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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65화 (65/283)

##  65화. 닮은 사람이 둘이나!

“마마, 규빈이 왔습니다!”

내무부에 간다던 궁녀가 황급히 돌아와서 작은 목소리로 알리자, 영빈은 병법서를 덮고 일어섰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규빈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요?”

규빈은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으나 영빈은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몰라서 묻나요?”

그 태도를 본 규빈은 더욱 화가 나서 평소보다 배로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일부러 날 함정에 빠뜨린 거죠? 일부러 날 거기로 보내서……!”

“내가 가라 했나요?”

“뭐라고요?”

“소여 언니가 화화정에서 폐하와 만나기로 했단 이야기를 내가 해준 건 맞아요. 하지만 난 내 언니가 폐하께 총애를 받으니 기뻐서 한 말이었어요.”

“!”

“규빈이 내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곳에 달려갈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걸 말이라고……!”

“규빈이야말로 소여 언니를 방해하기 위해 바로 달려간 거면서. 일이 잘못되니 오히려 내게 큰소리를 치네요.”

영빈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규빈을 사정없이 때려대자, 규빈의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영빈의 말이 또 틀리진 않아서 규빈은 확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잘 가요, 규빈.”

영빈이 뒤에서 공손하게 인사했지만, 그조차 규빈은 화가 날 뿐이었다.

규빈의 측근 궁녀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영빈의 처소 쪽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보았다.

“어쩌면 웃으면서 말을 저렇게 재수 없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심증은 있지만 확증이 없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말로 화가 나는구나.”

“마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조용히 기다리면 복수할 기회가 올 거예요.”

“그래야지.”

규빈은 주먹을 꽉 쥐고서 이를 으득 갈았다.

“천귀인도 이 일에 관여했을까요?”

“천소여는 맹해서 그럴 머리도 없다.”

“하긴. 그건 그래요. 이번 일로 자기 밑에 배신자가 누군지 알았는데, 그걸 또 폐하께 청해 용서하고 데려왔다잖아요.”

“반드시 영빈에게 이 일을 돌려줄 거다. 반드시.”

* * *

서책을 읽기 싫어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때였다. 원웅이 화병에 보라색 꽃을 잔뜩 담아서 가지고 들어왔다.

“그거 붓꽂 아니야?”

이름을 아는 꽃이라 묻자 원웅은 활짝 웃더니 방 안 여기저기를 살피며 히히 웃었다.

“폐하께서 보내신 거예요, 소주. 어디에 둘까요?”

“떡……하가?”

“예?”

웬일로 꽃을 보냈대. 떡을 안 보내고? 떡돌이만이 아니니 정체성을 바꿔 보려는 건가?

“소주, 침상에 장식해 드릴까요?”

그런데 원웅과 방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꽃을 여기 두어 보고 저기 두어 볼 때였다.

황후의 장태감이 오더니, 황후가 나를 부른다고 했다.

“황후 마마가 날? 왜?”

“그건 저도 잘…….”

넌 알겠어? 도움을 구하기 위해 눈치 빠른 원웅을 보았지만, 원웅도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언제 오라 하셨는가?”

어쨌든 황후가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는지라 묻자 황후의 태감이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갑자기? 무슨 일이지?

* * *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원웅을 데리고 대중궁으로 갔다.

그런데 방 안에 들어가 보니 황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후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야, 저 사람? 태감……은 아닌데. 남자다.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를 올리고서 내가 연신 그 사람을 힐긋거리자, 황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 사람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미안하구나, 천 귀인. 내 부친이시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얼른 그 사람에게도 인사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해도 되나? ……아닌가 보네. 표정 안 좋은 거 보니.

바로 웃는 낯으로 바꾸긴 했지만 분명 표정이 안 좋았어.

“좌칙승상 온원입니다, 천 귀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뵈니 참으로 반갑군요.”

그리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보다 황후는 왜 자기 아버지가 있는데 날 부른 거야? 날 불렀는데 아버지가 온 거야, 아버지가 있는데 날 부른 거야?

나는 슬그머니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 마마. 황후 마마와 온 승상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닐지요?”

대답은 온 승상이 대신했다.

“황후 마마께서 천 귀인을 부른 걸 모르고 내가 와버렸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미안하게 됐군요.”

“아.”

황후가 날 먼저 부른 건가 보다. 그보다 이러면 어떻게 해? 눈치껏 그래도 내가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왜 불렀냐고 물어보긴 해야 하나.

어색하게 서 있자니, 황후는 나한테 줄 게 있다면서 궁녀를 불러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됐으니 ‘그것’을 가져올 때까진 여기 있어야겠네. 불편한데.

하지만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천 귀인이 영명하단 이야기는 황후 마마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요.”

셋이 어색하게 서 있자니 온 승상이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네에, 하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온 승상은 칭찬에서 그치지 않고 내게 떠보듯 질문을 던졌다.

“천 귀인께선 후궁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게 무어라 생각합니까?”

그런데 그게 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걸 나한테 왜 물어봐? 이상한 사람이네.

하지만 황후의 아버지인데 질문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

“비상한 눈치죠.”

그래서 일단 대답하자, 웬걸. 온 승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질문을 던졌다.

“태후마마와 황제 폐하의 의견이 다르면 천 귀인께서는 누구의 편을 들 겁니까?”

“태후마마요.”

“어째서요? 천 귀인은 폐하의 후궁이 아니십니까?”

“근데 태후마마가 더 세잖아요.”

“이렇게 대답을 잘하시는 걸 보니 천 귀인께선 서책을 가까이 하나 보군요.”

“늘 베고 자고 있지요.”

건성으로 한 대답인데도 온 승상은 흐뭇하게 웃었다.

좀 제대로 대답할 걸 그랬나? 아까 날 매섭게 쳐다보던 것 같아서 일부러 대충 말했는데.

뭐라 말해도 웃어주니 내가 너무했나…… 싶기도 하네.

하지만 대답을 번복할 새도 없이, 황후의 궁녀가 꽁꽁 싸맨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와 내게 내밀었다.

원웅이 얼른 나서서 그걸 대신 받아들었다.

이게 뭐예요, 하는 눈으로 황후를 보자 황후가 자애롭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며칠 전 천 귀인이 속상할 일이 있었다지. 위로가 될까 싶어 준비했다. 처소에 가서 먹도록 하거라.”

먹는 건가?

* * *

천 귀인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나가자, 온 승상은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서 황후에게 당부했다.

“방금 제가 한 질문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후궁 선발 때 은연이에게 그대로 질문하시면 됩니다.”

황후는 상에 앉아 무겁게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은연이를 보낼 겁니까?”

“딱 보자마자 은연이 생각이 났습니다. 눈썹을 아래로 내려 다듬고 머리 모양도 비슷하게 하면 제법 비슷해 보일 겁니다.”

“…….”

“전 은연에게 답변을 알려주고 외우라 하지요.”

온 승상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멍청한 답변이지만 어쩌겠습니까. 폐하께서 저런 멍청한 걸 좋아한다면 맞춰 드려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도 황후가 어두운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자,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온 승상이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황후는 솔직하게 물었다.

“은연은 욕심이 많은 아입니다, 아버님. 그 애가 폐하의 총애를 받고서 기고만장해져 아예 제 자리를 노리면 어떻게 하지요?”

하지만 온 승상은 황후의 질문을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단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바로 정색했다.

“친척은 친척이고 황후 마마는 내 딸입니다. 은연이 헛된 생각을 했다간 그 애 아비를 가문에서 쫓아내 버릴 테니 염려 마시지요.”

* * *

후궁 선발식이 가까워져 올수록 다들 더더욱 바빠져서 행사도 사라졌다.

떡돌이도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지고, 황후 마마 역시 당분간 문안을 오지 말라고 통보를 할 정도였다.

규빈이 황제한테 찍힌 일로 후궁들도 다들 몸을 사려서, 요즘은 음식에 이상한 게 든 채 운반되는 일도 사라졌다.

덕택에 나는 시간에 여유가 생겨서 몇 주간은 본격적으로 무공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후궁을 선발하는 날.

원칙적으로 후궁들은 그 자리에 갈 수 없지만, 나는 은신술을 펼쳐 후궁을 선발하는 그 자리로 가 보았다.

별로…… 황제가 어떤 후궁을 들이는지 상관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이 다가올수록 후궁들이 좀 시무룩해 하고, 원웅과 부성도 힘이 빠지고, 심지어 염 귀인마저도 술을 퍼붓듯 마셔대기에 궁금해서 온 것일 뿐.

나는 커다란 기둥과 대들보 사이에 자리를 잡고서, 후궁 선발 과정을 지켜보았다. 보자…….

‘아. 저렇게 하는구나.’

떡돌이랑 황후, 태후마마 이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앉고, 후보들은 그 앞에 줄지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오 공공이 이름을 부르면 그 후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떡돌이랑 황후, 태후마마가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대답을 다 한 다음에는 다시 자리에 앉고.

‘천소여도 저렇게 통과했다면 머리가 나쁘진 않았겠네.’

나는 저런 거 잘 못 하는데.

그런데 저기 저 후궁은 어째 좀 개원이를 닮았잖아.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닮았네.

개원이한테 쌍둥이 누이가 있으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다.

미안하지만 얼굴에서부터 불쾌한 기운이 몰려오는데? 안 뽑혔으면 좋겠네.

게다가…… 이름이 개시시래. 성까지 같으니 더 꺼림칙해.

“비상한 눈치가 필요하지요. 여러 후궁이 많고 황후 마마와 폐하, 태후마마께도 예를 다해야 하니, 눈치가 좋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원이를 닮아 어쩐지 기분 나쁜 개시시를 집중해 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답변이 들려왔다.

개시시에서 시선을 떼고 후궁들을 전체적으로 쭉 보자, 마침 일어서서 답변 중인 한 후궁 후보가 눈에 들어오는데…….

와, XX, 저건 또 뭐지? 저건 나랑, 아니, 천소여랑 아주 빼닮았잖아?

머리 모양이야 그렇다 쳐도 우울한 눈썹까지 쏙 닮았어. 저럴 수가 있나?

황당해하는 사이 황후가 다시 물었다.

“태후마마와 황제 폐하의 의견이 다르면 중간에서 어떻게 할 게냐.”

“태후마마를 편들겠습니다.”

“어째서?”

“태후마마는 황제 폐하의 모후이시니, 제게도 효를 다해야 할 분이십니다. 저는 자식 된 도리로 태후마마를 편들 것입니다.”

“서책을 가까이하느냐?”

“부끄럽지만 늘 베개로 쓰고 있습니다.”

돌 던질 뻔했다.

대답이 좀 더 격식 있어지긴 했지만, 저건 분명 내가 얼마 전에 황후 앞에서 황후 아버지에게 한 대답들이었다.

질문부터가 황후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들이고.

황후랑 황후 아버지가 짜고서 내 대답을 가져간 건가?

‘와…… 부녀가 쌍으로 짜증 나네.’

그러면 저 대답하는 사람까지 셋이서 한패겠지? 화가 나는데, 태후마마는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말하는 게 재미있구나. 천 귀인과 잘 통하겠어. 그렇지 않습니까, 아드님?”

황제는 거기에 또 대답을 하는데.

“말하는 게 아주 조금 비슷하군요.”

그러고 있으니 더 싫다.

‘황후와 승상이 선발 과정까지 조작할 정도면 저 천소여 닮은 여자는 분명 뽑히겠지.’

결국, 더 지켜보기도 싫어져서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돌아섰다.

그러다가 선발식에 온 후궁들의 마차가 모인 곳에 왔는데.

마침 그곳에서 거대하고 화려한 마차 앞에 선 마부가 작고 소박한 마차 마부에게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사소한 데서부터 많은 걸 알 수 있지. 내가 모시고 온 분은 황후 폐하와 같은 가문에서 온 온 낭자라네. 어릴 때부터 영민하기로 이름이 높은 데다 무척이나 아름다우니, 곧 폐하의 성총을 한 몸에 받으실 거야.”

“어쩌란 말인가.”

“그런 조잡한 마차를 끌고 잘도 여기에 왔다는 거다.”

작고 소박한 마차의 마부가 짜증을 내면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그걸 지켜보다가 나는 잘됐다 싶어서 얼른 달려가 그 온 낭자가 타고 왔단 마차의 마부 뒤통수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그리고 마부가 기절하자마자 마차 바퀴를 하나 똑 떼버렸다.

나쁜 짓이지만 괜찮다. 악적이 목 안 떼고 바퀴 떼어가면 나름 많이 참은 거지.

그러고서 돌아서는데…….

‘망했다.’

기몽이 먼발치에서 입을 벌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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