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태후와 천 귀인의 공감대
덕춘이를 아냐고? 반사적으로 시선이 아까 떡돌이가 숨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덕춘이는 떡돌이를 대외적으로 부르기 위해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이름인데.
그러는 태후마마야말로 덕춘이를 어떻게 아시고 저런 질문을……?
아아. 아까 내가 떡돌이한테 ‘덕춘아!’ 하고 작게 부른 걸 들었나?
다른 사람들은 더 크게 떠들고 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여튼 그때 태후마마도 떡돌이 얼굴을 봤나 봐.
“태후마마도 아세요?”
일단 확인차 재차 묻자 태후마마는 묘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알지.”
태후마마도 떡돌이를 아시는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떡돌이는 황제의 내관이니까, 오다가다 태후마마를 만났을 수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자니 태후마마가 다시 물었다.
“넌 덕춘이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천 귀인?”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위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태후마마는 빙그레 웃더니 바로 사람들을 물려 주셨다.
“나는 천 귀인과 좀 얘기할 테니 다들 거리를 두고 있어라.”
그 말이 떨어지자 태후마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바다 썰물 빠져나가듯이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우리가 대화를 나누어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가 확보되었다. 권력이 좋긴 좋구나.
나는 힐긋 주위를 보았다. 뒤로 물러났으면서도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들 태후마마가 나를 무척 총애한다고 여기는 눈치다. 사실 내 생각에도 좀 그런 것 같긴 해.
아니, 하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태후 마마한테 떡돌이 이야기를 해도 되나? 이게 문제다.
사실 떡돌이와 만난 과정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라 남들에게 세세히 말하긴 좀 그렇다.
그렇지만 태후마마를 속이다가 진실이 발각되면 큰 벌을 받잖아.
결국, 주저하다가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실하게 해야 할 게 있지.
“태후마마. 제가 덕춘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려면, 우선 태후마마께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내가 뭔 말을 했다고 태후마마는 즐겁다는 듯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 어떤 것이냐?”
“태후마마는 덕춘이의 정체에 대해서 아세요?”
태후마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알지. 너도 아느냐.”
아시는구나! 나는 안도해서 후 한숨을 내쉬고 웃었다.
“그럼요. 다행이에요.”
“다행이라고?”
“태후마마께서 덕춘이에 대해 모르시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애매했거든요.”
“음. 덕춘이는 자기를 드러내길 싫어하니까.”
“암요. 덕춘이는 내시처럼 안 보이고 싶은가 보더라구요. 다른 태감들은 다 당당하게 다니는데, 유독 부끄럼이 많아요.”
“!”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거 있다.
‘어 그 말 맞아’ ‘어 네 말 맞아’ 이러다가 공감대가 형성되면 갑자기 막 웃게 되는 거.
태후마마와 내 상태가 딱 이랬다.
여기에서 태후마마와 나 두 사람만 덕춘이에 대해 알다 보니, 덕춘이 이야기를 나누자 나와 태후마마의 공감대가 확 올라간 것이다.
태후마마도 덕춘이가 평소에 얼마나 고자가 아닌 척 구는지를 떠올리셨는지, 내가 말을 하자마자 돌연 배를 잡고 넘어가셨다.
그걸 보면서 나도 태후마마와 함께 웃었다.
* * *
태후와 천 귀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서로 마주 보고서 웃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태후가 천 귀인에게 기대 웃기까지 하자, 이를 쳐다보던 궁인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태후마마께선 천 귀인을 정말 귀여워하시는군요.”
“그러니까요. 전에 천 귀인이 괴상한 시를 읊을 때도 즐거워하시더라니.”
“저런 걸 좋아하시는 걸까요?”
황후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아파 눈꺼풀을 내렸다.
“황후 마마…….”
황후의 상궁녀 영영은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져 작은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황후는 영영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황후의 어깨가 짧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소리 내지 않고 한숨을 내쉰 것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황후가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피하자, 영영은 황후를 부축해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태후 마마는 정말 너무하세요. 황후 마마는 태후 마마께 정말 잘하시는데, 황후 마마 가문을 견제하느라 절대 친근하게 안 대해 주시잖아요.”
“…….”
“그런데 천 귀인한텐 저렇게 잘 대해 주시다니요. 천씨 가문도 세력이 큰 데다 야심이 큰데. 말이 안 돼요.”
실제로 태후는 황후에게 예의를 갖추어 잘 대해 주었으나, 거기엔 가족다운 애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황후만큼 예의도 없고 황후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황후만큼 영리하지도 않은 맹한 천 귀인을 두고서는 저리 예뻐하는 꼴이 영영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황제 폐하와 태후 마마가 모두 한 사람을 어여뻐하니, 천 귀인은 품계가 빠르게 올라갈 거예요, 마마.”
“그래. 그 가문 딸들은 이미 빈과 비 자리에 올라 있지. 거기에 하나가 더해지는 건 위험해.”
이건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 가문 대 가문으로서도 좋지 않은 일이다.
황후는 무표정한 아래에 슬픈 눈으로 태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천 귀인을 바라보았다.
* * *
늦은 저녁.
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서서히 날씨가 더워지지만, 태후의 옆에는 부채를 든 궁녀들이 있어서 아직은 버틸 만했다.
그런데 서책을 한 장 넘기고 있자니, 문밖에서 “태후 마마!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서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자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모후.”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태후는 서책을 덮고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식사는 하셨소?”
“조금 먹었습니다.”
“조금 먹어서야 됩니까.”
“훨씬 입이 짧은 모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모자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태후의 궁녀가 차를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고 나갔다.
황제는 차를 마시면서 혹시 어머니가 낮에 자신이 금룡궁에 몰래 갔던 일을 말씀하시려는 건가, 생각했다.
갑자기 천 귀인이 부르는 바람에 달아나긴 했는데. 분명 달아나기 전 모후가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태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새로 후궁을 들일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황제는 차에서 나는 꽃향기가 어느 꽃 향일까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양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있는 후궁들도 너무 많은데요.”
“그 많은 후궁 중 아이를 가진 후궁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
“역대 황제 중 이렇게 자식 없는 황제는 아드님이 처음입니다.”
아이를 가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황제는 괜히 눈치가 보여서 다시 차 마시는 시늉을 했다.
“언젠간 생기겠지요.”
“열 명을 낳아도 다섯 명이 죽어요. 아이들은 정말로 약합니다, 아드님. 그런데 이 와중에 한 명도 없는 건 정말 심각한 일이에요.”
“언젠가 튼튼한 한 명이 태어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최소 자식 여섯 명이 태어나기 전엔 계속 후궁을 들일 겁니다.”
태후의 단호한 말에 황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작정 싫다고 하기에는 태후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즉위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아이 하나 없는 황제는 그가 유일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태후에게 그의 대역이 있었단 걸 고백한다면 아마 후궁을 들이는 걸 미룰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앞으론 지금처럼 의무적인 시침 때 편하게 대역을 보낼 수도 없을 터. 황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그러면 천 귀인 품계를 올려주고 싶습니다.”
“이번에 천 귀인이 다른 후궁들 술수 때문에 제일 어려운 요리를 부여받아서 그럽니까? 그게 걱정되어서 몰래 찾아오기까지 했지요?”
얼굴을 가린 면사 아래로 입꼬리가 머쓱하게 올라갔다.
“아시는군요.”
“모를 수가 있나요. 그래서 천 귀인이 한 그 맛없는 요리도 맛있다 칭찬해준 게 아닙니까. 다른 후궁들이 맹한 후궁 하나를 놀려먹는 게 괘씸해서요.”
“맹하다니요…… 얼마나 말을 잘하는데요.”
“난 천 귀인 걸어 다니는 것도 걱정이 됩니다. 길은 잘 찾아다니나 싶어서요.”
황제는 태후가 천 귀인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대놓고 웃지도 못하고 표정을 관리했다.
거의 동시에 태후도 황제를 보면서 ‘연인한테 자기가 내시 취급 받는 줄은 아나’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천 귀인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황제가 정체를 숨기려다가 일이 꼬이면서 벌어진 오해인 것 같아 굳이 풀어주진 않았다.
오해를 풀어주려다가 황제가 황제란 걸 알리게 될까 봐.
황제가 왜 굳이 천 귀인에게 정체를 숨겼는진 모르겠지만, 일부러 감추고 있는데 자신이 나서서 풀어주는 건 아닌 듯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면 품계를 올려주실 겁니까, 모후?”
분위기가 좋아지자 황제는 기대를 가지고서 물었다.
태후가 천 귀인을 어여삐 여기는 것 같으니 품계 올리는 걸 허락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내내 천 귀인을 좋게 표현했으면서 태후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나도 천 귀인이 참 예쁩니다. 하지만 품계는 어여쁘다고 올려주는 게 아닙니다.”
“모후.”
“귀엽단 이유로 품계가 확 높아진 후궁들도 있었지만 결국 끝이 모두 나빴습니다.”
“천 귀인은 다릅니다.”
“천 귀인이 문제가 아니라 천 귀인이 피해를 볼까 봐 그러는 겁니다.”
“!”
“아드님이야 그냥 여색에 빠졌단 소리나 듣고 끝나겠지만, 천 귀인은 피해를 봐요. 높은 곳에 올라가면 화살도 많이 받습니다. 이유 없이 품계가 올라가면 사람들은 천 귀인을 질시할 것입니다. 귀인일 때 실수하는 것과 높은 품계를 지니고서 실수하는 건 책임이 다릅니다. 천 귀인처럼 덜렁대는 후궁은 누구에게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몰라요.”
“그건 그렇지요.”
“그렇다고 영민하다, 교육에 힘을 쓴다, 내명부 일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를 대면서 품계를 올릴 수도 없지요. 사람들 모두 다 천 귀인 맹한 걸 알지 않습니까.”
태후의 단호한 말에 황제는 자조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어쩝니까, 모후. 천 귀인이 공부에 흥미를 느껴서 말도 행동도 영민해지는 게 빠를까요, 품계 높아지는 게 빠를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두 가지나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법이요?”
“천씨 가문에서 대단한 공을 세웠을 때 이 핑계로 품계를 높여주거나.”
“…….”
“천 귀인이 회임하거나.”
“!”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태후는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들어 올리면서 빙긋 웃었다.
“천 귀인이 회임만 한다면, 황자를 낳든 황녀를 낳든 내가 두 팔 걷어붙이고 밀어주겠습니다.”
* * *
황제가 나를 또 시침에 불렀고, 나는 이젠 익숙해진 계란말이 상태로 황제의 침실에 운반되었다.
황제는 늘 그렇듯 먼저 침대 바깥 자리에 누워 있다가 태감이 나를 내려놓고 가자, 아는 척을 했다.
“껍질이 바뀌었구나.”
“껍질이 아니라 이불입니다.”
“탈피한 건가.”
“날이 더워서 태감들이 바꿔준 겁니다. 그리고 얼른 주무세요.”
사람 얼굴에 말이야, 반쪽 화장을 해줘 놓고 비웃고선 뭐 저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해?
나는 황제가 뭐라고 말을 걸어도 자는 척할 요량으로 눈을 딱 감았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황제의 얼굴이 밀착해 있는 게 아닌가.
아이고!
“부담스러워요 폐하.”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면서 그에게 항의했다.
“천 귀인. 계란아.”
“꼭 이렇게 가깝게 있어야 하나요?”
“계란이.”
하지만 황제는 내 말을 흘려 넘기면서 계속 나를 불러대더니, 갑자기 당연한 질문을 했다.
“계란말이 하고 있으면 답답하냐.”
“암요! 폐하도 해 보시면 알걸요!”
내가 단호하게 외치자 황제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났다.
난 그가 또 날 마구 놀려댈 줄 알았다. 자기는 안 답답하다던가, 뭐 그런 식으로.
그런데 아니었다.
“계란 벗겨주랴.”
네……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나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계란을 벗겨줘?
‘이 안은 알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