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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51화 (51/283)

##  51화. 이 사람 최고 숙수 맞아?

“……하니, 너희는 각기 요리를 하나씩 맡아 태후 마마께 바치거라. 반드시 직접 하여야 한다. 기한은 열흘. 그 안에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도록.”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발단은 태후가 열흘 간 궁중의 홍복을 빌기 위해 천온사에 가서 제를 올리고 온 일이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문제는 거기서 터졌다.

황후가 문안 온 후궁들에게 뜬금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태후 마마가 우리를 위해 열흘간 제를 드리고 왔으니, 우리도 그 답례로 각기 요리를 하나씩 만들어서 선물 드리자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태후 마마 입장에서 후궁들이 어설프게 만든 요리가 좋겠어, 어선방의 능력 좋은 숙수들이 만든 맛난 요리가 좋겠어?

후자다 후자. 누가 생각해도 후자라고!

후궁들이 정성을 담아 직접 만든 요리는 그거다. 하등 쓸모없지만 버리지도 못할 생일 선물.

그런데 답례로 요리를 바치자니. 태후 마마가 과연 좋아할까?

어쨌든 하라면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열흘 간 풀만 먹고 온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쓸모없는 일이었다.

“촉비, 태후 마마께서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누가 어떤 요리를 할지 네가 후궁들에게 정해주어라.”

황후가 요리 목록을 촉비에게 내밀며 이렇게 명령을 내렸으니까.

아니, 누가 무슨 요리를 잘하고 못할지 촉비가 어떻게 안다고 저런 지시를 내리지?

어쨌든 덕분에 촉비가 ‘넌 무슨 요리를 해라.

넌 무슨 요리를 하고.’라며 정해줄 동안, 나는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제발 쉬운 요리가 주어지길 기다렸다.

너무 어려운 요리를 주진 않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난 촉비랑은 싸운 적이 없잖아.

알력 다툼을 한 적도 없고. 쉬운 요리는 안 주더라도 어려운 요리를 주지도 않을 거야.

“천 귀인은 온매화를 만들도록 해라.”

나는 온매화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촉비와 싸운 적이 없기에 그게 어려운 요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온매화를 만들란 말을 할 때 촉비 표정이 워낙 인자하기도 했고.

“온매화라니. 촉비 마마가 천 귀인을 싫어하나 보네요.”

하지만 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염 귀인이 해준 말 덕에 온매화가 어려운 요리란 걸 알게 되었다.

“왜요?”

염 귀인은 내가 당황해서 묻자, 바보 보듯 쳐다보았다.

“온매화는 웬만한 솜씨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음식이잖아요.”

“네?”

“간을 맞추는 게 무척 까다롭대요. 잘못하면 너무 짜거나, 싱겁거나 매워진다고.”

와. 그런 걸 나한테 만들라 했다고? 그 온화한 얼굴을 하고서?

“아이고오!”

“천 귀인, 요리 못 하나 보네요.”

“미래의 나는 온매화를 잘할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온매화를 만들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요리 못 한단 거잖아요.”

“촉비는 나랑 원수진 일도 없는데. 왜 나한테 어려운 요리를 맡겼을까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염 귀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 귀인은 선두에 서 있으니까요.”

“무슨 선두요?”

“궁궐에 들어온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주를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언제 끝날진 몰라도 선착순인 건 확실히 알죠. 그러니 앞에 있는 천 귀인이 공격당하는 거예요.”

“내가 왜 선두예요? 선두는 폐하 아니에요?”

“폐하도 경주를 하지만 우리랑 같은 경기장에 있진 않죠.”

“그럼 선두는 황후 마마 아녜요?”

“총애로 따지면 천 귀인이 선두예요. 누구한테 물어도 그럴걸요?”

“말도 안 돼!”

만날 때마다 계란이라면서 이불말이나 시키는데 그게 최고 총애를 받는단 증거라니!

황후한텐 살갑게 대하면서 나한테 놀려대기만 한다고!

내가 턱에 힘을 주자 염 귀인은 한 번 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천 귀인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온매화를 만들어야 했을 거예요.”

* * *

“대충 만들면 되지 않을까? 후궁 수가 총 몇이야? 많잖아. 태후 마마가 우리가 한 음식을 다 먹진 않을 거야. 어차피 특별히 맛있는 거 한두 개 빼놓곤 맛만 살짝씩 보실 텐데. 그냥 ‘음!’ 하고 넘어갈 수준이면 되지 않을까?”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부성과 원웅을 불러 놓고 이 일을 설명한 다음 내 비상한 의견을 털어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원웅과 부성은 ‘무슨 헛소리실까?’ 하는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귀자마저도.

“왜? 내 말이 틀렸어?”

원웅은 친정에서부터 천소여를 따라온 궁녀답게 비교적 솔직하게 내 의견에 반박했다.

“황제 폐하 총애도 중요하지만, 내명부에서 어깨를 펴려면 태후 마마 총애도 필요해요, 소주.”

부성도 얼른 거기에 말을 보탰다.

“맞아요. 품계가 올라가기 위해선 태후 마마 지지도 필요해요. 황제 폐하가 품계를 올리려 해도 태후 마마가 반대하시면 쉽지 않대요.”

귀자도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한마디를 더했다.

“모자가 원수지간이 아닌 이상, 내명부 일은 황제 폐하도 태후 마마께 한 수 접습니다. 대부분요.”

뭐야…… 그럼 어떡해?

“난 온매화를 먹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 만드는 방법은 당연히 모르고. 그런데 잘 만들기까지 해야 하다니, 어떻게 하란 거야?”

* * *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청적에서 떡돌이를 만났을 때 사정을 털어놓고 온매화란 걸 먹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너는 ……니까 옆에서 조금 먹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떡돌이는 중간에 생략된 부분이 뭐냐면서 미심쩍어했지만,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고 둘러대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도 일단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떡돌이에게 상담한 건 무척 잘한 선택이었다.

“꼭 잘 만들어야 하나? 어차피 태후 마마는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 드실 텐데. 후궁 수가 몇이야. 안 그래?”

첫째. 떡돌이는 나와 흡사한 말을 해서 내 기분을 좋게 해주었고.

둘째. 떡돌이는…….

“어선방 최고 숙수라면 온매화 만드는 방법을 알 거다. 내 지인의 지인이 그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니 알려주라 부탁해주지.”

생각 이상으로 더욱 대단한 방법을 알려주었으니까!

“지인의 지인이 어선방 최고 숙수랑 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 가능하겠다!’

떡돌이는 황제의 내관이니까.

지인도 신분 높은 내관일 거고, 그 지인의 지인도 신분 높은 내관일 테니 알 수 있겠구나. 우와!

간만에 떡돌이가 참 야무지고 똘똘해 보인다.

내가 몇 번이나 입을 열고 감탄하다 엄지를 치켜세우자, 떡돌이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더욱 큰소리쳤다.

“내일 미시에 어선방으로 가봐. 그 시간에 제일 한가하다 했으니.”

“갔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바쁘다고 하면 어째?”

“내가 부탁해두지. 내 지인의 지인과 아주 친하다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다.”

“고마워!”

내가 활짝 웃으면서 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두드리자, 떡돌이는 어선방에 가게 되면 내가 불편할지 모르니 자기도 내일 그쪽으로 오겠다는 둥 중얼거리고서 황급히 일어섰다.

“어디 가?”

“볼일이 생각나서.”

* * *

다음날 시간에 맞추어 나는 어선방으로 찾아갔다.

부성과 원웅은 ‘그 약속 사기 아니에요?’라고 걱정스러워했지만, 어선방 앞에 가자 정말로 태감 하나가 나와 있다가 내가 안쪽에 들어가도록 안내해주었다.

심지어 어선방 안에서도 최고 숙수만 사용한다는 조리실로!

게다가 이 시간은 한가하단 떡돌이 말이 정말인지, 안내해주는 태감 외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음 뵙습니다, 천 귀인. 소신이 천손 숙수입니다.”

태감이 나를 조리실에 데려다주고 나가자, 미리 그곳에서 재료까지 다 가져다 놓고 대기하던 최고 숙수가 다가와 내게 인사했다.

떡돌이 지인의 지인이 무어라 설명을 한 건지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

그러면서도 표정은 무덤덤한 것이, 정말로 숙수들의 정점에 선 요리의 고수다운 위인이었다.

‘떡돌이도 용할 때가 있네!’

어쨌든 나도 그의 공손한 태도에 맞추어 위엄 있는 후궁인 척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고맙소. 아, 그런데 친구 한 명이 더 올 텐데. 그래도 되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 떡돌이 이야기도 그에게 물어보았는데, 천손 숙수는 이 부분도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예, 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좋아, 떡돌이 지인의 지인 완벽해! 완벽하게 준비해 놨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마침 딱 떡돌이 얘기를 하자마자 문이 달칵 열리면서 떡돌이가 들어왔다.

나는 웃으면서 그쪽을 가리켰다.

“저기 오네. 떡…….”

하지만 ‘떡’까지 말하고 나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말을 멈추었다.

떡돌이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잖아. 이런 데서 부르기엔 격식에 맞지 않아.

이 사람은 황제의 요리만 다룬다는 최고 숙수라고! 천손 숙수!

그런 사람 앞에서 ‘떡돌이 떡돌이’ 하는 건 안 될 일이지.

떡돌이도 체면이 있는데, 대단한 어선방 최고 숙수 앞에서 떡돌이라 불리고 싶진 않을 거야.

내 안의 배려심이 폭발했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꿔서, 내가 아는 이름 중 제일 멋들어진 이름으로 떡돌이를 불러주었다.

“태천아!”

하지만 내가 이미 ‘떡’ 자를 앞에 말해서인가?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천손 숙수는 아까의 무덤덤한 표정은 어디 가고, 눈알이 톡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래져서는 나를 확 돌아보았다.

경악한 얼굴. 그 표정을 보자 아차 싶었다.

어휴, 바보! 이미 ‘떡’까지 말한 다음 태천이라 부르면 어떡해!

떡돌이 이름이 떡태천이 되어 버리잖아! 이름이 더 이상해졌어!

이를 어째. 하지만 갑자기 성을 정정하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주저하다가, 나는 아직도 놀란 표정인 천손 숙수에게 떡돌이를 가리키며 아까 한 말을 조금 수습했다.

“떡 씨 아니고 덕 씨라네.”

하지만 눈치 없는 떡돌이는 눈살을 구기면서 내게 다가와 물었다.

“덕태천은 또 누구야?”

“너.”

“남의 이름 좀 자꾸 마음대로 바꿔대지 마라.”

어휴 얘 눈치 없는 거 좀 봐. 내가 다 너 위해서 한 건데!

나는 힐긋 천손 숙수를 보았다. 내가 이름 가지고 거짓말한 줄 알고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기분 나쁜가 봐.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나?

천손 숙수는 이제는 눈만 아니라 입까지 커다랗게 벌리고서 입을 뻐끔대는 중이었다.

저러다 턱관절 빠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좀 됐는데.

다행히 떡돌이가 그를 향해 턱을 다물란 손짓을 해주자 얼른 정색하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천손 숙수에게 요리를 알려 달라고 졸랐다.

“자! 태천이도 왔고 이제 시작하면 될 것 같소!”

* * *

천손 숙수를 보았을 때 내 첫인상은 그가 숙수들의 정점에 선 자답게 아주 뭐랄까. 고수의 풍모가 있단 거였다.

왜, 자신의 실력에 당당한 이들이 풍기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황제의 요리를 책임지는 이만이 풍길 수 있는 위풍당당함!

후궁인 내게 예의와 정중함을 갖추어 대하면서도 자신의 품격을 잃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당당한 태도는 잠깐이고. 천손 숙수는 막상 요리 수업을 시작하자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향해 말했다.

“온매화 만드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천 귀인.”

턱 들고서 ‘나 여기 있소’ 하고 알려주고 싶네.

“우선 채소 다듬는 법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한숨이 나온다.

염 귀인은 지금 황궁에서 내가 황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고 했지.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본다 했어.

천손 숙수도 아마 그래서 이렇게 바닥만 보는 모양이다.

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인 게 뒤늦게 생각나서. 상대하기 불편한 거겠지.

그래도 모른 척해주려 했건만.

“여기를 이렇게 잡고 이쪽으로 비스듬하게…….”

천손 숙수가 채소 다듬는 법을 알려 주겠다면서 칼과 채소를 보는 게 아니라 자꾸 자기 발만 쳐다보자, 이래선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간 온매화에 넣을 채소 다듬는 방법이 아니라 손가락 써는 방법만 배울 게 분명했다.

그럼 안 되지. 손가락 써는 방법도 유용하긴 하겠지만, 이미 그건 아니까.

결국, 나는 배려심을 발휘해서 얼른 떡돌이를 끌어다가 그의 옆에 세워 주고서 온화하게 말했다.

“채소는 덕춘이가 썰 거요. 얘한테 알려주면 되오.”

이러면 됐지? 덜 부담스럽지?

“내 이름 또 바뀌었다.”

떡돌이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떡돌이에게 그러지 말라 눈치를 주고서 천손 숙수에게 재차 권했다.

“덕춘이한테 알려주시오.”

그런데…… 어째서지? 천손 숙수는 오히려 더욱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의아해서 보고 있자니 천손 숙수가 갑자기 바닥을 향해 외쳤다.

“전 천 귀인께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요리는 천 귀인께서 하실 테니까요. 덕 대인께 알려드리는 건 소용이 없다 사려되옵니다.”

“그런가?”

“예!”

음……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네. 왜 저 말까지 바닥 보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소.”

어쨌든 일리가 있는 말이라 내가 수긍하자, 천손 숙수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럼 덕춘이는 가서 설거지해.”

내가 떡돌이에게 한쪽에 쌓인 접시를 가리키며 지시하자마자 “안 됩니다!” 하고 외치며 아예 대놓고 울고 말았지만.

아니, 이 사람 최고 숙수 맞아? 요리를 눈물로 만드나, 왜 자꾸 흐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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