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네가 배신자였구나
동쪽 구역과 북쪽 구역 사이로는 ‘겨울이 오는 길’이라 하여 동로라 부르는 긴 산책로가 있었다.
산책로인데도 거의 꽃을 심지 않아서, 겨울이 와도 말라죽은 꽃나무를 볼 일은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겨울 선인들도 한 번 내려와 거닐어보고 싶을 정도로 눈이 켜켜이 쌓여서, 그 이름처럼 겨울이 되면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하지만 겨울에 아무리 아름다워도 봄과 여름, 가을에는 무척 삭막한지라, 이런 봄에는 동로를 산책하는 사람이 적었다.
황후는 그런 길을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이 번잡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산책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서였다.
‘천 귀인 닮은 친척을 찾아내면? 천 귀인 닮은 친척이 입궁시켜서 폐하가 그 여자를 총애하게 되면? 그 후에는? 그 후에는 뭘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가.’
다른 후궁들은 총애를 받더라도 1공 15귀 온씨 가문 출신인 그녀와 상대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가문 출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배경과 힘이 비슷하단 거니까.
새로 입궁할 친척이 가문을 위해 자신과 뭉치려 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녀가 만약 힘을 합치기보다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한다면?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안 하셨나?
황후는 아버지가 보낸 서신에 연달아 의문을 퍼부었으나, 혼자 생각해 보았자 사가에 있을 아버지가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가고 있자니 황제가 용 조각상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폐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으나 황제를 모른 척하고 갈 수는 없어서, 황후는 표정을 관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황제 역시 조각상을 뚫어져라 보다가 황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음?”
하지만 황제 곁으로 다가온 황후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기웃하더니, 곧바로 아까와 다른 태도로 말했다.
“넌 폐하가 아니로구나.”
“!”
“산책하고 있느냐.”
얼굴을 검은 면사로 가리고 서 있던 가짜 황제, 연금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는데 황후가 자신을 알아보자 신기한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아셨습니까?”
“알려주지 않으련다.”
“?”
“가르쳐주면 다음엔 그 부분을 고칠 게 아닌가.”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장난기가 보여서 연금은 저도 모르게 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례하다고 호통을 들을까 염려된 그는 웃자마자 황후의 눈치를 살폈지만, 황후는 얇은 얼음을 얹은 것처럼 차가운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보다가 연금이 입을 열었다.
“일전 문안 때 일을 사과하고 싶습니다.”
“문안 때?”
“우 귀인이 넘어졌을 때요. 황후마마께 ‘다른 후궁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황후는 한 명을 함께 괴롭히면 안 된다’고 말씀 올렸지요.”
“아. 그때 일 말인가.”
“송구합니다.”
”되었나. 너는 네 역할에 몰입했을 뿐이니.“
말을 마친 황후가 다시 산책로를 걸어가 점점 멀어지자, 연금은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황제와 몇 번이나 거듭해 상황을 정리하고 말을 맞춘 다음, 우리는 내 처소까지 같이 이동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연신 힐긋거렸지만, 떡돌이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 처소에 도착하자, 궁인들이 황급히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는 동안 떡돌이는 내 손을 잡고 작지 않은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내일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알았느냐?”
“그럼요!”
황제가 돌아가자 궁인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일어나도 좋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들은 어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세상에! 소주, 폐하와 약속도 하시는 거예요?”
“폐하께서 내일도 소주를 만나신대요?”
“바래다 주시기까지 하다니. 폐하는 정말 소주에게 푹 빠지셨나 봅니다!”
다들 내가 황제와 있었던 이야기를 신이 나서 털어놓을 거라 여기는 눈치들이었다.
하지만 안 되지.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은 안 된다.
“내일 약속이 있어. 그런데 알려주진 않을래.”
“예? 정말요?”
“비밀 약속이신가 봐요?”
원웅과 부성은 서운한 듯했지만, 알려달라고 마구 조르진 않았다. 나는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목욕을 할 때, 원웅이 옷을 가지러 간 사이 목욕 시중을 해주는 부성에게만 살짝 알려주었다.
“너만 알고 있어야 돼. 폐하와는 내일 화화정에서 미시에 만나기로 했어.”
부성은 ‘별 비밀도 아니지 않나?’ 하는 얼굴이었으나, 내가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자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목욕 후 침실에서 원웅과 둘만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아까 부성에게 한 것과 다른 말을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줘. 내일 청적에서 폐하와 미시에 만나기로 했어.”
그런 식으로 귀자에겐 희완각이라 했고, 다른 궁인들에게도 각기 시간만 같은 다른 장소를 비밀이라며 귀띔해주었다.
내가 멋대로 이러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가 황제와 다 약속이 된 일이지.
황제는 내가 말한 약속 장소마다 그림자를 보내기로 했고.
물론 실제 약속 장소는 다른 곳으로, 내가 무술을 연습하는 비밀 구역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미시. 나는 황제와 둘이서만 만나기로 했단 핑계를 대고서 따라오는 이들을 다 물린 뒤, 우리의 진짜 약속 장소인 내 비밀 연무장으로 갔다.
황제는 떡돌이 상태로 면사를 치워둔 채 풀밭에 누워 있다가, 내 발소리를 듣자 눈도 뜨지 않고서 아는 척을 했다.
“왔구나, 계란아.”
“약속 장소엔 그림자들을 다 보냈어?”
“그래. 누군가 우리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승언이가 알려줄 거다.”
“근데 있잖아, 우연히 그 장소에 다른 사람이 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티가 나지. 내 그림자들이 그 정도 판단을 못 하진 않아.”
“사람 쉽게 믿고 그러는 거 아니다?”
떡돌이는 이제야 눈을 뜨고서 황당하다는 듯 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은 가련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왜 그렇게 날 그윽하게 봐?”
“널 이해하려고. 넌 지금 배신을 당해서 그런 생각밖에 안 들 테니까.”
너도 네 누나 애인한테 배신당하고 성격 뒤틀렸다면서.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나는 눈치껏 도로 집어넣었다. 이런 말은 하는 거 아냐.
“그보다 소원은? 생각해 뒀어?”
“아직 생각하는 중. 하나뿐인데 신중하게 골라야지.”
“할 거 없으면 안 해도 돼. 막 고민하고 그러면 골치 아프잖아.”
“괜찮다. 행복한 고민이거든.”
입을 삐죽거리고서 풀을 잡아 뜯어서 녀석의 옷에 조금씩 뿌려보았지만, 떡돌이는 가소롭다는 듯 웃고서 눈만 감아 버린다.
그 얄미운 표정을 흘겨보지만 뭐, 흘겨본다고 어쩌겠어.
무림 고수일 때도 눈빛만으로 상대를 때리는 능력은 없었다.
“천 귀인.”
“왜.”
“계란아.”
“왜요.”
“소여야.”
그런데 자려고 눈 감은 거 아니었나? 떡돌이는 눈을 감아 놓고서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를 계속 바꿔 불러댔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그의 얼굴에 대고 강아지풀을 흔들고 있자니, 그가 눈을 천천히 뜨고서 날 향해 돌아누웠다.
얼른 강아지풀을 치우고서 그를 쳐다보자, 떡돌이가 이번에는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뭐 하자는 거지?
그래도 일단 얼결에 그 손 위에 내 손을 올리자, 떡돌이는 내 손을 한 번 쥐었다가 풀었다가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더니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렸다.
“뭐 한 거야?”
그게 이상해서 묻자, 떡돌이는 이번에는 내 신발코를 콕콕 손가락으로 찌르며 대답했다.
“이 거리가 좋아서. 손을 뻗으면 네가 잡아주는 이 거리가 좋네.”
그러고서 보기 좋게 눈웃음을 짓는데…….
“이 거리가 좋다는 건, 지금보다 멀지 않아서 좋단 거야 지금보다 가깝지 않아서 좋단 거야?”
내 질문에 신발 코를 가지고 놀던 떡돌이는 손길을 멈추더니, 고운 눈동자를 내게 단단히 고정하고서 물었다.
“넌?”
그러나 내가 떡돌이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하기 전.
“폐하.”
한발 앞서 승언이 달려오더니 무릎을 굽혔다.
나도 풀을 만지작거리던 걸 멈추었다. 드디어 나와 황제가 판 함정에 누군가 걸렸구나!
누굴까? 누가 걸렸지? 후궁은 영빈일 테고. 궁인 중엔 누가 걸렸어?
“규빈이 화화정으로 왔습니다.”
화화정이라면…… 내가 부성에게 알려준 장소다. 범인이 부성이었구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건, 내가 연비를 만나고 와서 그녀를 평할 때 부성이 연비를 두둔하던 일이었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황제를 보았다. 자, 갑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다니 건지러 가야지!
하지만 떡돌이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규빈?”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그 부분도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그러네. 화화정 부분에만 몰입해서 그 부분은 순간 신경 쓰지 못했어.
하지만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잖아? 부성이 내 위치를 알린 상대가 영빈이나 연비가 아니라 규빈이라고?
너무 뜬금없는데?
* * *
“네가 직접 그곳에 갈 필요는 없다, 천 귀인.”
“그럼?”
“부성은 태감을 시켜 수사청으로 보내게 하면 되고, 규빈은…… 설령 네 밑의 궁녀를 매수한 게 맞다고 해도 이걸로 처벌은 할 수 없어. 규빈의 품계가 너보다 높으니까.”
내가 화화정으로 달려가려 하자, 황제가 날 말리면서 한 말이다.
난 나와 황제가 화화정에 가서 현장 검거를 한 다음 둘을 처벌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 난 뭘 어떻게 해야 돼?”
하지만 궁전 일이라면 나보다 떡돌이가 더 빠삭하기에 나는 시무룩해서 물었다.
“처소로 시원한 음식을 보내둘 테니, 가서 먹고 속을 식혀라. 그리고 씻은 다음 일찍 자.”
“부성이랑 규빈은?”
“부성은 수사청에서 처리할 테고, 규빈은 내가 꾸짖으면 되지.”
떡돌이가 저렇게 말한다면 뭐. 저게 맞겠지. 결국 좀 억울하긴 하지만 나는 납득하고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떠나려는 나를 붙잡더니, 그가 내게 또 이상한 말을 꺼냈다.
“계란아. 수사청에 가면 그 부성이란 궁녀는 누구의 사주를 받아서 널 배신한 건지, 무슨 정보를 팔았는지 등등을 강도 높게 조사받게 될 거다.”
“그래…… 그런데 그게 왜?”
“부성이란 궁녀는 네가 친정에서부터 데려온 궁녀라 들었는데.”
“아. 응. 그렇다더라. 그건 왜?
“혹시 네가 용서할 거라면 풀어주겠다고.”
떡돌이가 하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하지만 떡돌이는 정말 진심으로 보였다. 둘이 함정을 파서 범인을 잡아 놓고서, 내가 용서한다면 풀어주겠다고.
“왜?”
아까부터 내가 계속 왜냐고 묻는 느낌이긴 한데.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는 그에게 또 묻고 말았다.
떡돌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괜찮아.”
“하지만…….”
“정말 괜찮아. 상처 안 받아. 철저히 잘 수사해.”
난 뒤통수 치는 사람을 싫어하고 부성을 용서할 마음도 없다.
더군다나 애초에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부성과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았는걸.
* * *
이후 나는 내 처소로 돌아왔고 황제는…… 몰라, 어디 갔는지.
하여튼 상처받지 않은 거란 내 말은 괜한 허세가 아니어서, 나는 정말 별생각 없이 처소로 잘 돌아왔다.
그런데 내 처소에 돌아와 보니 이게 웬걸. 이미 소식을 다 들었는지, 원웅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울고 있었다.
아…… 그래. 원웅은 부성이랑 친했지. 나야 내 기억이 없으니 부성이 벌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원웅에겐 아닐 수도 있구나.
어쩌면 떡돌이도 내게서 저런 반응을 기대하고 ‘용서해줄까?’ 물었던 건지도.
어쨌든 원웅이 울자 덩달아 불편해져서,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막 식사를 마쳤을 즈음. 원웅이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애원했다.
“소주, 부성을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얼굴에 대고 ‘싫어’ 하기도 뭐해서, 나는 일단 빈말을 해주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낸 다음에 폐하께 용서해 달라고 할게. 친해서 걱정되지?”
원웅은 “네.” 하고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원웅이 이어서 한 말은 전혀 예상외였다.
“하지만 전 소주가 더 걱정돼요.”
“나? 나는 왜?”
얘도 내가 상처받을까 봐 저러나? 천소여가 그 정도로 부성과 가까웠나?
“부성은 대대로 천씨 가문을 모셔왔기 때문에 가문 전체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요. 아마 그래서 소주를 첫 번째로 여기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왜?”
“예전에요. 소주가 기억을 잃기 전에 부성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리면서 ‘일이 잘못되면 너와 나 모두 죽으니 조심해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게 뭔데?”
“저도 몰라요. 소주가 부성에게만 알려주셨고 부성도 제게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수사를 받다가 앞길이 막막해지면 부성이 그걸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