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넌 너무 빠르고, 넌 너무 느려
나는 녹봉 받았다고 큰마음 먹고서 사준 반지인데.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나?
……솔직히 난 난 떡돌이가 반지를 보자마자 좋아서 넘어갈 줄 알았다.
‘아이구 세상에 이렇게 예쁜 반지는 처음 보았다. 너는 안목이 참 뛰어나구나.’ 하고 막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갑자기 또 수묵화로 변할 줄은 몰랐지.
떡돌이가 수묵화 상태로 들어가면 기분이 이상해. 보기엔 좋은데 평소 같지 않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줬을걸. 아까워……라 하려 했는데. 아니네. 아까울 필요 없다. 준 거 도로 뺏어오면 되잖아?
그래, 뺏자! 받고서 안 좋아하면 뺏어야지!
마음을 먹자마자 나는 다시 청적으로 뛰어갔다.
혹시 그 사이에 떠났으면 어쩌나 했는데, 떡돌이는 아직도 청적에 홀로 있었다. 곁에는 승언이도 있고.
내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자 두 사람은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다가 말을 멈추었고, 승언이는 황급히 자리를 비켰다. 그냥 있어도 될 텐데.
“천 귀인? 왜 그러지?”
여하간에, 내가 코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자 떡돌이 영문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
“뭐 두고 갔나?”
뭐 두고 갔냐고?
“암! 두고 갔지!”
“뭘 두고 갔는데?”
그가 묻자마자 나는 흥 콧김을 내뿜으면서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그의 손을 들어올렸다.
“이거!”
맹세컨데, 나는 그러고서 반지를 빼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시만. 너무 빨라.”
떡돌이가 내 손을 뿌리치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팩 돌아서는 게 아닌가.
빠르긴 뭐가 빠르냐고 물으려다 보니 그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승언이 흔들어대는 나무에서 나는 ‘솨아아 솨아아’ 하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떡돌이는 빠져나갔지만, 그의 손이 남긴 온기는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내 비상한 눈치가 상황 판단을 빠르게 마치고 머릿속에 경고장을 울렸다.
설마. 떡돌이는 내가 자기를 데리러 왔다 생각하나?
허! 기가 막혀서!
내가 준 반지를 받고서 그렇게 시무룩했던 주제에, 내가 자기를 데리러 달려온 거라 착각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나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다. 내 발걸음은 산만큼 무겁고 바람만큼 빠르다.
하지만…… 떡돌이는 고깔모자 쓴 태양만큼 잘생겼단 말이지.
그의 오해가 아니꼽지만, 오해를 지적하려다 보니 그의 옆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결국, 머뭇거리다가 나는 잠시 그의 오해를 방치하기로 하고 물었다.
“그럼 넌 어느 속도가 좋아?”
떡돌이는 망설이더니 자기는 아주 느린 게 좋단다.
과연 내시.
순간 감탄할 뻔했지만, 나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삼키고서 그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속도를 물어봤다고 해서 네 마음을 받아주겠단 뜻은 아니야. 알았어?”
* * *
방으로 돌아와 휘파람을 불고 있자니, 원웅이 한 소쿠리 가득 딸기를 가지고 들어오며 물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소주?”
“기분 좋은 일은 없었는데, 기분 좋아질 만한 건 봤어.”
“그게 뭔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떡돌이가 내시긴 하지만, 그래도 후궁이 다른 남자한테 선물을 줬단 말을 하긴 좀 그러니까.
“비밀이야.”
내가 웃으면서 자랑하자 원웅은 “치.” 하고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도 딸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웬 딸기야?”
“어선방 태감이 가져왔어요. 지금 들어온 딸기 중 제일 크고 싱싱하고 맛있는 딸기인데, 폐하께서 태후 마마랑 소주께만 가져다주라 하셨대요.”
“폐하가? 나한테 왜?”
“폐하는 소주를 총애하시니까요.”
황제가 날 총애한단 말은 믿기지 않지만 딸기는 먹겠어.
나는 얼른 손을 수건으로 닦고서 소쿠리 안에 담긴 딸기 중 제일 큰 딸기를 눈으로 찾았다.
그런데 막 제일 맛있어 보이는 딸기를 발견하고 집으려는 순간, 부성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헐떡거리면서 내게 알려주었다.
“소주, 소주, 지금 밖에 난리도 아니에요.”
“왜?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일인데?”
딸기를 입안으로 가져가면서 묻자, 부성이 ‘지금 그거 드실 때가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비 마마께서 딸기를 드시고 쓰러지셨대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입 안 가득 퍼지던 단맛이 싹 사라진다.
내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자, 원웅이 으악 비명을 지르며 빈 접시를 내밀었다.
“뱉으세요 소주!”
* * *
안비가 쓰러졌다니 안된 일이긴 하지만, 나와 친한 사람은 아니니 안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안비 마마는 소주가 지내는 궁의 주인이신데, 당연히 가봐야지요.”
“그런 거야?”
“그럼요. 동영궁에서 지내지 않는 후궁들도 올걸요? 이런 일이 생기면 다들 찾아가고 그래요.”
근데 왜 천소여가 죽었을 땐 아무도 안 왔어?
“얼른 일어나세요, 소주. 다른 궁 후궁들보단 빨리 가야죠. 아니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요.”
납득이 가진 않지만 가는 게 좋다니 일단 일어서긴 했다. 사회생활은 어렵구나.
그래도 원웅과 부성이 옆에서 챙겨 준 덕에 나는 얼른 딸기 먹던 입을 헹군 다음 너무 눈에 띈다는 머리 장신구를 빼고 처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급히 온다고 왔는데도, 안비의 처소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후궁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내가 꼴찌인 분위기는 아니어서 얼른 사이에 끼어 들어가려 했는데.
“뭘 하다가 이제 와?”
같이 동영궁에 사는 규빈은 굳이 내쪽을 향해 언성을 높여서, 나 혼자 지각한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딸기 먹다 왔어요. 폐하께서 나랑 태후 마마한테만 보내주셨거든요.”
“이 와중에 폐하의 총애나 자랑하는 거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됐어.”
와 분위기 진짜 날 섰네.
그래도 못 들어오게 막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나는 다른 후궁들을 따라 안비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자, 기둥에 고정되도록 묶은 장막 사이로 안비가 침상 위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곁에는 안비의 궁녀가 울먹이고 있고, 진료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어의는 잠든 안비의 손목을 가져다가 진맥하고 있었다.
“좀 어떤가?”
잠시 그렇게 어의가 진맥하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황후까지 나타나 물었다.
우리가 들어올 때는 하나하나 인사하지 않던 어의지만, 황후가 나타나자 얼른 안비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무릎을 굽히며 보고했다.
“천만다행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맥이 약하게 뛰다 강하게 뛰길 반복하고 있고 호흡이 고르지 않으니 계속 신중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뭘 먹고 저러는 건가.”
“단일하게 작용해 이런 증세를 나타내는 약재가 있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런 증세를 나타내는 약재도 있어 당장 확답하긴 어렵사옵니다, 황후 마마.”
“책임지고 치료하라.”
“예.”
어의가 다시 안비의 손목을 잡고 마저 진맥하는 동안,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안비 침상에 걸린 휘장만 보고 있었다.
예의라니 오긴 했는데 역시 여전히 내가 왜 여기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난 안비랑 친하지도 않고 책임자도 아니고 의술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있어야 하지? 진맥이 끝날 때까지?’
하지만 아니었다. 어의가 나갔는데도 후궁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았고, 당연히 나도 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촛대처럼 서서 홀로 이글이글하던 황후는 이번에는 안비의 궁녀를 서릿발처럼 꾸짖기 시작했다.
“너는 뭘 했길래 주인이 이렇게 되도록 보고만 있었느냐!”
궁녀는 사색이 되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후 마마!”
여기 사람들은 툭하면 죽을죄래.
전에 촉비도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고 태후마마가 사레 걸리니까 죽을죄라면서 사죄하더니.
다행히 황후도 죽을죄라는 데 동의하진 않는 듯, 한심한 쓰레기를 보듯 궁녀를 내려다보고는 안비의 모든 궁녀와 태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의심 가는 사람이나 정황은 없느냐.”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지, 궁녀와 태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궁녀 한 명이 내쪽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내가 손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해주자 사색이 되어 시선을 도로 내렸다.
제일 뒤에 서 있길 잘했어.
저 궁녀가 왜 날 쳐다보았는진 모르겠지만 미리미리 내 탓 아니라고 선 그어두는 게 낫겠지.
그때.
날 쳐다보았던 궁녀 옆의 옆에 서 있던 궁녀가 갑자기 머리를 조아리더니 큰 비밀을 털어놓듯 외쳤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근래에 의심스러운 사람을 보긴 하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그쪽을 향했다.
“누구 말이냐.”
황후가 싸늘하게 묻자, 궁녀는 혹시나 싶은지 다시 덧붙였다.
“그분이 약을 탔단 건 아닙니다. 그냥 근래 본 사람 중 제일 수상하셨을 뿐이고요.”
“말해보아라.”
황후의 말에 궁녀가 입을 우물거리자, 주위에 있던 후궁들이 덩달아 어깨를 움찔했다.
누구 이름을 말하려나 다들 긴장되는 듯.
잠시 뒤. 머뭇거리던 궁녀가 바닥에 머리를 대며 외쳤다.
“염 귀인이십니다!”
* * *
후궁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황후는 ‘너희들끼리 말을 못 맞추게 하겠다’는 듯 모여 있던 후궁들에게 돌아가라 지시하고 자신의 태감에게는 염 귀인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나는 상황을 더 지켜보지 못하고 내 처소로 돌아와야 했다.
“정말 염 귀인이실까요?”
그간 염 귀인이 내 방을 자주 오갔기 때문인지 원웅은 방에 돌아와서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럴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부성은 반대로 좀 뾰족하게 대꾸했다.
“난 염 귀인이 최근엔 내내 좋았지만, 그럴 분이 아니란 생각은 안 들어. 처음에 우리 소주를 얼마나 괴롭혔어? 자기가 궁지에 몰리니까 막 소주 이름을 팔고 그랬잖아.”
나는 방 가운데 있는 긴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냥 지목당했다고 무조건 끌려가고…… 뭐 이런 구조는 아니지?”
원웅과 부성은 애매하게 서로 눈치를 살필 뿐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무조건 끌려가기도 해? 황궁인데? 아니, 황궁이라 가능한가?
“그건 그렇다 치고. 염 귀인은 나한테 올 때만 동영궁에 오잖아. 너희는 염 귀인이 이상한 물건 들고 오는 거 봤어?”
* * *
“절대로 독이 아닙니다! 그건 궐 밖에서 아주 유명한 의원인 천산괴의가 만든 약이었습니다!”
황후의 명령으로 안비의 방까지 오게 된 염 귀인은, 자신이 수상쩍은 약을 들고 가는 걸 안비의 궁녀가 보았단 진술을 듣자 질겁해서 변명했다. 이 변명은 사실이기도 했다.
“천산괴의?”
황후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옆에 서 있던 상궁녀가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기묘한 약을 만들어 팔기로 유명한 무림인 의원입니다.”
하지만 염 귀인의 변명은 황후를 더욱 미심쩍게 만들었다.
“그런 자가 만든 약을 왜 궐 안에 들인 거지?”
염 귀인은 낯이 붉어졌으나,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보단 훨씬 낫기에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절, 절세단이라고…….”
“똑바로 말하라.”
“알음알음 유명한 정력제입니다.”
“정력제?”
황후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염 귀인은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한심하단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염 귀인이 정력제를 안비에게 먹여 독살을 시도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지 아까와는 미묘하게 다른 어조로 지시했다.
“확인하겠으니 가져와 보아라. 정말 정력제라면 넌 이 일에 관련이 없는 거로 치마.”
짧은 안도도 잠시. 염 귀인과 염 귀인의 궁녀는 볼이 딱딱하게 굳었다. 절세단은 천 귀인이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