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한 번 죽이고 또 죽이려 하다니
“천 귀인?”
천 귀인은 황제가 부르는데도 휑하니 가버렸다.
승언과 오원요는 황제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가 화난 얼굴은 아닌 듯해 안심했다.
황제가 둘만 있을 때는 떡돌이처럼 대해도 좋단 말을 지금도 허용해주는 듯해서.
황제의 표정은 면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오원요는 드러난 눈만으로도 황제의 감정을 어림짐작하고서 얼른 좋게 좋게 말해주었다.
“폐하께 마음이 없다면 천 귀인이 저렇게 화나서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
승언도 눈치껏 말을 보탰다.
“저렇게 나오시는 걸 보니, 천 귀인도 폐하를 진심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황제는 뒷짐을 지고서 떡돌이와 천 귀인이 나란히 앉아 놀던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밝혀버리고 나니 단둘이 만나기조차 쉽지 않구나. 사람들이 방해를 해대니…….”
오원요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폐하께선 영빈 마마가 일부러 끼어든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자기가 불렀던 거라면 천 귀인이 저러고 갔겠느냐?”
* * *
이제 황제도 내가 무말랭이가 아니란 걸 알았을 거다. 감히 나와 영빈을 한 팔에 한 짝씩 끼고서 놀려 하다니, 어림도 없지!
두고보라지. 내가 지금 열심히 무공을 회복해가고 있는데, 나중에 다 회복하고 나면 황제와 영빈의 침실에 개구리를 풀어놓을 테니!
아니…… 이 참에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황제와 거리를 좀 둘까?
그에게 떡돌이 모습으로만 나와 만나고 황제일 땐 모른 척 해달라 하면 어떨까?
난 천귀인 모습으로까지 적을 만들고 싶진 않다고. 궁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냥 중간만치 하면서 적당히 묻혀가고 싶은데.
에이! 이 술! 이 술 때문이야. 왜 약속 장소에 가는데 뚝 끊어져? 떡돌이 자식, 처음부터 고장난 거 보낸 거 아냐?
생각하니 열이 받아서, 나는 아까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수리한 노란 술을 꺼내서 팡팡 탁자에 대고 내리쳤다.
‘어?’
그런데 막 내리치다보니 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야?’
아깐 급하게 수리하고 가느라 몰랐는데.
내가 새로 지은 매듭이 아니라 원래의 매듭 부분이, 끊긴 게 아니라 잘려 있었다.
‘세상에. 누가 일부러 자른 건가?’
그러면 누가? 원웅? 부성? 귀자? 아니면 다른 궁녀나 태감들?
줄이 끊어진 걸 알린 건 부성이지만, 선물들을 정리한 건 원웅이었어.
다른 궁녀나 태감들도 계속 내 방에 오갈 수 있지.
떡돌이한테 보여줘야겠다. 나는 얼른 술을 소맷자락 안에 넣고 일어났다.
떡돌이는 눈치는 없지만 똑똑하니까 이 상황을 잘 파악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막 사립문 밖으로 나가려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연얼 군주가 술병을 손에 들고 흔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뒤로 물러나자,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사립문을 제 손으로 열고 들어오면서 내게 자랑스레 술병을 내밀어 보였다.
“귀인, 나랑 술 마시며 놉시다.”
“지금 술 마실 때가 아니어요!”
“술을 때를 봐가며 마시나요?”
“이리 와 보세요.”
연얼군주도 똑똑하지! 나는 잘됐다 싶어서 얼른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꼭꼭 닫고서 탁자에 앉혔다.
“왜요?”
연얼 군주가 어리둥절해서 앉자, 나는 밖에서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머리는 그녀 쪽으로 내민 채 상황을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내게 선물 주신 건데, 오늘 폐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내 궁녀가 장식용 수술이 끊어졌다며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도로 수선한 다음 가보니 영빈이 폐하랑 ‘까르르 까르르’ 막 있잖아요. 둘은 분위기 좋은데 지켜보면 기분 나쁜 거.”
“질투했군요?”
“하여튼 그런 상황이더라고요. 처음엔 폐하한테만 기분이 나빴는데, 와서 보니 수술을 묶어둔 매듭이요. 그 부분이 ‘끊어진’ 게 아니라 ‘잘려’ 있더라고요.”
“정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소매 안에 숨겨두었던 장식용 수술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딱 그 와중에 잘려 있던 게 이상하지 않아요?”
연얼 군주는 내가 새로 묶은 매듭과 그 안쪽에 잘려나간 매듭을 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내 눈에도 일부러 끊은 거처럼 보여요.”
“그렇죠?”
나는 주먹을 쥐고 허공으로 연달아 휘둘렀다.
연얼 군주는 술병 뚜껑을 따면서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내가 씩씩거리면서 반대쪽 허공도 주먹으로 휘두르자, 진정하란 손짓을 하며 조언했다.
“내 생각엔요. 천 귀인 측근 중에 다른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 같아요?”
“나야 모르죠. 하지만 조심해요. 가까이 있는 적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까요.”
* * *
연얼 군주에게 2차 확신까지 받자마자 나는 나갈 채비를 한 다음 얼른 황제를 찾아갔다.
내가 심궁에 나타나자 관리들은 좀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도 세 번이나 보니 좀 편안해졌는지 힐긋거리기만 할 뿐 이전만큼 눈이 커다래지진 않았다.
처음 보는 대신은 이번에도 눈이 왕밤만해졌지만.
어쨌든 묻고 물어서 나는 황제가 있다는 집무실로 찾아갔다.
“천 귀인. 어쩐 일로 여기까지?”
황제는 책상에 얇은 종이들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읽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오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리면서 얼굴을 덮었던 면사를 내렸다.
나는 콧김을 내뿜으면서 다가가다가 그가 면사를 내리는 순간 짧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떡돌이! 황제 복장을 하고 있으니 더 잘생겼잖아!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황제의 저 면사 아래에는 아주 고운 얼굴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고!
“천 귀인? 왜 그러고 서 있지?”
“내가 너무 똑똑한 거 같아서.”
황제는 미간을 구겼다.
“갑자기 찾아와서 스스로를 칭찬하다니. 뭐 하는 건지 모르겠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책상 근처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의자에 걸어가며 보니, 그가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좀 긴장해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꾹 닫힌 입술 끝이 씰룩씰룩 계속 움직이는 걸 보면 확실해.
게다가 뒷짐을 지고 있는데, 손가락 위치가 계속 바뀌고 있다.
자기도 나랑 약속해 놓고 영빈이랑 놀던 게 찔리는 거지. 암. 찔려야지.
하지만 지금은 그 화제를 얘기하러 온 게 아니기에, 나는 일단 품 안에서 그가 준 장식용 수술을 꺼내 내밀었다.
황제는 ‘이건 왜?’ 하는 눈으로 수술을 받아 들더니 몇 번 살피는 것만으로 이상한 점을 눈치 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매듭 위치가 마음에 안 들었나?”
그러다 내가 연얼 군주에게 했던 설명을 그에게도 해주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더니, 연얼 군주와 같은 결론을 냈다.
“역시 네 하인들 중에 첩자가 있군.”
“역시?”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을 전에도 했다. 그래서…….”
“아아. 아랫사람 입 단속 시키라 했었지!”
내가 깜짝 놀라 외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쟤는 눈치가 없지만 진짜 똑똑하긴 하구나.
어쨌든 떡돌이가 하나만 말해도 둘을 알아듣자 말하기 더욱 쉬워지겠어.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바로 알아들으니 이야기가 쉬워지네. 그거 때문에 왔어. 날 좀 도와줘.”
“어떻게?”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
황제는 신중한 얼굴로 날 보다가, 내가 질문을 건네자 고개를 기웃하더니 떨떠름하게 물었다.
“지금 후궁 암투를 나한테 묻는 건가?”
“어떡하겠어. 난 이런 데 익숙하지 않단 말이야. 넌 익숙하잖아.”
“난…… 익숙하지. 익숙하긴 한데.”
“한데?”
“시점이 좀 다르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오 공공이 금박 접시에 보기 좋은 노란 떡을 들고 와 책상에 내려놓고 나갔다.
황제는 떡 접시를 내쪽으로 내밀었다.
와. 황제가 되더니 떡도 진화했네. 전에는 천에 싸와서 주더니, 이젠 접시 째 주잖아.
“계란아.”
“응?”
“접시 째 주는 거 아니니까 하나씩 집어 먹어라.”
“!”
너무한다 너무해. 황제가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속은 계속 좁은 거야? 아주 좀팽이가 다름없구먼.
일단 시키는 대로 떡을 하나만 들고서 우물우물 씹자, 떡돌이는 자기도 떡 하나를 집고서 접시는 책상에 내려두며 물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후궁 암투에 익숙하다 치고.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지?”
“서로 잘하는 걸 하면 어떨까 싶어.”
“?”
“넌 궁중에 익숙하니 내 밑에 있을 첩자를 찾아줘.”
떡돌이는 ‘뭐 그 정도는’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넌 뭘 하고?”
“난 먹는 걸 잘하니 떡을 먹고 있을게.”
“!”
그러고서 떡을 하나 더 집어 낼름 입에 넣자, 떡돌이는 황당하단 얼굴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항의했다.
“그럼 내 손해 아닌가?”
“어쩔 수 없어! 내가 손해 보긴 싫은걸!”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라.”
떡돌이는 이마를 짚고서 한숨을 내쉬더니, 곧 벗어 두었던 면사를 도로 얼굴에 걸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 * *
“단주께서는?”
“지하 연구실에 계십니다.”
아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지하실 아래로 내려갔다.
보안이 철통 같았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어느 지점부터 은은한 비린내가 풍겨와 본능적인 불쾌감을 일으켰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넓은 공동 가득 채워진 관들이 보였다.
관은 모두 다 뚜껑이 열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다 시체가 들어 있었다.
특이한 건 그중 몇몇 시체의 이마에는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이 붙어 있단 점이었다.
강시를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광경이었으나, 아유정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이사이를 지나가 방 가운데에 서서 뭔가를 기록 중인 타천천에게 다가갔다.
“단주님.”
타천천은 손바닥 위에 작은 종이를 올려 놓고 거기에 세필로 빠르게 글씨를 적고 있었는데, 아유정이 지척에서 불렀지만 눈길을 주지 않고 대답만 했다.
“무슨 일이지?”
빛이 드문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올 만큼, 타천천의 이목구비는 미려하고 수려했다.
아유정은 타천천만큼 이마와 콧대의 선이 뚜렷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단주는 이런 음산한 지하실에서 관 사이에 머물 게 아니라, 구름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아야 할 사람이라고. 물론 그 구름이 하얀색은 아니겠지만.
“정영검 개원이 절 죽이려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바삐 움직이던 타천천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잠시 그 상태로 있더니 손을 내리고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자가. 또. ‘천년비’를?”
“예. 천년비가 살아났단 이야기를 듣고서 온 거겠지요.”
타천천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올라갔다.
“한 번 죽여놓고. 살아났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또 죽이려 하다니 정말 독한 놈이로군.”
“예.”
“이번에야말로 천년비의 복수를 할 수 있겠구나. 먼저 안 찾아다녀도 온다니 편하군.”
타천천은 빙그레 웃었으나 그가 쥔 붓은 ‘뿌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자기가 부숴버린 붓을 바라본 타천천은 “이런.” 하고 중얼거리며 붓을 바닥에 버리고는, 아유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당부했다.
“천년비 영혼을 찾으면 돌려주어야 하는 몸이니, 혹시 개원과 마주치더라도 상대는 하지 마라. 몸에 상처 하나 만들지 마.”
“그럼 개원을 마주치면…….”
“내쪽으로 와라.”
서늘하게 웃은 타천천이 손을 휘젓자, 바닥에 떨어진 붓이 허공을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다.
“죽이는 건 내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