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정력제를 먹은 사람은 누구인가
염 귀인은 ‘천 귀인이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확실한 범인이 없는 사건은 일종의 폭탄 돌리기와도 같아서, 그럴듯한 정황만 보이면 범인이 아니면서도 범인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사건을 미제로 남기는 건 황실의 위엄이 깎이는 짓이기에, 나중에 진범이 밝혀지면 다시 판결을 내리더라도 일단 ‘제일 수상한’ 범인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천 귀인을 짚는다면…….
천 귀인은 멍청하고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변명도 제대로 못 하고 옷에 튄 불똥을 끄지 못해 허둥거리다가 화상만 입을 게 분명했다.
“왜 말을 않느냐.”
황후는 염 귀인이 얼른 가져오겠단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자, 약간 풀렸던 표정이 다시 차갑게 얼어붙어서 물었다.
“그게…… 그건…….”
* * *
염 귀인은 좀 괜찮으려나, 생각하면서 황제가 보내준 딸기를 관성적으로 먹고 있을 때였다.
“천 귀인! 나와! 천 귀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딸기를 입에 문 채 원웅과 눈짓을 교환했다. 무슨 일이야?
원웅이 고개를 젓자, 부성은 얼른 먹던 딸기를 꿀꺽 입에 넘기고서 “제가 나가 볼게요, 소주.” 하고 중얼거리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 “고정하세요, 우 귀인!”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소란은 배가 되었고, 이어서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부성 선에서 될 일이 아닌 듯해 나도 손을 대충 치맛자락에 닦으면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난리도 아니네.
밖으로 나가 보니 담벼락에 세워둔 항아리 하나는 박살이 나 있고.
우 귀인은 씩씩거리면서 내 쪽을 노려보고 있고. 부성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자 우 귀인은 뜬금없이 내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다 천 귀인 때문이에요!”
“무슨 소리래. 난 방금 나왔어요.”
“다른 거요!”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다 듣겠네. 내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우 귀인은 씩씩거리면서도 따라 들어왔다.
나는 아까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면서 우 귀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자마자 깽판이에요?”
그러자 우 귀인은 ‘몰라서 그러냐’는 얼굴로 차갑게 날 쏘아보며 말했다.
“염 귀인이 천 귀인하고 친하게 지낼 때부터 불안했어요. 천 귀인은 폐하와 태후마마가 지켜주시니 괜찮겠지만, 염 귀인은 다르니까. 혹시 천 귀인에게 향할 화살을 대신 맞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고요.”
뭐라는 거야?
“돌려 말하지 말아요.”
그러면 난 못 알아들어.
우 귀인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책상을 쾅 내리쳤다.
“염 귀인이 천 귀인한테 절세단을 준 적이 있잖아요. 지금 그게 독이 아닌가 의심을 받고 있다고요!”
“예? 왜요?”
“보기엔 수상한 병일 뿐이니까요!”
“아.”
그래서 안비 궁녀가 염 귀인을 짚었구나. 염 귀인이 그 수상해 보이는 병을 들고 동영궁으로 오긴 했으니.
“절세단만 황후 마마께 보여드리면 염 귀인은 바로 의심을 벗을 수 있어요. 지금 염 귀인이 꼬투리를 잡힌 건 다 천 귀인을 고립시키려는 계략이니까, 천 귀인과 친하게 지내면 또 공격이 들어오겠지만, 일단 당장은 괜찮아질 거예요.”
왜 다 내 탓이래. 내가 뭐 어쨌다고.
내가 염 귀인과 조금씩 친해지긴 했지만, 염 귀인한테 일 생긴다고 외로움에 미쳐갈 정도는 아닌데.
그냥 병 들고 다녀서 찍힌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우 귀인은 정말로 이게 나 때문이라 믿는 눈치였다.
뭐, 그러면 그런 거로 하자.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일은 잘 모르니까.
“그렇다 치고, 그러면 나더러 어떻게 해달란 거예요?”
“진짜 멍청하네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어요? 염 귀인이 준 절세단을 내놓으란 말이잖아요. 그걸 황후 마마께 전달해 드려야 황후 마마가 확인하고 염 귀인을 풀어주실 거 아니에요.”
“아, 절세단. 절세단이라면…… 지금 나한테 없는데.”
“뭐예요?”
우 귀인 눈에서 불화살이 발사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떡돌이한테도 절세단이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나. 그게 언제 일인데 지금 찾아?
“일단 남은 게 있나 물어볼게요. 돌아가서 기다려요.”
남은 게 없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우 귀인은 같이 일어서지 않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왜 저렇게 보나 싶어 나도 제자리에 서서 멀뚱히 같이 보자, 우 귀인이 한심해하는 투로 말했다.
“뭐 하러 직접 가요? 궁녀나 태감한테 시켜서 받아오게 하면 되지.”
나는 뚱하게 되물었다.
“내가 누구한테 줬는지 궁녀랑 태감이 어떻게 알고 받아와요?”
청적에서 떡돌이와 만나는 건 나뿐이고, 그럴 때 원웅이나 부성을 데려간 적이 없는데 걔네가 무슨 수로 절세단을 받아와?
막상 나도 떡돌이와 청적에서 무조건 만날 수 있단 확신이 없는데.
“당연히 폐하한테 드린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내 말에 우 귀인은 더욱 기겁해 벌떡 일어났고, 내가 아니라고 중얼거리자 우 귀인은 나를 미쳤냐는 듯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럼 정력제를 대체 누구한테 줬단 거예요. 후궁이?”
내시……라고 하면 이상한가.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우 귀인은 갑자기 커다랗게 웃더니 팔짱을 끼면서 나를 흘겨보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 짝이네. 폐하 총애를 받으면서도 다른 사내에게 정력제까지 먹이면서 놀아나?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놀아나다니요.”
“천 귀인 같은 걸 지키겠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염 귀인이 한심할 정도네요.”
그 말을 하자마자 우 귀인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요?”
불길한 발걸음에 놀라 내가 묻자, 우 귀인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코웃음을 치며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황후 마마께 가서 다 말씀드릴 거예요. 천 귀인이 다른 사내와 사통하고 있단 게 알려지면, 어쨌든 염 귀인은 혐의를 벗을 테니까요.”
이게 미쳤나?
“내가 언제 다른 사내와 사통했단 건데요?”
“폐하가 아닌 사내한테 정력제를 줬다면서요?”
“정력제 주면 다 사통하는 거예요? 그럼 염 귀인이 나랑 사통한 거예요?”
“억지 부리지 마요.”
“너나 부리지 마요.”
“너? 너? 나한테 지금 반말했어요?”
“내가 그랬어요?”
내가 딱 잡아떼자 우 귀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술을 들썩거리다가 확 돌아서더니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쩌죠? 어쩌지요, 소주?”
이 꼴을 본 부성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우 귀인이 황후 마마께 이상한 말을 전하면 어떡해요?”
나는 멀어지는 우 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방 안에 들어가 서책 귀퉁이를 뜯은 다음 세필로 ‘도움 요청’이란 글씨를 쓰면서 측근 궁녀 둘에게 물었다.
“둘 중에 누가 발이 빨라?”
제일 빠른 건 무공을 익힌 귀자겠지만, 귀자는 이런 경우 예외로 하자. 귀자는 황제 사람인지 내 사람인지 애매하니까.
내 말에 원웅이 얼른 나섰다.
“제가 빨라요, 소주.”
나는 원웅에게 찢어낸 종이를 접어 내밀었다.
“청적에 가면 들판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있을 거야. 그 아래에 이걸 두고 와.”
떡돌이는 소문에 빠른 내시니까 이 정도만 써두어도 눈치껏 절세단 남은 게 있으면 가져오겠지.
떡돌이와 내가 연락을 주고받는 통로는 이걸 마지막으로 바꾸면 될 거야.
“빨리 갔다 올게요!”
원웅은 내가 건넨 쪽지를 받고서 황급히 돌아서서 달려갔다.
자신 있게 말한 것치곤 그리 안 빨라 보이지만, 일단 우 귀인보다는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가세요, 소주?”
“안비 마마 방에.”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 다른 후궁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우 귀인이 달려갔으니 어차피 나 부를 거 아냐. 그냥 미리 가지 뭐.”
황후가 시켜서 가면 태감들이 뒤에서 퍽퍽 기분 나쁘게 떠밀 텐데, 그냥 내 발로 가는 게 낫겠지.
* * *
내 예상처럼 안비의 처소 근처에 가자, 황후의 태감들이 이미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마주치자, 황후의 장태감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천 귀인, 황후 마마께서 천 귀인을 찾으십니다.”
“안 그래도 가는 중이었네.”
“예. 들어가시지요.”
안비의 침상 안으로 들어가니, 다행히 안비는 깨어나 약을 먹고 있었고 황후는 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염 귀인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우 귀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무릎을 꿇고 있고.
내가 들어서자 우 귀인과 염 귀인이 서로 반대되는 표정을 짓는다.
염 귀인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우 귀인은 ‘너 잘됐다, 아주 X 돼 봐라’ 하는 표정을.
그걸 보자 좀 묘한 기분이 든다.
우 귀인 재수 없는 거야 뭐 예전부터 겪어서 그렇다 치지만, 염 귀인은 대체 언제부터 날 저렇게 걱정해 준 거지?
이 상황에 왜 염 귀인이 날 걱정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염 귀인과 내가 친하다고 할 때도 떨떠름했는데, 진짜로 우리가 좀 친해졌던 건가?
그건 정말로 묘한 기분이어서, 약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황후 마마.”
어쨌든 염 귀인에게 마냥 감동하고 있을 때는 아닌지라, 나는 황후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리고서 물었다.
“절세단 때문에 절 부르셨는지요?”
“그래. 우 귀인 말로는, 염 귀인이 절세단을 네게 주었고, 네가 그 절세단을 폐하가 아닌 외간 사내에게 주었다는데. 정말이냐.”
“아닙니다, 마마.”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우 귀인이 옆에서 야비하게 외쳤다.
“제가 폐하께 절세단을 도로 받아오면 염 귀인이 받는 오해가 풀릴 거라 했으나, 천 귀인은 폐하께 사람을 보내지 못 하게 말렸습니다. 폐하께 드린 게 아니니 저러는 겁니다. 설령 폐하께서 다 드시고 이미 없다 해도, 폐하께 드린 게 맞다면 받았다고 말씀 정도는 해주실 텐데 이상합니다.”
안비는 기운이 없는지, 그저 이 방 안에서 다들 꺼져줬으면 하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고서 자기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천 귀인. 우 귀인 말이 맞는가?”
“아니에요, 황후 마마. 죄다 거짓부렁입니다.”
“그러면 절세단이 어디에 있단 거지?”
내가 다 먹어버렸다고 하면 너무 도중에 말 바꾸는 티가 날까? 익으라고 땅에 묻어두었다고 하면 황후가 내 말을 믿을까?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서 나는 머릿속을 팽팽 굴려댔다.
하지만 그럴듯한 변명거리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그냥 내가 먹어버렸다고 하자. 안 믿어봐야 냉궁 밖에 더 가겠어? 냉궁 가 보니 아주 나쁘지도 않더만.
거기 갇히게 되면 폐관 수련한다 생각하고 무공 훈련이나 몰입해서 하면 되지.
결국 그냥 내가 먹어버렸다고 우겨보려는 찰나. 갑자기 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