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사자 친왕의 배려심
나는 황급히 떼어낸 마차 바퀴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팔딱팔딱 개구리처럼 뛰었지만, 놀란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써 마차 바퀴를 감상하는 척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면 그것 역시 불안한지라, 결국 슬그머니 바큇살 사이로 눈을 내밀어 보니 웬걸.
기몽이 ‘거기 있어’란 손짓을 하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어쩌지? 어쩌지?’
고민하다가 결국 마차 바퀴는 옆에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주했다.
기몽 앞에서 은신술을 펼 수는 없기에 당연히 은신술도 경공도 쓰지 않고 다리 힘만으로 뛰어서.
그래도 사람들 눈엔 후궁 복장으로 이 속도를 내는 게 놀라운지, 주위에서 “저게 뭐야?”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데 너무 뒤만 신경 쓰며 달린 탓이었을까. 얼굴을 가리고 가끔씩 땅만 보며 뛰다가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양해해요!”
당황하긴 했지만 나는 얼른 균형을 잡고서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쪽에서 대번에 나를 알아보고 붙잡았다.
“천 귀인?”
아는 목소리인데? 누구더라?
나는 멈춰서서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아. 사자 친왕이잖아?
하필 만난 게 사자 친왕이라니.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니, 사자 친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귀인. 왜 그러고 계십니까?”
“그게…….”
후궁 후보, 그것도 황후 가문 사람의 마차를 부수다가 기몽한테 딱 걸렸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내가 계속 얼굴을 가리고 우물거리고 있자, 의아한 얼굴로 기다리던 사자 친왕이 갑자기 놀라 물었다.
“귀인. 혹시 우십니까?”
어?
“폐하께서 새 후궁을 받아들여서…….”
하지만 사자 친왕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몽일거야!
“날 봤단 말은 하지 말아줘요.”
여기서 사자 친왕과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작게 속삭이고서 다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뛰었다.
* * *
“가엾군.”
팔랑팔랑 뛰어갈 때마다 치마 끝 단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눈 깜짝할 사이 저만치 멀어진 천 귀인을 보며 사자 친왕은 혀를 찼다.
곁에 있던 그의 시종은 사자 친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의아해 물었다.
“뭐가 가엾단 겁니까, 전하? 그냥 좀 이상한 분 같은데요.”
“후궁은 후궁 선발식을 보면 안 되지 않느냐.”
“그렇……죠?”
“그리고 천 귀인은 얼굴을 가리고서 울며 달아나고 있고.”
“그러네요.”
“이 두 개를 조합하면 딱 답이 나오지 않느냐. 폐하가 어느 후궁을 뽑는지 궁금해서 몰래 보다가, 못 참고 울면서 뛰어가는 거다.”
“아아. 천 귀인은 정말로 폐하를 많이 사모하시는군요.”
사자 친왕은 뒷짐을 지고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가 보다. 안타깝구나. 적당히 권력과 출세의 계단 정도로 여기는 게 마음 편할 텐데.”
사자 친왕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시종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피고서 “전하.” 하고 작게 다그쳤다.
“그런 소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들은 사람은 너뿐이지 않으냐.”
“그래도요.”
“이 말이 퍼져나가면 네 짓이라 여기면 되지.”
사자 친왕이 웃으면서 하는 소리에 시종이 너무하단 듯이 쳐다보았으나, 그는 더 별말을 하지 않고 휘적휘적 가던 길을 걸어갔다.
* * *
후궁 선발식 날 늦은 저녁.
황제가 부름을 받고 도착하자, 태후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음식을 먹으라 권하며 물었다.
“아드님은 이번에 뽑은 후궁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황제는 숟가락을 들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늘 그렇듯 없습니다, 어머님.”
“천 귀인을 뽑았을 때도 아드님은 별 관심이 없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지금처럼 총애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들어온 후궁 중에도 그런 후궁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너무 처음부터 벽을 치진 말아요.”
그래도 황제가 별 감흥이 없어 보이자, 태후는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까보다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 가문에서 들어온 온 귀인이 천 귀인과 비슷해 사랑스럽더군요. 그 아이는 어떻던가요? 내 눈엔 귀여워 보이던데.”
“그러면 어머님, 온 귀인에겐 어머님과 가까운 처소를 주면 되겠습니다.”
태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쳐다보자, 황제는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철없던 시절의 태자처럼 웃었다.
“노여워하지 마세요, 어머님. 하지만 천 귀인이 있는데 뭐하러 비슷한 사람을 고릅니까.”
“…….”
“사실 소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황후야 자기 가문 사람이니 누가 오든 뽑았겠지만, 어머님께선 왜 그 여자를 뽑은 겁니까?”
태후가 그 여자를 뽑은 이유는 온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천씨 가문에서 보낸 세 자매를 모두 다 뽑아준 것처럼.
하지만 황제가 저렇게 말하자, 태후는 괜히 기분이 상해서 퉁명스럽게 비꼬았다.
“아드님이 우울한 인상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요.”
“천 귀인은 우울한 인상이 아니라 그윽하고 아련한 인상인 겁니다, 어머님.”
저놈의 콩깍지는 두텁기도 하지. 태후는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돌렸다.
“그러면 그 개시시, 개 답응은 어떻던가요? 새로 들어온 후궁 중엔 군계일학으로 아름답던데.”
“아름답기야 연비를 따라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얼굴을 보고 총애할 거였다면 뭐 하러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 했겠습니까.”
“얼굴뿐만이 아닙니다. 개 답응의 가문은 문무 모두 출중해서, 친척 중엔 무림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청년도 있다더군요.”
“소자는 무림인이 싫습니다, 어머님. 그자들은 무공을 익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죽고 죽이고, 내 백성들은 법을 지키면서도 칼의 눈치까지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결국, 달래다 못한 태후는 자신도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면서 눈살을 구겼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뭐가 좋단 겁니까?”
“상소문을 쓸 때 끝에 한 획을 더 붙여 둥글게 표현할 줄 아는 배려심?”
“무슨 헛소립니까.”
* * *
새 후궁들이 들어오면 당분간은 그 후궁들을 잘 챙겨줘야 한단 태후의 당부를 몇 번이나 들은 월요 황제가 태후전을 나와 자신의 침전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마침 반대편에서 사자 친왕도 그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를 발견한 황제가 멈추어 서자, 사자 친왕은 얼른 방향을 바꾸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를 뵈러 가던 길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사자 친왕이 사람들을 물려 달란 눈치를 보내자, 황제가 손을 저었다.
신호를 알아챈 궁인들이 오원요만을 제외하고 다들 거리를 벌리고 서자, 황제가 말해보라고 손짓했다.
“천 귀인에 관련된 일입니다.”
“천 귀인?”
“천 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냐.”
“천 귀인이 폐하께서 후궁들을 선발하는 동안 흐느끼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자 친왕이 자신에게 천 귀인에 대해 할 말이 뭔가 궁금해하던 황제는, 뜻밖의 소식에 황당해서 되물었다.
“울면서 뛰어다녔다고?”
사자 친왕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었으나, 그 표현을 들은 황제의 머릿속엔 그리 애달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폐하께서 새 후궁을 들인다니 서러웠나 봅니다.”
“!”
“오죽하면 체면도 안 차리고 그러고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 잘 좀 위로해 주세요.”
사자 친왕이 ‘난 참 배려심이 좋아’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고 떠나자,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오원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 귀인의 처소로 가시겠습니까, 폐하?”
* * *
기몽이 날 보았을까? 아니, 본 건 확실한데 그게 나란 걸 알까?
멀리서 봤으니 헷갈릴 것 같긴 해. 후궁들 복장이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아니, 하지만 그 동그래진 눈이 너무 걸리는데…….
내일 기몽이 사람을 보내서 날 부르면 어쩌지?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불러? 마차를 부쉈으니 부르지. 젠장!
그런데 초조하게 발을 흔들고 있으려니, 부성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와 서랍에서 진주 장식을 꺼내며 말했다.
“소주, 소주! 폐하께서 오셨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부성은 화급히 내 머리에 진주 장식을 재빨리 꽂고 옷을 정리하더니, 슬그머니 나를 문으로 밀었다.
이야. 수사방 한 번 다녀오더니 훨씬 재빨라졌잖아?
어쨌든 황제가 왔다니, 나는 시무룩한 마음을 감추고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한 다음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황제가 의자에 앉으면서 내게 말하지 않는가.
“다 들었다.”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심장은 고슴도치를 깨문 물총새처럼 펄떡였다.
기몽 이 개새끼. 그새 다 말한 건가? 나한테 왜 안 오나 했더니 바로 황제에게 가서 말했어?
내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황제는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더니 탁자에 두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진지한 얼굴을 보니 분명해. 기몽이 다 고자질한 게 틀림없었다.
“해명하고 싶어.”
나는 얼른 황급히 말했다.
“이게 해명까지 해야 할 일이냐.”
세상에. 해명을 들을 생각도 없다니. 화가 많이 났나?
새로운 후궁들을 맞이할 생각에 아주 기뻤는데, 내가 그 후궁들을 입궁하기도 전부터 괴롭혔다고 생각하나?
나는 충격을 받아 그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꽃 주면서 연모한다더니. 그 꽃 벌써 다 시들었냐?
“괜찮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난 네 마음을 안다.”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말은 따스했다. 날 탓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내 마음을 안다고?
“용서……해주는 거야?”
거기에 조금 용기를 얻어 묻자, 떡돌이는 나직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게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이야?”
“……그래? 그런 거야?”
“물론이지.”
“내가 이상하지 않아?”
네 후궁의 마차를 부쉈는데?
하지만 황제는 내가 이렇게까지 묻는데도 아주 태연히, 대인의 풍모를 풍기며 대답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 다른 후궁이 들어올 때 너처럼 행동한 후궁이 없던 것도 아닌걸.”
“진짜?”
“그래.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른 후궁들도 몰래 뒤에서 마차를 막 부수고 그러는구나.
하긴. 몰래 이상한 독도 보내는데, 마차 부수는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
생각해보니 떡돌이의 말이 맞다. 아주 드문 일이 아니니까, 기몽도 놀라긴 했지만 나한테 그 일을 따지지 않은 게 분명해.
기몽이 놀란 건…… 그러니까 그거겠지. 나는 태감을 안 시키고 직접 마차 바퀴를 떼서.
어쨌든 그 말을 들으니 훨씬 안심이 되어서 나는 활짝 웃었다.
“다행이야. 하긴. 다리 한 짝 없어도 돌아가는 데 문제없긴 해.”
내 미소를 본 황제도 같이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3초 정도는.
“어?”
“응?”
잠깐 서로를 응시하기를 1초 정도. 황제가 뜨악한 얼굴로 외쳤다.
“누구 다리를 뗐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