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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58화 (58/283)

##  58화.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지

“제가 먹었습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에도 사자 친왕이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나는 놀라서 쳐다보았으나, 사자 친왕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황후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호탕하면서도 멋쩍은 척 웃었다.

“천 귀인께서 폐하께 주셨는데, 그 자리에 제가 함께 있었거든요. 폐하께선 자신은 이런 게 필요하지 않다면서 옆에 있던 제게 양보해 주셨습니다.”

와, 거짓말. 하지만 도움 되는 거짓말이니 입 다물고 있자.

나는 표정을 야무지게 관리하고서 사실인 척 새초롬하게 황후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게 차갑게 말했다.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했어야지.”

굉장해. 어떻게 해서든 내 탓을 하겠단 결연한 의지가 보이잖아?

다행히 사자 친왕은 거짓말에 능숙해서, 그는 이번에도 혼자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더니 부채를 꺼내 살랑살랑 저으면서 또 거짓말했다.

“후궁 입장에서 폐하의 형제인 제게 정력제를 주었단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요.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저 맞다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사자 친왕이 왜 갑자기 날 편들어 주는 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작정 맞다고 했다.

“…….”

황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지만, 사자 친왕이 저렇게까지 나오자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황제에게 물어보면 바로 티가 날 일을 거짓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황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사자 친왕은 빙그레 웃으면서 약을 팔았다.

“폐하께 여쭤보셔도 맞다 하실 겁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무조건 자신이 맞다고 박박 우겨대면 우긴 사람이 더욱 우스워지기 십상.

결국, 황후는 표정 없이 염 귀인에게 일어서라 손짓했다.

“이 일과 네가 관련 없단 걸 믿어주지. 일어나라, 염 귀인.”

염 귀인이 얼른 일어나자 황후는 손을 저어서 나와 염 귀인에게 가란 신호를 했다.

“우 귀인은 남게.”

반면, 슬그머니 염 귀인을 따라 나오려던 우 귀인은 붙잡았다. 와 목소리 서늘한 거 봐.

염 귀인은 우 귀인이 걱정되는지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황후가 나가라는데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와 염 귀인, 사자 친왕 이렇게 세 사람이 나오고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또 너야! 지난번에도 천 귀인이 사통한다면서 괴상한 시를 가져오더니!” 하는 황후의 호통이 들려왔다.

사자 친왕이 내게 슬쩍 물었다.

“괴상한 시라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우 귀인은 시를 못 짓나 보죠, 뭐. 안 그래요, 염 귀인?”

하지만 염 귀인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황후의 오해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우 귀인이 걱정되는 듯했다.

“난 먼저 돌아가 볼게요.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이 때문인지 결국 염 귀인은 나와 사자 친왕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기 궁녀의 부축을 받아 바로 동영궁 밖으로 나갔다.

반면 사자친왕은 우 귀인이 혼나건 말건 상관이 없는지, 염 귀인이 나가자마자 뒷짐을 지고서 뻐겨대듯 물었다.

“나중에 한 번 도움을 주기로 약조한 건 귀인인데. 반대로 돼서 어떡합니까.”

“나야 좋죠.”

“나는 손해 보는 기분인데.”

“기분만 그렇지 진짜 손해 본 건 아닐 거예요. 염려 마세요.”

사자 친왕은 고개를 기웃하더니 자기 양미간을 눌렀다.

“말을 참 이상하게 하신단 말이지.”

“그보다 폐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해도 괜찮은 거예요?”

“아아. 괜찮습니다.”

“폐하가 보내셨어요?”

“그건 아니지만,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주실 겁니다.”

밴댕이 소갈딱지인 황제가 과연 이해해 줄까? 뒤늦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쳐다보았으나, 사자 친왕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정말 괜찮다니까요?” 하며 저었다.

* * *

사자 친왕이 천 귀인에게 ‘황제는 이해해 줄 것’이라 말한 건 천 귀인이 절세단을 준 상대와 황제가 동일 인물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황제는 천 귀인이 오명을 쓰는 걸 지켜보거나 예상보다 빠르게 진실을 밝혀야 했을 터.

황제는 사자 친왕이 이 일에 나서준 걸 오히려 고마워할 거란 계산이 그의 머릿속에선 끝나 있었다.

“……러한 이유로 조금 거짓을 말했습니다, 폐하.”

예상대로 월요 황제는 사자 친왕이 사정을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잘했다.”

사자 친왕은 어깨를 쭉 펴고 잘난 척했다.

“폐하와 천 귀인은 제게 큰 빚을 진 겁니다.”

황제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고서 태사의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사자 친왕의 표정에 묘한 빛이 있는 걸 눈치채고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왜 그러지?”

사자친왕은 아까와 달리 약간 주저하는 기색으로 깃털 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다가 웃음 사이에 걱정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한 번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좀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걱정이라니?”

“황제가 아닌 신분으로 천 귀인과 노시는 게 즐거우시겠지만, 이런 관계는 일이 꼬이면 천 귀인이 자칫 오해를 사기 쉬우니까요. 이번처럼요.”

“…….”

“뭐, 폐하께서 나중에 그 남자가 폐하라는 걸 밝힌다면 다른 사람들이 한 오해는 금방 풀리겠지만…….”

사자 친왕은 황제를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난데없이 자신의 친구 ‘떡돌’이 폐하인 걸 알게 되었을 때, 천 귀인은 속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황제가 굳은 얼굴로 쳐다보자 사자 친왕은 부채로 자기 얼굴을 가리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독특한 성격이니 아닐 수도 있지요.”

황제의 미간이 구겨지자, 사자 친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좋은 조언을 해주듯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미리 ‘떡돌’이 아니라 ‘폐하’로서 점수를 따 두시는 게 어떨지요?”

* * *

사자 친왕이 돌아가자, 황제는 수석 태감인 오원요를 불러 지시했다.

“천 귀인이 사가에 있을 때, 혹시 집안에서 괄시당하진 않았는지 조사해보아라.”

밑도 끝도 없는 난데없는 질문에 오원요는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대답은 했다.

“예, 폐하.”

사자 친왕이 천 귀인이 사가에서 괴롭힘을 당했단 말을 하고 갔나? 천 귀인이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가?

머릿속에 호기심이 방울방울 올라왔으나 수석 태감답게 그는 황제가 말해주지 않는 건 질문하지 않았다.

“나가보라.”

오원요가 나가자 황제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천 귀인이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던 걸 떠올렸다.

* * *

청적에 가니 떡돌이가 바위 아래에서 내 구원 요청서를 꺼내 들고 이게 뭐냐고 묻는다.

원웅이 잘 가져다 뒀구나. 쓸모는 없었지만.

나는 그 종이를 박박 찢은 다음, 그가 준 녹두떡을 뜯어 먹으면서 안비와 절세단, 염 귀인에 얽힌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었다.

그런데 뭐야. 내가 위기에 처했던 아슬아슬한 부분을 비장하게 들려주고 있는데, 떡돌이가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티가 났다.

“완전히 궁지에 몰렸지. 그래서 ‘내가 먹었다고 해야 하나?’ 막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말이야, 갑자기 친왕 전하가 짠! 등장한 거야.”

목소리까지 높이면서 설명해 주었지만 역시나 건성으로 듣는 거 같기에, 나는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해 시험을 좀 해보았다.

“갑자기 전하가 나타나서 다들 막 놀랐거든. 게다가 와서 전하가 그러더라고. 절세단을 먹은 건 황후 폐하십니다! 그러니까 황후 마마가 깜짝 놀라서, 아니, 내가 먹은 게 절세단이었다고? 그러면서 주먹을 쥐더니 말하더라고. 이 들끓는 힘의 비결이…… 절세단! 절세단에 영약 효과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서 장풍을 빡!”

“사기.”

흠. 제대로 듣고 있긴 하네.

떡돌이 표정이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는 것 같다.

“그러게 제대로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다 네 탓이라고 다리를 찰싹찰싹 때려주자, 그도 자기 잘못을 아는지 때리는 대로 맞았다.

“제대로 듣고 있었다. 사자 친왕이 갑자기 수사관이 되는 장면부터 황후가 장풍 쏘는 장면까지.”

“이건 다 네 탓이야. 네가 절세단을 먹어서 그래!”

“네가 줬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줬지!”

“억지 부리지 마라.”

“알았어.”

“…….”

억지 부리지 말라고 해서 안 부리려 얌전히 손을 다리 위에 얹는데, 떡돌이가 날 아주 이상하게 쳐다본다.

왜 저러나 싶어 같이 쳐다보자 그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

“천 귀인. 넌 진짜 이상해. 알아?”

“내가 왜?”

“안 알려줄 거다.”

“뭘?”

“이상한데 귀여워.”

“아니, 그러니까 뭐가?”

얘 이상해. 혼자서 히죽히죽 웃어대는데 진짜 이상해 보여.

내가 팔짱을 끼고 쳐다보자, 웬걸? 그가 슬그머니 내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저걸 왜 펼치나 싶어서 보고 있자니, 그가 괜히 애꿎은 풀들을 밟으면서 중얼거렸다.

“전에 내 손 잡아챘잖아. 잡을 거면 이럴 때 잡거라. 조심해서.”

손바닥을 찰싹 치고서 치우라 하려 했는데, 순간.

그의 손가락이 내가 준 반지가 떡하니 잘 달라붙어 있는 게 보인다. 잘 어울리네. 역시 난 안목이 좋아.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말하더니. 잘 끼고 다니네.”

내가 중얼거리자 떡돌이는 잘 보라는 듯 손가락을 쭉 펴더니 내 앞에 가져다댔다.

좋아. 기분이 좋으니까 손잡아 주겠어!

그가 제대로 반지를 끼고 있기에, 나는 얼른 떡돌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떡돌이는 내가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지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혼자 웃었다.

“복 달아나.”

내가 발등을 밟으니까 웃음기가 도로 사라졌지만.

심지어 그는 내 발아래에 눌려 얌전해진 자기 발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충격이군.”

“뭐가?”

“너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넌 진짜 날 많이 좋아하는구나?”

얘는 뭔 말만 하면 웃어. 이번엔 왜 또 웃는 거야?

그가 주먹으로 자기 입술 아래를 누르면서 어깨를 떨기에 왜 웃냐고 묻자, 떡돌이는 자기가 사자라 생각하는 강아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방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엔 힘든 일이 없을 거 같다.”

그건 모르겠고, 보기 좋게 휘어진 그의 입술 색이 참 예쁘단 건 알겠다. 얘는 정말 잘생겼어.

입술 한 번 만져봐도 되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 떡돌이가 나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난 심장이 아주 무거운 여자다. 입술이 예쁘다고 해서 넘어가는 일은 없거든!

나는 말랭이 떡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입술에 홀리지 않기 위해, 떡돌이가 쥐여준 녹두떡을 입에 물고 열심히 씹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역시 입술 한 번 눌러봐도 되냐고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떡돌이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만약 내가 네게 내 정체를 밝혔는데.”

“응.”

“그게 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떡할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예를 들어서…… 내가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하기 불편한 사람이라거나. 그런 이유로.”

떡을 한입에 밀어 넣고서 고개를 드니, 떡돌이가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가만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을 보낸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했다. 다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경우엔 맞는 말 같다.

떡돌이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상관없어.”

“!”

“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는 거지?”

“…….”

와. 사람이 이렇게 표정이 확확 바뀔 수 있다니. 하지만 지금 너무 처져 보이니 장난은 그만해야겠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가 내관이라는 걸 밝히기 두려워하는 눈치니까.

내내 정체를 숨기다가 왜 마음을 바꿨는진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가 자기 정체를 밝히는 문제로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커다란 아량을 발휘해 그의 마음을 좀 편하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사실 난 네 정체를 짐작하고 있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떡돌아.”

“짐작하고…… 있다고?”

떡돌이는 내가 이렇게 눈치 좋은 줄 몰랐나 보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자, 떡돌이는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런데도 나한테 이렇게 대했다고?”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거든.”

떡돌이는 아직도 내 발아래에 깔려 있는 자기 발등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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