습이 좀 지워졌다. 얼굴이 찻잔과 손에 반쯤 가려져서.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가장 궁금한 점에 관해 물어보았다.

“개 답응은 친척 중에 무림인이 있다고 했죠?”

“네. 개원이라고, 무림에서는 조금 유명한 편이에요.”

겸손하긴. 조금 유명한 정도가 아니잖아?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나는 모른 척 마저 물었다.

“난 그런 쪽이랑은 연 관련이 없어서 그런가, 그런 얘기 좋아해요.”

“정말이요?”

“응. 그러니까 편하게 그 개……원이란 친척 얘기 좀 해봐요.”

개시시는 자기 집 개새끼를 아주 좋아하는지 사양하지 않고 온갖 좋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굴도 잘생겼다, 키도 크다, 분위기가 선인 같다, 도량이 넓다, 배포가 크다, 헌앙하다, 인기가 좋다, 별호가 ‘정영검’일 정도이다, 바르고 단정한 생활의 화신이다 등등.

좋은 말은 다 해주네. 얘는 개원이 친척인 거야 개원이 추종자인 거야?

듣고 있자니 내가 시킨 건데도 화가 나서 결국 그만두라고 말하려는 찰나. ‘내 얘기’도 나왔다.

“물론 오라버니도 실수를 할 때가 있긴 했어요. 천년비라고, 이상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

이상한 여자라니. 마음에 상처를 안 받으려면 여기서 끊어야겠지만…… 호기심을 끊지 못하고 나는 또 묻고 말았다.

“이상한 여자라니요? 그 여자도 무림인이에요?”

“네. 강하긴 강한데 사술을 익힌 흉악한 악당이에요.”

“…….”

“오죽하면 다들 기랑, 말 탄 미치광이를 별호로 불렀겠어요? 하지만 그조차 넘어서서 무림에선 이젠 그냥 그 여자 이름이 욕이에요.”

“아아. 그래요?”

수두부 엎고 싶다. 실수인 척 툭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싶어.

“네. ‘천년비 같다’고 놀리면 십년지기 친구들끼리도 기분이 상해서 싸울 정도니까요.”

나는 너무 흥분하지 않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진짜 나쁜 사람인가 보네요. 그런데 그런 여자와 사귈 정도면, 그쪽 오라버니도 똑같은 사람일 거 같은데?”

개시시는 아니라면서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이게 다 그 악적이 우리 오라버니를 홀려서 그래요. 우리 오라버니가 참 좋은 사람인데 조금 순진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뭘 모르는 사람들은 귀인처럼 말하곤 해서, 우리 오라버니도 그땐 평판이 깎였어요.”

이어서 그녀는 이게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처럼 한숨까지 푹 내쉰다.

“가족들은 다들 말렸지만, 그 악적이 뭘 어떻게 꼬신 건지 오라버니는 당시엔 가족들 말도 듣지 않더라고요.”

곧 방긋 웃었지만.

“정신을 차리고서 그 악적을 직접 처단했지만요. 덕분에 떨어졌던 평판도 다시 올랐고요.”

“예에, 좋으시겠어요.”

연인을 죽여서 평판을 얻다니 아주 잘됐네.

그런데 얘는 감정 변화가 왜 이렇게 빠른 거지? 내가 애써 빈정거리는 기를 빼고 맞장구를 쳐 주었는데, 개시시는 그새 또 어두운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악적이 살아 있었나 봐요. 오라버니는 이번에야말로 그 악적을 다시 죽일 거라고 요즘엔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대요.”

이번엔 내 얼굴도 어두워졌을 거다. 기가 막혀라.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개원이 그 독한 새끼. 날 한 번 죽인 것도 모자라서 또 죽이러 다닌다고?

걔는 대체…… 날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순간 참지 못하고 나는 수두부 그릇을 실수인 척 퍽 치고 말았다.

고소한 향이 나던 수두부는 바로 그릇째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그랑 깨져버렸다.

“귀인! 괜찮으세요?”

정성껏 준비한 요리가 엎어지고 그릇까지 깨졌지만, 개시시는 서운해하는 대신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부터 확인하며 걱정해주었다.

“손 다치진 않았어요?”

그 다정한 모습이 다시 한번 내게 잘 대해 주던 개원이와 겹쳐져서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짜 못된 새끼. 나한테 그렇게 잘 대해줘 놓고서는.

자기는 남들이 모르는 내 모습을 본다고, 나는 강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해 놓고서는.

……두 번이나 날 죽이고 싶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