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내가 진짜 계란인 줄 아나?
계란 껍질을 벗겨준다니 무슨 말인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말이 맞는가, 멍해 있는 사이.
황제의 손이 내 어깨쯤 올라오더니 어색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황제가 뭘 하나 보려 했으나 각도상 그게 여의치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눈동자도 최대한 옆으로 굴렸다.
젠장, 그래도 안 보여!
하지만 느낌상 토닥토닥? 황제가 내 어깨쪽 이불 위를 토닥토닥하는 거 같다. 이불 때문에 감각도 잘 없지만 하여튼.
‘진짜로 시침을 들란 건가?’
나는 새삼 또 놀라서 황제를 쳐다보았다. 너무 놀랐더니 눈 깜빡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세상에. 무림에서 악적 소리를 듣던 고수 천년비가 황제와 해보는 건가!
얼굴을 가려놓아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를 보니 황제도 좀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폐하…… 우리 거시기 하는 거예요?”
결국, 나는 대놓고 묻고 말았다.
황제는 대답 대신 나를 한 바퀴 굴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불 끄트머리를 잡고 굴린 거라, 내가 한 바퀴를 옆으로 구르자 날 똘똘 감싼 이불이 자연스럽게 한 겹 벗겨졌다.
“폐하, 우리 거시기 하는 건지요?”
정말로 오늘은 뭔가 다르구나 싶어서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또 날 한 바퀴 더 굴리기만 했다.
어지럽긴 해도 몸을 갑갑하게 감싼 이불이 두 겹이나 풀리자 많이 편해지긴 했다.
이대로 두어 번만 더 구르면 정말 이불이 다 벗겨지겠는걸?
그러나 그 순간. 나를 한 바퀴 더 굴리려는 듯 손을 올렸던 황제가 갑자기 끙 소리를 내더니 내 위에 상체만 겹쳐 엎어졌다.
야하게 엎어진 게 아니다. 헥헥거리면서 산에 가까스로 올라간 사람이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 거기에 엎어지듯 그러했다.
“왜요?”
“기운이 빠져버렸다.”
“아니 뭘 하셨다고 벌써 기운이 빠지시는데요?”
“너 때문이다.”
“제가 뭘요?”
“옆에서 자꾸 거시기 거시기 종알대질 않나, 진짜 계란말이가 되어 있으니 옷을 좀 분위기 있게 벗길 수를 있나.”
뭐야?
“미치겠군. 그 계란옷은 언제까지 입고 다닐 거지?”
이 황제가?
“옷 아니거든요?”
기가 막혀서! ‘계란이 계란이’ 부르다 보니 내가 진짜 계란인 줄 아나?
* * *
황제를 시침 들고, 정확히는 이번에도 시침을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시침을 든 후에 내 처소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고 황후에게 아침 문안까지 가려면 몹시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내가 미지근한 물로 빠르게 씻은 다음 연한 사과색 의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단정히 올리는 동안, 측근 궁녀 두 사람은 나보다 더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문안에 늦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머리를 땋아서 올리는 게 너무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서두른 덕에 늦지 않게 문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궁들이 주르륵 모여 앉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오늘 문안도 빨리 끝나길 바랐다.
“천 귀인. 이쪽이에요.”
그래도 요즘엔 문안에 가면 염 귀인이 아는 척해줘서 그건 좋아. 게다가 같은 귀인이라 옆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안에 들어가자마자 염 귀인이 이름을 슬쩍 불러주기에 나는 얼른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후에는 늘 그렇듯 따분하고 지루하고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는 이야기가 오갔다.
말이 어떻고 황족 누구가 이번에 무슨 일을 어떻게 뭘 했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건데 누구누구가 어쩌고저쩌고.
이러고 있으면 난 좀 무서워지더라. 황궁 사람들은 얼마나 똑똑하기에 이걸 다 알아듣지 싶어서.
절대로 내가 멍청한 게 아니니, 분명 다른 사람들이 똑똑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꼭 단체로 다 모여서 이런 얘길 해야 하나.’
그런데 지겨운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치마 속에서 발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내가 알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하나 나왔다.
“슬슬 새로운 후궁을 들일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근데 그 내용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후궁? 새로운 후궁을 들인다고?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다른 후궁들을 쭉 훑었다. 몇 명이지? 많다. 아주 많아.
그런데 여기서 후궁을 더 들인다고? 미친 거 아냐?
여기서 후궁을 또 들여야 하는 이유를 혹시 나만 이해 못 하는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그건 아니었다.
눈치를 보니 다른 후궁들도 새로운 후궁을 들일 거란 이야기에 달가운 표정들이 아니었다.
염 귀인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다들 어떤 기분인진 알겠지만, 그대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왔단 걸 명심하고 새로 들어올 후궁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이 와중에 표정에 변화가 없는 건 황후뿐이었다. 황후는 유일한 자리니까, 그 밑으로 누가 들어오든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걸까?
“네, 황후 마마.”
윽. 후궁들이 갑자기 동시에 대답하잖아. 또 나 혼자 대답 못 했어.
대체 동시에 저렇게 딱딱 대답하는 눈치는 어디서 배우는 거지?
그런데 새 후궁 입궁 소식이 빠르게 지나가고 이제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나 싶은 순간이었다.
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승빈이 돌연 빙그레 웃더니 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 후궁은 천 귀인 같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어요, 황후 마마. 폐하께서 아주 좋아하실 테니까요. 황후 마마도 후궁 선발에 함께하시지요? 이번엔 성품이나 지혜로움이 아니라 다른 걸 보셔야겠네요.”
내 이름이 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지금껏 황후만 쳐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다 내쪽을 쳐다보았다. 황후 역시도.
내 칭찬……이니까 반응을 해야 하나? 갑자기 왜 날 끌어들이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뜻 같기에 나는 웃으면서 승빈에게 화답했다.
“그래도 너무 얼굴만 보면 쓰나요. 그래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승빈 마마.”
하지만 승빈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난 얼굴 얘긴 꺼낸 적도 없는데, 천 귀인.”
“아무렴요. 하지만 맥락이란 게 있잖아요.”
염 귀인이 자기 무릎으로 내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옆을 보자 그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더 대꾸하지 말란 듯이.
* * *
“승빈은 천 귀인을 칭찬한 게 아니라 비꼰 거예요.”
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염 귀인은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지자 내게 작게 알려주었다.
“어? 그런 거예요?”
내가 놀라서 되묻자 그녀는 혀를 차며 설명했다.
“성품도 지혜로움도 볼 필요가 없다잖아요. 천 귀인은 성품도 지혜도 없이 폐하의 총애를 받았단 걸 돌려서 비꼰 거죠. 아니, 사실 돌려서 꼰 것도 아니었어요. 그 정도면 대놓고 말한 건데.”
“난 전혀 못 알아들었어요. 염 귀인은 의외로 머리가 좋군요!”
내가 염 귀인의 해석 능력에 감탄하자 염 귀인은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폐하는 천 귀인의 이런 면을 좋아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면이요?”
“천 귀인은 속내를 바로바로 드러내고 감추지 않잖아요. 그런 점 때문에 화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상대가 나한테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하면서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편하죠.”
“다들 그러지 않나요?”
“사회생활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누가 그래요.”
“!”
염 귀인에게 핵심을 찔려서 저절로 몸이 움찔한다. 맞다. 나는 친구가 없어.
하지만 다른 몸으로 궁궐에서 살아가니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아지길래, 지금껏 친구가 없던 건 내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악적이라 그런 건 줄 알았지.
아니었나? 별개였나? 성격 때문인가?
한데 염 귀인에게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으려는 찰나. 누군가 성큼성큼 빠른 속도로 걸어왔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자 우 귀인이었다. 지나가는 길……은 아니겠네,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이쪽으로 오고 있어서 나와 염 귀인은 멈추어 서서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곧 우 귀인은 염 귀인 옆,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와서 서더니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염 귀인의 팔짱을 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염 귀인, 천 귀인하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아요.”
한두 번 잡아본 게 아닌 듯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어…… 둘이 싸운 사이 아니었나? 아닌가? 처음 문안 갔을 때 염 귀인이 우 귀인을 막 밀치고. 아닌가? 다른 사람이었나?
“우 귀인.”
어쨌든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염 귀인은 우 귀인을 달래듯 부르면서 자기 팔을 잡은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우 귀인은 여전히 나를 위아래로 흘겨보면서 서운하다는 투로 염 귀인을 흔들었다.
“염 귀인은 내 친구인데 어째서 계략을 꾸며서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게 만든 저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내가 천 귀인 때문에 고생한 생각은 안 나요?”
계략을 세우다니. 무슨 소리야. 그쪽이 날 따라 하고 싶다 해서 내 습관을 알려준 것뿐이었잖아.
“우 귀인, 가서 이야기해요.”
“염 귀인, 그뿐만이 아니에요. 요즘 높은 분들이 얼마나 천 귀인을 노리고 있는지 알잖아요. 가깝게 지내다가 괜히 불똥 튀어요.”
날 노려?
“천 귀인이야 폐하와 태후 마마가 잘 보호해 주시겠지만 우리는 다르다고요. 알잖아요?”
단호하게 말한 우 귀인이 염 귀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고, 염 귀인은 미안하단 신호를 내게 보내면서 우 귀인을 달래며 쫓아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부성이 씩씩거렸다.
“참 치졸해요. 염 귀인이 우 귀인이랑 친하면 소주랑은 친하면 안 되나? 뭐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아니고 저게 뭐래요?”
* * *
천년비가 천 귀인의 몸으로 궁궐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동안, 개원은 천년비를 사칭하는 가짜를 잡기 위해 천년비가 들렀단 소식이 들려오는 곳마다 돌아다녔다.
그는 천년비가 죽은 뒤에라도 편안하길 바랐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헛된 소문으로 내내 괴로워했는데.
죽은 뒤에도 사칭범에 시달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노력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천년비가 흑도 방파를 방문했단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한 끝에 드디어 가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가짜가 야영 도중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길 기다렸다가, 기척을 숨기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짜는 얼핏 보기에 천년비와 정말 흡사했다. 곧은 등. 큰 키. 하나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
무비일색의 얼굴과 뚜렷한 눈썹, 강인한 다리, 긴 팔. 너무 비슷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역시 천년비가 죽은 줄 몰랐더라면 당장 다가가 이름을 부를 만큼.
하지만 그는 천년비가 죽은 걸 확실하게 보았기에 상대의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개원은 가짜가 연못가에 무릎을 대고 손을 물에 넣어 찰랑거리게 하는 걸 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나갔다.
“가짜.”
뒤에서 그가 부르자 가짜가 물장구를 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