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64화 (64/283)

##  64화. 둥근 부탁

부성이 천소여와 동귀어진할 만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이럴 수가 있나. 그럼 진짜 천소여는 원웅보다 부성이랑 가까웠나? 아니면 가까운 거랑 별개로 부성이 더 입이 무겁다 생각했나?

“소주, 어쩌죠?”

원웅이 초조하게 나를 보았다. 어쩌냐고? 어쩌긴 어쩌겠어.

“수사방이 어디야?”

* * *

규빈은 탁자 앞에 앉아 초조하게 찻잔 위에서 손가락을 마구 움직였다.

치마 안에서 이리저리 발가락을 까딱거리느라, 옷에서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라리 황제가 뭐라고 말이라도 시원스레 해주면 좋을 텐데.

찾아와 놓고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니 더 갑갑하고 두려웠다.

“폐하.”

결국 견디다 못 한 규빈이 어렵게 입을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가 말했다.

“널 벌할 일은 아니지만 네게 실망할 일은 맞다.”

규빈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오해십니다. 페하께서 그곳에 오시리란 이야기를 듣고 간 건 맞지만, 저는 천 귀인의 궁녀를 제 사람으로 포섭하지도, 천 귀인의 행적을 살피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누가 전했지?”

황제의 질문에 규빈은 초조해졌다.

영빈이다. 이야기를 전해준 건 영빈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황제가 과연 말을 믿어줄까? 황제의 마음이 영빈 쪽에 쏠려 있다면, 그는 규빈이 영빈을 무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런 물증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특히.

규빈은 입술을 짓씹었다.

* * *

“역시 함정이었구나.”

궁녀에게 이 소동을 전해 들은 영빈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이게 함정인 걸 알아차리셨나요?”

궁녀는 영빈의 침착한 태도에 감탄했으나, 영빈은 조금도 으쓱해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거울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부성에게만 비밀을 알려주었다기에 함정인 걸 알았지.”

영빈은 좌경 앞에 앉아 조금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꾹 집어넣었다.

“게다가 함정이 아니어도 안 나갔을 거다. 이번에 또 폐하와 언니가 만나는 걸 방해하면 폐하가 불쾌해하실 테니.”

궁녀는 얼른 영빈의 뒤로 가서 머리를 다듬어 비녀를 꽂으며 칭찬했다.

“마마께선 정말로 영민하세요.”

“별로.”

“정말이에요. 하지만 아깝게 되었네요. 부성이 이것저것 도움 될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는데.”

* * *

나는 원웅을 데리고서 곧장 수사방으로 갔다.

수사청에는 몇 번 갔지만 수사방에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수사방은 후궁들이 모여 사는 동쪽 궁궐과는 분위기는 물론 수사청과도 분위기가 확 달랐다.

냉궁의 그 어두침침하고 황량한 분위기와도 다른 분위기……와도 다른 듯 비슷한 듯?

“천 귀인, 무슨 일이신지요?”

거기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한 태감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날 ‘천 귀인’이라 부르는 걸로 보아 내 얼굴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면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되겠네. 잘됐어.

“여기에 부성이란 궁녀가 잡혀 왔지?”

내가 질문하자 태감이 얼른 대답했다.

“예. 곧 수사에 들어갈 겁니다. 염려 마시지요, 천 귀인. 누가 배후인지 왜 귀인을 배신했는지 철저하게 알아낼 테니까요.”

그걸 염려하는 거야! 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

“폐하께서 내가 원치 않으면 부성을 빼주겠다 하셨어. 우선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으니 부성을 내게 주게.”

하지만 태감은 내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천 귀인. 귀인께서 거짓을 말씀하시진 않겠지만, 그 궁녀는 폐하의 명으로 잡혀온 것이라 폐하께서 다시 명하시긴 전엔 빼내기가 어렵습니다.”

“내 궁녀인데?”

“예. 그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젠장!

원웅이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어쩌죠, 소주?”

어떡하기는.

“폐하께 가 봐야겠다.”

* * *

이제는 내가 지나가도 그러려니, 하는 대신들 사이를 지나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황제가 자주 데리고 다니는 태감이 나를 보고서 아는 척을 했다.

“오 공공. 폐하께서 안에 계시오?”

내가 다가가며 묻자 오 공공은 ‘또 당신이냐’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마침 폐하께선 막 들어오셨습니다, 귀인.”

“폐하를 뵐 수 있을까?”

“얼른 여쭙고 오지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던 태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고맙소.”

원웅을 두고서 나는 얼른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종이들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잠시 내쪽을 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오늘은 떡 준비가 안 됐는데. 어쩌지?”

“준비성이 없네.”

바로 고개를 도로 들었지만.

그는 끙 소리를 내더니 종이들을 도로 덮어 옆으로 치웠다.

“그거 뭐야? 재밌어?”

올 때마다 저런 거 늘 보고 있는 거 같아.

다짜고짜 볼일부터 말하면 정이 없어 보일까 봐 나는 일부러 그에게 다가가면서 좀 호기심을 느낀 척 물었다.

“재밌어서 보진 않지.”

“뭔데?”

“상소문.”

“상소문엔 무슨 내용을 써?”

“억울한 얘기를 쓰지. 아니면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요청하거나.”

오. 이런 식으로 끌고 가려던 건 아닌데, 마침 딱 내 볼일과 비슷하구만?

“그럼 나도 써도 돼?”

“억울한 일이 있어?”

“아니, 청할 게 있어.”

“말로 하면 되잖아?”

“옆으로 비켜봐.”

황당해하는 황제에게 다가가서 쿡쿡 몸으로 그를 밀자 그가 마지못해 물러났다.

“빈 종이 써도 돼?”

내가 얼른 의자에 앉자 황제는 빈 종이를 가져다 앞에 펼쳐주었다.

하지만 곧 자기도 내 상소에 호기심이 드는지 뒷짐을 지고서 웃으면서 내려다본다.

“그래, 써 봐라 천 귀인. 어디 뭘 상소하고 싶은지 한 번 보자. 멋지게 적어봐.”

“기대에 부응할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서체가 반듯하다.

내가 글씨를 써서 내 보이면 개원이는 늘 감탄사를 뱉으면서 족자로 만들어 걸어두고 싶다고 했지. 어쩌면 실제로 걸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정도로 명필이었다.

“나 글씨 잘 써.”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하는 투로.

얘가 얘가, 사람을 막 무시하고 그러네.

“진짜야.”

“쓰고 얘기해.”

못되게 말하는 그를 슬쩍 흘겨보고서 나는 오른손에 붓을 쥐고 왼손으로 소맷자락을 잡은 다음 종이 위에 글씨를 썼다. 자. 봐!

-도와줭

“!”

마지막에 ‘줘’가 아니라 ‘줭’이라고 쓴 건 한 시진도 지나기 전에 말을 바꿨으니 조금 민망해서 둥글게 둥글게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황제를 보았다.

“어때?”

황제는 내가 쓴 글씨를 잠시 멍하니 보더니 몹시 놀라워하며 탄성을 뱉었다.

“정말로 글씨만 잘 쓰는구나.”

“그치?”

“마지막 글자에 한 획이 더 붙은 거 같은데. 이건 뭐지?”

“왜, 부탁을 할 때는 말을 둥글게 하라고 하잖아. 그래서 둥글게 해봤어.”

“그렇군. 둥글다면 제대로 둥글긴 한데…….”

“도와줄 거야?”

황제는 입술을 꽉 다물고서 얼굴을 이상하게 구기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도와줭. 도와줭.”

도와주기 싫은가, 싶어서 내가 붓 꽁다리로 그의 등을 쿡쿡 찌르자, 황제는 그제야 다시 몸을 돌리면서 내 머리를 양 손으로 붙잡더니 내 이마에 대고 자기 이마를 미친 듯이 비비기 시작했다.

놀라서 박치기를 할 뻔했다. 그래도 꾹 참아주고 있자니 그는 고개를 들고서 눈가를 자기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난 널 보면 미칠 것 같다. 알아?”

“나한테 의외의 면이 있지. 내가 너무 강하니까 다들 그래. 내가 글씨는 못 쓸 줄 알아. 하지만 나는 글씨도 잘 써.”

근데 떡돌이 얘는 왜 울고 있어? 이보세요. 이보세요. 나 도와줄 거냐고.

그의 옷자락을 슬쩍슬쩍 잡아당기자 황제는 다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상소문에는 ‘도와줘’라고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뭘 도와달라는 건지, 왜 도와달라는 건지 정도는 적어야지. 무작정 도와달라고 쓰면 짐이 어찌 알고 도와주느냐.”

“그런 거야?”

“그래.”

“…….”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둥글게 부탁하니 거절할 수가 없군. 말해봐. 뭘 도와줄까?”

“저기, 부성이 있잖아. 역시 빼내주면 안 될까?”

“왜? 처벌해도 상관 없다더니.”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좀 신경이 쓰여서. 부성이는 나랑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거든. 실망하긴 했지만 이런 일로 내치고 싶진 않아. 수사방에 가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냥 내 선에서 혼내고 끝내고 싶어.”

“너무 마음이 약한 거 아닌가.”

“한 번만 넘어가 주면 안 될까?”

* * *

상에 앉아 딸기를 반 접시 정도 먹었을 때였다.

밖에서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에 원웅에게 눈짓을 보내자, 맞은편에 서서 같이 딸기를 먹던 원웅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원웅은 엉엉 우는 부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원웅에게 문을 닫으라 하고서 부성을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아직 제대로 수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거칠게 다뤘던지, 부성은 옷이 다 구겨진 데다 흙투성이 먼지투성이였다. 어디 광 같은 데 가둬둔 건가?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내가 단호하게 묻자 부성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엉엉 울면서 흐느꼈다.

“용서해주세요, 소주. 전 절대로 소주를 배신한 게 아니에요. 저는, 저는 그냥…….”

“내 일정을 영빈이랑 연비한테 다 가져다 바쳤어?”

부성은 숨이 넘어갈 듯이 더욱 세게 울었다.

“죄송해요, 소주. 저는 세 자매 모두 폐하의 총애를 받아야 천씨 가문에 득이라고 생각했어요. 절대로 소주를 배신할 마음이 아니었어요. 제가 멍청했어요, 소주.”

이제 됐겠지, 싶어서 나는 부성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알았어. 일어나. 앞으론 그러지 마.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는 거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부성은 얼른 발딱 일어나더니 흐어어엉 울면서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소주. 정말로 감사해요. 소주께선 제 목숨을 구해주시고, 화나실 텐데도 절 너그럽게 용서해주셨어요. 소주가 절 구해주셨으니 저는 이제 평생 소주만의 사람이 될게요. 소주께 이 은혜를 꼭 갚을 거예요!”

저 말을 다 믿어도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 볼일은 다른 거지.

“좋아. 그러면 부성아.”

천소여가 너한테 무슨 은밀한 지시를 했니?

나는 질문을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내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원웅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란 건가? 그런 거 같은데?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엔 원웅이 내게 알려준 내용도 있는지라, 나는 부성에게 우선 씻고 쉬라고 지시한 다음 원웅을 불러 물었다.

“말하지 말란 거야?”

원웅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네. 지금 소주께서 부성에게 그 일을 물어보시면, 부성을 용서해 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구해주신 게 티가 나잖아요.”

“아.”

“지금 부성은 소주께 몹시 감사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소주가 자길 구해주었단 걸 알게 되면 감사함은 도로 사라지고, 오히려 그걸 약점으로 쥐려고 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아.”

그런 건가? 모르겠어. 난 이런 건 잘 모르겠어.

“그럼 평생 물어보면 안 돼?”

“당연히 되죠. 하지만 부성이 이 일을 잊어갈 즈음, 기억이 좀 돌아오는 것처럼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