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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61화 (61/283)

##  61화. 넌 떡돌이야 황제야?

내가 의자에 앉아 좌경에 얼굴을 비추어 보는 사이.

부성과 원웅은 내 양 옆에 서서 머리카락 반쪽씩을 잡고 열심히 땋아 주었다.

나는 우울한 인상을 어떻게든 위엄 있게 바꾸어 보려고 눈썹을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괜찮아. 우중충한 인상이면 어때. 나는 이 얼굴을 어차피 거울 볼 때밖에 못 본다고.

“소주! 소주!”

그때 귀자가 문밖에서 나를 부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와 알려주었다.

“소주, 지금 이쪽으로 폐하께서 보내신 물품들이 오고 있답니다!”

그 말에 부성이 놀라서 내가 묻고 싶은 걸 먼저 물었다.

“물품들이라니?”

“폐하께서 우리 소주 쓰시라고, 온갖 귀한 선물을 보냈어요. 지금 태감들이 줄지어 들고 오는데, 얼마나 줄이 긴지 다들 놀라서 구경하고 있을 정도라니까요?”

측근 궁녀인 부성과 원웅은 그 소리를 듣자 서로를 쳐다보더니 손뼉을 마주치면서 좋아했다.

이보세요, 머리 땋다가 놓으면 어떡해?

좋아하는 건 궁녀들만이 아니었다. 황제가 보내준 태감인 귀자도 몹시 뿌듯한 얼굴이었다.

하긴. 줄지어 물건을 뺏으러 오는 것보다야 물건을 주러 오는 게 좋지.

아니, 생각해보니 선물이래 선물. 좋은 거잖아?

황제와 떡돌이가 동일인이란 걸 갑자기 알아버려서 내 머리가 잠시 굳었나 봐! 내가 평소엔 얼마나 똘똘한데!

나는 얼른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디? 내 선물이 어디 있는데?”

신이 나 어깨춤을 추면서 묻자 원웅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소주, 조금만 감정을 숨겨주세요.”

“하지만 난 선물이 좋은걸!”

“네, 하지만 내무부 태감들이 돌아간 다음에 외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소주가 속물이라고 소문을 낼지도 모르잖아요.”

황궁 사람들은 무림 정파인들 하고 여러모로 비슷하구나. 걔네가 딱 이랬지.

좋은 비급을 발견하면 관심 없는 척하는데, 뒤에선 온갖 수를 다 써서라도 그 비급을 가져가려 하거든.

어쨌든 원웅의 조언에 따라서 관심 없는 척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곧 내무부 태감들이 줄줄이 내 처소로 들어왔다.

그들이 손에 든 온갖 물품을 보자 원웅은 내게 조언까지 했으면서 자기도 가쁘게 숨을 쉬어댔다.

어쨌든 우리는 세속을 초월한 척 잘 연기하다가, 태감들이 돌아가자마자 얼른 물건들을 마당에서부터 뜯어보았다.

“세상에 소주! 이거 좀 보세요!”

상자를 뜯자 안에서 온갖 물품들이 나왔다.

노란 꽃이 그려진 어항과 장미색의 순지, 금색 실 묶음이 보송하게 달린 장신구, 다양한 모양의 귀걸이와 원석, 비녀, 심지어 붓까지.

“세상에! 상자들도 전부 화목으로 만든 거예요, 소주!”

부성은 비명을 질렀고 원웅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감격해 중얼거렸다.

“천씨 가문에서 두 번째로 입궁하신 데다, 앞서 대여 아가씨가 바로 총애를 얻어 빠르게 품계가 올라가는 바람에, 소주도 괜한 기대로 괴로워하셨잖아요.”

그래?

“그러다 우여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입궁해서 소주보다 품계가 더 높아지니까, 비빈 자매를 둔 소주를 앞에서 괴롭히진 못해도 사람들이 많이 무시하곤 했어요.”

그랬어?

“그런데 이젠 폐하께서 우리 소주를 이렇게 총애해 주시니 정말 감동이에요. 폐하께선 담백한 편이시라, 이렇게 선물을 많이 받은 후궁은 이제껏 없었거든요.”

원웅은 정말로 기쁜지 숫제 눈물까지 훌쩍였다. 그런데…….

“그 얘길 왜 이제서야 해줘?”

“죽을 위기를 넘기고 깨어난 소주께 어떻게 이런 얘길 해요. 게다가 이런 얘길 모르니까 오히려 더 밝게 잘 지내시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게 약인 거 같아서 말 안 했는데, 황제가 선물을 한 보따리 보내는 걸 보니 이젠 말해도 되겠다 싶은가 보구나.

기뻐하는 원웅과 부성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선물들을 좀 착잡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선물을 받아서 착잡한 게 아니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단 소문이 돌 때도 이렇게까진 챙겨주지 않던 황제가 떡돌이와 자기가 동일 인물이란 걸 알리자마자 갑자기 바리바리 선물을 보내는 게 이상해.

내 떡돌이는 볼 때마다 떡이나 쥐여 주던 내시인데.

떡돌이는 날 연모한다고 했는데, 황제는 날 건성으로 연모하고 있었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둘 중에 어느 쪽이 진심인 걸까?

* * *

황제가, 아니, 떡돌이가 청적에서 슬쩍 만나잔 쪽지를 전해 와서, 식사를 하자마자 얼른 그쪽으로 가려 할 때였다.

원웅을 데리고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부성이 뛰어오더니 내게 다급하게 알려주었다.

“소주, 소주! 다시 처소에 돌아가셔야 할 것 같아요!”

“왜?”

“이틀 전에 폐하께서 보내주신 장신구가요…… 일단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보면 안 돼?”

“폐하께서 주신 물건을 험하게 다뤘다가 나중에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요.”

거참 까다롭네. 번거롭지만 나는 결국 다시 처소로 돌아갔다.

약속 시각보다 좀 더 빨리 나왔으니까, 처소에 돌아갔다가 가도 늦진 않겠지?

* * *

“폐하께선 이리 헌앙하신데, 얼굴을 늘 가리고 계시니 참 안타깝습니다.”

“웬 천 귀인 같은 소리냐.”

“천 귀인의 말에 동의하는 거지요.”

“별소리.”

“선물을 보낸 후로 천 귀인을 처음 뵙는 거지요?”

“…….”

“좋아하실 겁니다. 내무부 태감이 말하길, 폐하께서 보낸 선물을 받고 천 귀인께서 몰래 어깨춤 추는 걸 봤다 했거든요.”

“어깨춤…….”

“눈치껏 모른 척 해드렸답니다.”

청적에 온 황제가 수석 태감인 오원요와 잠시 대화를 나눌 때였다.

천 귀인이 언제 오나 살피고 있자니, 드디어 인기척이 들려왔다.

황제는 자세를 바로 하고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런데 나타난 사람은 천 귀인이 아니었다.

“영빈?”

천 귀인의 이복동생인 천우여, 영빈이었다. 게다가 그녀 역시 놀란 표정.

황제가 ‘왜 네가 여기에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영빈은 눈치 빠르게 설명했다.

“소여 언니가 이곳에 가보라 해서 왔어요.”

“천 귀인이?”

“네. 함께 산책하자는 거라 여겼는데…… 언니는 없고 폐하께서만 여기 계시니…….”

영빈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동안 황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저…… 혹시 언니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셨나요? 그런 거라면 제가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폐하. 언니가 일부러 절 부른 건 아닐 거예요.”

영빈이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를 보자, 그제야 황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서 산책로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걷지. 천 귀인이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오원요는 뒤로 물러나면서 황제의 그림자 호위인 승언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청적을 반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황송해하는 얼굴로 아무 말 없던 영빈이, 너무 조용하자 무언가 말을 꺼내야겠다 싶은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소여 언니를 가장 총애하시지요?”

황제가 말없이 쳐다보자 영빈은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소여 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빈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소여가 열 살 무렵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을 즈음일까.

영빈이 우뚝 멈추어 서더니 “언니!”하고 외치며 청적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황제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그곳에는 천 귀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서 있었는데, 방금 막 온 모양새가 아니었다.

“언니,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어? 얼른 와.”

영빈이 한 번 더 상냥하게 부르자 천 귀인은 그제야 고개를 똑바로 들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황제는 천 귀인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손에 닿는 거리로 오자 옷 옆에 덕지덕지 묻은 나뭇잎을 털어주면서 황당해 물었다.

“안 오고 뭘 하고 있었기에 그새 나무가 되었느냐.”

그 말에 천 귀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뭘 좀 보느라요.”

“무엇을 보았기에?”

황제의 질문에 곁에 선 영빈은 넓은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하겠지. 별달리 할 말이 없을 테니. 왜 내가 여기서 폐하와 같이 있는 건지 묻고 싶어도 꾹 참겠지.

확실했다. 영빈이 아는 천소여는 그런 사람이니까.

승언과 오원요 역시, 천 귀인이 황제와 영빈이 사이좋게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질투가 나서 저기에 계속 서 있었나보다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폐하의 정체를 안 후 처음 만나는 건데 다른 후궁과 있으니 기분이 나쁘겠지.’

‘쯧쯧. 이럴 땐 대답하기 참 곤란하지.’

‘그냥 방금 왔다고 둘러대겠지. 먼발치서 폐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고 하면 자존심이…….’

“폐하를 훔쳐봤어요.”

‘안 상하나 본데?’

오원요는 깜짝 놀라서 천 귀인을 쳐다보았다. 심지어 ‘지켜봤다’도 아니고 ‘훔쳐봤다’였다.

‘아니, 왜 하필 훔쳐봤다는 표현을?’

승언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훔쳐봤다고? 짐을?”

황제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라 재차 물었다.

“네.”

천 귀인은 당당하게도 대답을 했고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물었다.

“아니, 그냥 오면 되지 왜?”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저런 생각이라니?”

“별거 아닌 생각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해요, 폐하.”

“별거 아닌 생각?”

천 귀인의 솔직한 대답에 잠시 놀랐던 영빈은, 천 귀인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답하지 않으려 하자 농담조로 천 귀인을 살짝 치며 웃었다.

“혹시 제가 폐하와 있는 걸 보고 질투하고 있던 건 아니에요, 언니?”

약 올리는 듯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투여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오원요는 대번에 영빈이 천 귀인을 약 올리고 있단 걸 알아차리고서 걱정스럽게 천 귀인의 반응을 살폈다.

궁궐 안 사람들은 관리건 후궁이건 환관이건 궁녀건 저렇게 비비 꼬아서 듣기 좋게 상대를 약 올렸다.

당연히 눈치가 없으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도 어렵고, 알아듣더라도 거기에 화를 내면 품위가 없다며 오히려 비웃음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 맹한 천 귀인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으려나? 오원요는 괜히 자기가 다 걱정이 되었다.

* * *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었냐고? 황제와 영빈의 머리를 박치기시키고 싶단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황제가 보내준 장신구 술이 엉망으로 뜯어진 바람에 그거 묶어 놓고 와보니, 약속 장소에 영빈이 황제와 딱 달라붙어 걸어가고 있다.

아주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면서 사이도 좋게.

‘날 불러놓고 왜 영빈이랑 있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어서 좀 쳐다보고 있었더니, 두 사람은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채고는 가까이 오라 해놓고 괴상한 질문을 해댄다.

차라리 연비가 황제와 있었으면 기분이 덜 불쾌했을 거다.

하지만 천소여를 싫어하는 게 분명한 영빈이 내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서 이렇게 해대자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역시 떡돌이가 아니라 황제 쪽이 본체였나.’

하긴. 전에도 연모한다고 해놓고 연비랑 딱 달라붙어서 산책하고 있었지. 이번에도 그러네. 아주 상습범이야 상습범.

“천 귀인?”

내가 부루퉁하게 서 있자니 황제가 날 부르면서 눈치를 좀 살핀다.

적당히 넘어가 주면 좋을 텐데. 눈치를 살피면서도 눈치 없는 이 황제는 내 속내를 꼭 들을 거라고 저러고 서 있었다.

하지만 난 눈치가 찰떡 같기에 황제에게 ‘폐하랑 영빈이 대가리를 쥐어박는 상상을 했어요’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떡돌이에겐 그 말을 해도 되지만 황제에겐 하면 안 되니까.

게다가 내가 아무리 궁중 생활에 무지하다지만, 궁정 사람들은 후궁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투기하는 걸 안 좋게 본단 것도 안다.

내가 공부를 못 해서 그렇지 똘똘해.

하여튼 이런 상황이니 뭐. 할 수 있는 말을 할 뿐이었다.

“영빈 마마, 저는 이런 데 질투하고 그러지 않아요. 산책 가지고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폐하는 어차피 제게 푹 빠지셔서 헤어나오질 못하시는데요.”

황제가 아주 살짝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내가?’ 하고 눈으로 묻는다.

그래, 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떨떠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영빈도 잠깐 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부정하는 대신 내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기 처소에 돌아가겠다면 먼저 자리를 떴고, 나도 영빈이 떠나자마자 홱 몸을 돌렸다.

황제떡은 혼자 놀아. 난 갈 거야.

“잠깐, 천 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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