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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55화 (55/283)

##  55화. 내가 아닌 나도 나인가?

정면에서 보는 가짜는 더욱 진짜처럼 보여서 개원은 흠칫했다.

‘저건 가짜다.’

하지만 개원은 단호하게 검을 뽑았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다짜고짜 검을 뽑자, 가짜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 순간. 이미 개원은 가짜의 코앞에 다가가 있었다.

놀라는가 싶던 가짜도 빼어난 반응 속도로 개원의 검을 피했으나, 개원은 수천 개의 대나무가 내려꽂히듯 피할 길 없이 상대를 공격해 들어가는 검술로 가짜가 피할 길을 죄다 차단해 버렸다.

그의 일인 전승 독문 무공 천후무의 3초식으로, 지금껏 이 무공을 파훼한 사람은 천년비가 유일했다.

‘저건 가짜다’고 반복해 생각하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저 여자를 시험하듯 이 무공을 사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가짜는 그의 검을 이겨내지 못했다.

손에 차고 있던 굵고 동그란 팔찌를 이용해 검을 막아내긴 했으나 그 힘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대번에 뒤로 튕겨났다.

‘역시.’

개원은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실망하고 말았다.

‘뭘 기대한 건가.’

“윽.”

가짜는 뒤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나무에 부딪혀서야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짜는 벌떡 일어나더니 개원의 허리를 향해 곰처럼 돌진했다.

개원은 그 팔을 밟고 가볍게 몸을 띄워 가짜의 뒤로 날아가면서 검날을 이용해 가짜를 내려쳤다.

가짜가 앞으로 넘어지는 순간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개원은 결투를 빨리 끝내버릴 생각으로 검을 세워들고 가짜의 목을 찔렀다.

하지만 바로 그때.

“!”

개원은 믿기지 않는 걸 발견하고 속도를 늦추었다.

덕택에 이번에는 가짜가 개원의 검을 양손으로 막았으나, 개원은 검에서 손을 떼고 가짜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너!”

그러나 개원이 조금의 틈을 보이자마자 가짜는 발을 뻗어 개원의 배를 걷어찼다.

개원은 그 공격을 피했으나 그 틈에 가짜는 뒤로 훌쩍 물러났고, 인기척은 더욱 가까워졌다.

“잠시!”

바로 돌아서 달아나는 가짜를 개원은 뒤따라가려 했으나, 가짜는 눈 깜짝할 사이 달아나버렸다.

아까 검을 주고받을 때 어색한 동작에 비하면 굉장한 속도였다. 개원 자신과 비교해도 더 빠를 게 분명한 속도.

가짜가 사라지면서 커다란 잎사귀 몇 개가 바스락 흔들렸다.

개원은 자신의 손을 펼쳐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아까 본 가짜의 손이 겹쳐졌다.

‘그 흉터.’

천년비의 손바닥에는 특이하게 생긴 흉터가 있다.

그는 수백 번이나 천년비의 손을 잡았기에 그 흉터의 생김새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천년비를 두려워했기에 천년비의 손바닥에 난 흉터를 볼 일이 없었다.

손바닥은 검을 잡으면 보이지 않고 천년비는 적 앞에서 무기를 놓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 특이한 흉터가 가짜의 손바닥에도 있었다.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어떻게 그 흉터가 가짜의 손에……?’

게다가 저 속도. 비록 그의 무공을 막아내진 못했지만, 경공 속도는 정말 대단했다.

개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혼란스러웠다. 가짜의 손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 * *

황후가 일각째 같은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고만 있어서 황후의 상궁녀 영영은 초조하게 발을 들썩였다.

황후가 보는 편지는 그녀의 부친인 온원 좌칙승상이 보낸 것이었으나 황후의 표정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은 사람 같지 않았다.

짧은 서신이니 이미 다 읽은 지 한참일 텐데, 미동조차 없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황후 마마. 괜찮으신가요?”

결국, 영영은 황후에게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영영이 부르고서야 황후는 눈가를 누르며 편지를 뒤로 덮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께서 천 귀인 얼굴을 한 번 보게 해달라는군.”

“예? 온 대인께서요? 천 귀인 얼굴을 대인께서 무슨 일로…….”

“천 귀인 얼굴을 보여준다면, 우리 가문에서 최대한 닮은 아이를 찾아 이번 후궁 선발에 내보내신단다.”

빈정거림이 섞인 황후의 말에 영영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화를 냈다.

“너무하세요! 황후 마마께서 여기 계시는데 천 귀인 닮은 여자를 들여보내겠다니요!”

황후는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머리가 아프다며 긴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내가 회임하지 못하니 차선책으로라도 들여보내시려는 거겠지. ……천씨 가문도 딸 셋을 들여보내면서 비웃음을 받았지만 결국 셋 다 폐하의 총애를 한 번씩은 받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 회임하지 못하시는 건 전부 폐하가-.”

“영영!”

황후가 눈을 번쩍 뜨면서 이름을 부르자 영영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마마. 실언하였습니다.”

황후는 영영을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일어나라고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당부했다.

“절대로 퍼져나가선 안 될 일이다. 입단속을 철저하게 해라. 이상한 소문이 날 경우 그 불똥이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튈지 아무도 모른단 걸 명심하고.”

“예, 마마.”

* *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나는 비밀 장소에 가서 체력 훈련과 근력 훈련을 한 다음 처소로 돌아와 식사를 했고, 이후엔 다시 밖으로 나가 무공 훈련을 한 다음 주위를 은신술로 돌아다니면서 몸이 무공에 익도록 했다.

요 며칠 내내 계속 이런 식으로 무공 훈련에 좀 더 열중할 수 있었는데, 새 후궁 선발 준비를 하느라 아무도 이상한 행사를 열지 않은 덕이었다.

실제로 새 후궁들이 입궁하려면 아직 시일이 좀 걸린다지만, 입궁하기까지의 절차와 준비도 나름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새 후궁들이 머물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나 새 후궁들에게 배정할 궁녀와 태감을 정하는 것까지

전부 다 일이니까.

‘평화롭네. 좋다.’

무공 수련을 마친 뒤, 나는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걸 구경하면서 처소로 돌아왔다.

씻고 밥 먹어야지. 오늘 부성이 나물밥 해준다고 했는데.

그런데 하품을 쩍쩍 하면서 처소로 돌아와 보니 탁자 위에 웬 보따리가 놓여 있지 않은가.

“뭐야?”

처음 보는 보따리인데? 금색 바탕에 붉은 줄이 놓인 아주 반들반들한 보따리였다. 비싸 보여.

“누구 거야?”

하여튼 내 물건은 아니어서 묻자 원웅이 내 목욕 준비를 하다 말고 밝게 외쳤다.

“소주께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던?”

“거니까 열어보세요.”

뭐기에 저러지? 나는 얼른 보따리를 끌러보았다.

천이 귤껍질처럼 벗겨지면서 아래로 툭 떨어지자마자 드러난 건…… 금으로 만든 화폐였다.

“와! 이거 혹시 녹봉이야?”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 화폐라면 녹봉밖에 없어!

원웅은 “네!” 하고 대답하더니 히히 웃으면서 날 놀렸다.

“좋으시겠어요 소주. 늘 빈털터리가 됐다면서 내내 혼잣말하셨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탁자 앞에 앉아 금량을 하나씩 하나씩 손에 쥐어보았다.

“와.”

금량은 총 다섯 개였다. 5금량이라니. 한 번 더 감탄사가 나왔다.

5금량은 꽤 많은 돈이었다. 5금량이면 5인이나 6인 가족들이 그럭저럭 한 달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만 계산하면 안 된다.

후궁들은 녹봉 외 필수품은 죄다 내무부에서 받거든. 즉, 이 5금량은 말 그대로 그냥 놀고먹고 사는 데 쓰라는 돈!

“그렇게 좋으세요?”

막 방 안으로 들어온 부성도 내가 시시덕거리는 걸 보자마자 놀렸다.

부실한 방음 탓에 밖에서 이미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다 들었나 보다.

부정할 일도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드디어 빈털터리를 벗어났잖아!”

하지만 원웅은 이렇게 기쁜 순간에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가겠어요. 새 후궁들이 들어왔다고 녹봉이 줄진 않아야 할 텐데요.”

나는 좋아서 금량을 양손에 쥐고 한 번씩 입술 도장을 찍어 주다가 깜짝 놀라 원웅에게 물었다.

“녹봉이 줄다니? 줄기도 해?”

그럼 안 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줄겠지요. 내무부에서 굴릴 수 있는 금액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진짜?”

그 말을 들으니 괜히 화가 나네. 사실 난 진짜 후궁이 아닌데도 화가 나.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화가 난다. 젠장.

“폐하는 대체 후궁을 왜 자꾸 들이시는 거야? 보니까 별로 후궁들한테 관심도 없던데.”

“즉위한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회임을 한 후궁이 없으니까요. 황자건 황녀건 아무도 없으시니, 태후 마마께서 불안해서 계속 후궁을 들여보내시는 거지요.”

원웅의 설명에 부성은 주먹을 쥐고 허공을 향해 억울하단 듯이 휘둘렀다.

뭐가 억울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황제가 즉위한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단 말을 들으니, 예전에 잠깐 의심했다가 승언이 때문에 눌러두었던 가설이 떠오른다.

황제 고자설. 아니면 씨 없는 수박설.

흐흠흐흠. 떡돌이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글쎄. 모든 정황이 하나를 가리키네?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으세요, 소주?”

나만이 아는 황제의 비밀에 혼자 낄낄 웃고 있자니, 측근 궁녀는 물론 귀자까지도 궁금해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래도 내가 대답하는 대신 웃기만 하자 부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서럽게 물었다.

“새 후궁이 올 거라는데, 소주께선 걱정도 안 되세요?”

“암! 될 리가 있나.”

자식이 없는 건 황제 쪽 문제인데 후궁 숫자만 늘려봐야 소용없지.

내 자신만만한 대답에 궁녀들과 귀자가 눈을 빛냈다.

“하긴. 폐하는 우리 소주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후궁 몇 명이 들어와도 우리 소주한텐 상대가 안 되죠.”

“그래서 웃으시는 거죠, 소주?”

* * *

“후궁 백 명이 들어와도 황제는 너만 볼 거라 그랬다며?”

“어?”

간만에 청적에서 떡돌이를 만났는데, 얘가 만나자마자 떡을 건네면서 이상한 말을 건넸다.

“누가 그래?”

황당해서 되물었더니, 떡돌이는 그냥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내가 영 못 알아듣는 눈치이자, 떡돌이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게 충고했다.

“네가 한 말이 아니라면 조심해라. 여기선 네가 생각 없이 한 말이 돌고 돌다 이상하게 와전될 수도 있다. 말을 할 땐 신중하게 하고, 네가 한 말을 아랫사람이 생각 없이 옮기지 않게 단속해.”

“내 궁녀나 태감이 내가 한 말을 이상하게 퍼트렸단 거야? 그걸 네가 들었고?”

“꼭 그렇다기보다는…….”

떡돌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뭔데 계속 들고 있어?”

“아. 이거.”

나는 얼른 상자 뚜껑을 열어 떡돌이 앞에 내밀었다. 떡돌이는 상자 안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반지?”

“녹봉 받아서 샀어. 너 주려고.”

“나한테?”

“응. 너한테만.”

항상 떡도 얻어먹었고 하니 뭐. 나는 반지를 꺼내서 떡돌이의 손에 끼워주었다.

좋아. 잘 어울리네. 손가락이 길쭉길쭉해서 잘 어울릴 것 같았어.

그런데 왜지? 떡돌이는 손을 내민 채 가만히 있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내가 “어때?” 하고 물어보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고.

‘왜 저러지?’

* * *

천년비의 의문은 승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서, 그는 천 귀인이 자기 처소로 돌아가길 기다렸다가 황제에게 물어보았다.

“천 귀인께서 녹봉을 받자마자 폐하께 선물을 드렸는데. 기쁘지 않으신지요?”

평소라면 안 좋은 척하면서도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을 황제가 무표정하게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자, 승언이 보기에도 영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그 질문에 황제는 바로 답하는 대신, 발치에 혼자 피어 파들거리는 강아지풀을 꺾어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중얼거렸다.

“천 귀인이 좋아하는 상대는 모든 껍데기를 벗은 ‘진짜 나’인 걸까, 아니면 떡돌이란 가상의 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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