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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52화 (52/283)

##  52화. 제가 만든 음식 아닌데요!

떡돌이는 설거지 하면 안 되나? 왜? 어선방에서 조리할 거라고 허락받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 아니야. 허락 받았잖아? 분명히 친구 한 명을 더 데려갈 거라 했고, 천손 숙수도 이미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어.

천손 숙수가 왜 갑자기 울먹이는 건지 나로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다.

“왜 울어요?”

결국, 황당해서 대놓고 묻고 말았다.

그러나 천손 숙수는 수달이 세수하듯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비빌 뿐.

‘왜 울어요?’라는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손을 내렸을 때 떡돌이가 설거짓거리 앞으로 가 있자, 천손 숙수는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가 하겠다면서 아예 떡돌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수세미를 가져다가 엄청난 속도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나 요리 안 가르쳐 줄 건가? 나 여기 계속 서 있어?”

내가 황당해서 물어도, 천손 숙수는 이것까지만 다 하고 가르쳐주겠단 이상한 말만 할 뿐 설거지통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천손 숙수는 그릇이 하나도 남지 않고 반짝반짝해지자 그제야 손을 떼고서 간신히 일어섰다.

“이제 나 가르쳐 줄 건가?”

기다림에 지친 내가 힘없이 묻자, 천손 숙수는 떡돌이 쪽을 힐긋 쳐다보면서 그렇다고 웅얼거렸다.

* * *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연습하다 보니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고, 드디어 후궁들이 만든 요리를 태후 마마께 바치는 날이 되었다.

사실 그간 요리 연습을 하면서 나는 좀 미심쩍게 생각했다.

‘그런데 후궁들이 요리를 했는지 숙수가 요리를 했는지 태후 마마가 어떻게 구분하시지?’라고

하지만 이 부분은 당일이 되니 알 수 있었다.

내 처소에 딸린 작은 부엌에서 막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황후의 태감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요리가 완성되자마자 바로 이동해야 하니, 천 귀인께서 요리하실 동안 제가 이 옆에 서 있겠습니다.”

웃으면서 챙겨주는 척 말하지만 결국 직접 요리를 하는지 안 하는지를 전부 감시하겠단 뜻이었다.

나한테만 태감을 보냈을 리 없으니 아마 모든 후궁들이 다 이런 태감을 맞이했겠지.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할까. 궁궐 사람들은 이상해.’

물론 궁궐 사람들만 이상한 건 아니다. 무림 사람들도 이상한 구석이 많지.

예를 들어서 초식을 쓸 때 굳이 자기 초식명을 외치면서 쓰는 거.

난 이게 정말 이해가 안 됐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들은 많은 편이었다.

개원이에게 물어보니 그게 예의라던가? 뭐 그런 말을 했는데.

하여튼 나는 쫓기는 처지에 예의를 따질 필요가 없었으므로, 가끔 이 점을 역으로 이용해 정파 놈들을 공격하곤 했다.

간단하다. 남궁 세가 무인과 싸울 때, 내 무공을 펼치기 전에 일부러 남궁 세가 비급 이름을 외치는 거다.

그러면 남궁 세가 무인은 ‘뭣? 네가 어떻게 우리 가문의 무공을!’ 하고 외치면서 주춤하는데, 그사이에 나는 쓱, 볼일을 보는 거지.

“천 귀인, 다 끝나신 건가요?”

지켜보는 것도 지루한가 봐. 황후의 태감이 옆에서 자꾸 재촉하네.

그만 좀 보채. 덜 익은 음식을 태후 마마가 드시게 되면 그쪽이 책임질 거야? 아니잖아.

그래도 뭐. 거의 다 되긴 했지.

“어. 다 끝났네.”

마지막 재료인 죽순을 투척하면…… 됐다!

나는 빙긋 웃고서 태감에게 내가 만든 역작을 가리켰다.

“이제 가져가면 돼. 그런데 이걸 통째로 담아가나? 아니면 덜어서?”

* * *

부성과 원웅이 내가 만든 요리를 커다랗고 오목한 접시에 먼저 덜어주었고, 이동하는 도중 먼지가 요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 위에 하얀 면 천을 두 겹 덮어주었다.

“이러면 음식이 천에 닿지도 않으니까요.”

이후엔 귀자가 그 접시를 쟁반에 담아서 팔을 위로 비스듬하게 뻗는 모양새로 특이하게 들었고, 나는 부성과 원웅을 데리고서 태후 마마가 계신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태후 마마가 머무는 금룡궁은 황후와 후궁들이 지내는 동쪽 구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하는데, 금룡궁이란 이름 그대로 금색 용이 하늘을 쳐다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내가 도착했을 땐 그 용의 품 안 앞뜰에 이미 많은 후궁들이 모여 있었고, 그 후궁들이 가져온 온갖 음식이 상석에 놓인 긴 탁자에 나열되어 있었다.

태후 마마는 보이지 않았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황후와 후궁들이 모두 도착해 칼처럼 나열해 서자 태후 마마는 그제서야 방 안에서 나왔다.

태후 마마가 나와 탁자 앞에 서자 후궁들은 동시에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고, 나도 얼른 따라 했다.

태후 마마는 일어나라 손짓하고는 번쩍번쩍한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둘러보며 묘하게 웃었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했나 모르겠군. 손도 많이 갈 텐데.”

‘동감이에요!’라고 외치고 싶네. 하지만 황후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더니, 태후 마마의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황실을 위해 열흘이나 제를 올려 주셨으니까요.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한 것들이니, 맛이라도 보아주세요.”

태후 마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개중 가장 가까이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그러면 저것부터 먹어볼까. 붉은 양념이 눈에 확 들어오는군.”

손짓을 하자마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궁녀 두 명이 얼른 달려갔다.

그러더니 빈 그릇 두 개를 가져다 음식을 더는데, 태후 마마에게 가져가기 전에 한 명이 먼저 음식을 한 입 먹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한 명이 다른 그릇을 태후에게 가져갔다.

태후가 그 음식을 먹는 동안 앞뜰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태후 마마는 붉은 무언가를 한 입 먹으려다가 도로 그릇에 내려놓더니, 한숨을 섞어 다그쳤다.

“날 체하게 할 셈들이냐. 왜들 내 입만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군. 여긴 격식을 차린 자리가 아니니, 다들 본 후는 그만 쳐다보고 편하게 이야기 나누며 즐겁게 있도록 하거라.”

그러고서 태후 마마가 손짓을 하자, 후궁들은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가 옆에 있는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후 마마가 그래도 못마땅한 표정이자 후궁들의 목소리는 좀 더 높아졌다.

와. 수다 떠는 것도 명령으로 가능하다니! 놀라운데?

어쨌든 태후 마마가 편하게 있으란 명령까지 내려준 덕에 처음에만 경직된 분위기였지, 이후에는 다들 연회 때처럼 서로 웃고 떠들면서 놀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태후 마마가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빠르게 눈으로 살피는 건 멈추지 않았지만.

“저건 황후 마마가 하신 음식 아닌가요?”

“그러네요.”

“맛있으신가 봐요! 계속 드시네요. 아까 규빈이 한 요리는 한 입 드셨다가 뱉으셨잖아요.”

“황후 마마는 못 하는 게 없네요. 요리할 일도 거의 없으실 텐데.”

나는 누가 음식 먹는 걸 구경하는 취미는 없기에 태후 마마 쪽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촉비와 혜비가 내 근처에서 자꾸 상황을 실시간으로 얘기해주는 통에 태후 마마가 누구 음식을 먹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지겹네…….’

그런데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촉비. 태후 마마께서 그대가 만든 완유슈를 드시려나 봅니다.”

저만치 나무 뒤쪽으로 낯익은 얼굴이 빼꼼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떡돌이?’

쟤가 왜 저기 있어?

* * *

한 입씩 먹을 뿐이라지만 많은 후궁이 한 음식을 죄다 먹는 건 태후에게도 곤욕이었다.

특히 태후는 소식가였기에 이렇게 많은 음식을 필수적으로 한 입씩 먹으려니 조금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황후와 후궁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먹다 보니, 입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눈길은 자꾸 여기저기로 흘러갔다.

사실 태후가 자기가 먹는 걸 쳐다보지 말라고 한 것도 이러려고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가 태후의 눈길은 요즘 그녀의 아들이 가장 총애하는 귀인에게 닿았다. 맹한 천 귀인.

오늘도 다른 후궁들은 태후를 의식하거나 자기들끼리 웃고 즐겁게 지내는데, 천 귀인은 혼자 엉뚱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뭘 저리 보는 건가, 생각하고 있자니 이번엔 그쪽을 향해 활짝 웃으면서 “덕춘아!” 하고 작게 외쳤다.

아는 사람이 있는 건가?

태후는 촉비가 만들었단 완유슈를 입에 넣으면서 천 귀인이 쳐다보는 방향을 같이 보았다. 덕춘이가 누구…….

“풉!”

아들이었다.

* * *

분명 내 쪽을 보는가 싶던 떡돌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쏙 나무 뒤로 머리를 감추더니 달아나 버렸다.

뭐야…… 내가 잘하나 보러 온 거 아니었나? 왜 그냥 가는 거야? 자유로운 분위기라 구경해도 되는데. 주위에 다른 구경꾼들도 많고…….

하여튼 괜히 서운해서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났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니 태후 마마가 기침을 하고 있고, 황후와 태후의 궁녀가 놀라서 태후 마마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레 들렸구나.

태후 마마는 몇 번이나 기침하다가 좀 괜찮아지자 허리를 펴면서 한 손으로 궁녀와 황후에게 괜찮다고 손짓했다.

두 사람이 반 걸음 뒤로 물러나자, 태후 마마는 민망한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거의 동시에 내내 미풍처럼 잔잔히 있던 황후가 촉비를 향해 버럭 외쳤다.

“무슨 음식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태후 마마께서 이러시는 게냐!”

“괜찮다. 내가 실수한 거지.”

태후 마마는 황후를 말렸지만, 황후는 괜찮은 표정이 아니었다.

황후는 촉비가 음식에 일부러 매운 고춧가루라도 뿌린 거라 확신하는 얼굴로 촉비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저렇게 화내다니. 진짜 고춧가루 탔나?’

반면 촉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털썩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후 마마. 송구합니다, 황후 마마.”

죽을 죄는 아니지 않나…… 촉비가 태후 마마가 사레 걸릴 걸 예상했던 것도 아니고.

촉비는 이미 내게 온매화로 골려 먹은 적이 있기에 난 별로 저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건 좀 이치에 맞지 않는데, 생각하고 있자니 웬걸. 태후가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화가 많이 났구나! 분노했어! 촉비를 때리려나 봐!

나도 놀랐지만, 촉비는 더더욱 놀라서 덜덜 떨었다. 촉비 옆에 서 있던 혜비 역시도 달달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천 귀인.”

태후 마마는 뜬금없이 내 앞으로 와 서시더니 날 부르셨다.

어? 나? 나 왜?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촉비에서 내 쪽으로 몰렸다.

나는 얼떨떨해서 태후 마마를 쳐다보다가, 황후가 태후 마마 뒤에서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푹 수그리면서 대답했다.

“제가 만든 거 아닌데요, 태후 마마.”

“천 귀인!”

하지만 황후가 또 호통을 치는 바람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황후. 다그치지 마라. 애가 무서워서 떨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의외로 태후 마마는 화를 내는 게 아닌지 오히려 황후에게 날 다그치지 말라 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외다 싶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태후 마마는 내게 이상한 말을 물었다.

“덕춘이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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