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절색?
내가 미움을 하도 많이 먹고 살아서, 다른 건 몰라도 누가 나 싫어하는지 아닌지는 빠삭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내 지금까지의 경험은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영빈은 널 싫어해.
웃으면서 팔짱을 꼈지만 속으로 팔을 부러뜨리고 싶었을걸?
“저기, 부성아. 혹시 내가 천우여? 그 동생이랑 사이 나빴어?”
그래서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친정에서 내려온 부성을 불러놓고 대놓고 물어보았다. 영빈이 나 싫어하냐고.
부성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요? 우여 아가씨가 소주께 섭섭하게 대하세요?”
“응. 많이.”
처음에는 내가 먼저 말실수를 했으니까 영빈이 기분 나쁠 만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원래 사이가 나빴을 거 같다.
그렇잖아? 사이 좋은 언니가 기억을 잃고 말실수를 하면 처음에는 그걸 정정해주지, 둘만 있길 기다렸다가 위세가 어쩌구 그런 말을 했겠어?
같은 실수를 연거푸 반복하면 그때는 이전에 사이가 좋았더라도 좀 짜증이 날 테지만.
연비 봐봐. 무섭긴 하지만 연비는 내가 기억을 잃고 말실수하는 부분에 대해선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는걸.
오히려 자기가 입궁 당시 내게 해주었단 조언을 반복해서 해주었지. 이해 안 가는 조언이긴 했지만.
“사이 나빴지?”
역시 이게 답이야.
하지만 의외로 부성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사이가 안 나빴다고?”
“네. 우여 아가씨는 원체 순하셔서 누구랑 척지고 그런 거 못 하세요.”
“순하다고?”
하긴. 연비한텐 순하게 굴었지.
그래도 부성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영빈이 항상 툴툴대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뭐. 그럴 수 있다. 정파의 영웅이었던 개원이는 연인인 내 뒤통수를 때렸고, 정명 공대하다는 무림의 거물은 제자 열 명을 끌고 와서는 일대일 정면 대결을 펼치자는 개소리를 해댔으니. 정명 공대 맞나?
하여튼 남들에게 정의로운 사람이 내게도 정의로울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지.
사람에 대한 평가는 평균치로 내려지지만 일대일 대인관계는 절대치인걸.
‘어쨌든 날 싫어하는 건 확실하니 앞으론 피하자.’
연비는 자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그건 그른 것 같고.
* * *
“천씨 가문 세 자매가 다 모였다고?”
천 귀인의 행적에 관해 보고받은 황제는, 보고 내용 중 탐탁지 않은 내용이 있자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천씨 가문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이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씨 가문이 야심만만하긴 하지만 황가를 휘두를 정도로 세력이 강성하진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폐하.”
황제의 측근 태감인 오원요가 애써 좋은 쪽으로 말해주었지만 황제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안다. 하지만 평생 술이나 먹고 살던 양가의 촌부도 제 누이나 딸이 총애받는 후궁이 되면 권력을 잡고 나라를 좀먹지 않느냐.”
“어찌 그런 망군들과 폐하를 비교하십니까. 폐하는 사감에 취해 국무를 허투루 보실 분이 아니신데요.”
“내 누이는 얼마나 영민한 분이었지 잊었느냐.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지혜롭고 영리한 분이었다. 아니, 누이까지 안 가더라도 나를 보아라. 내가 고궐 그자를 얼마나 따랐지?”
“폐하…….”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천 귀인은 비상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난 그런 여인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두려워. 눈 깜짝할 순간 판단력을 잃고 불구덩이란 걸 알면서도 다가가고 있을까 봐.”
촉촉한 눈시울로 황제를 보던 오원요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천 귀인이 비상하리만큼 매력적이던가?
그의 눈엔 매력은 모르겠고, 그냥 좀 맹해 보였다. 게다가 입은 얼마나 거침없는지.
그런데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신단 건…….
‘이미 판단력이 반은 사라지신 거 같은데.’
오원요의 표정을 본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 이상하게 보지 말라. 짐도 천 귀인 성격이 괴상한 건 안다.”
오원요는 측근 태감인 자신이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걸 자책하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누가 보아도 천 귀인은 괴짜지.”
황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괴짜인데도 짐이 천 귀인에게 자꾸 물러지는 건 너무 절색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구나.”
오원요는 더욱 당황했다. 절색? 절색? 천 귀인이 절색? 그는 절색이란 단어의 뜻을 떠올려 보았다.
굉장한 미인. 엄청난 미인. 대단한 미인.
‘폐하…….’
오원요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세상에. 우리 폐하 눈썰미 나쁜 거 좀 보게.
미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백 사람에게 절색이 누구냐 물으면 아흔아홉 명 정도는 연비를 꼽을 것이다.
천 귀인도 물론 미인이었다. 하지만 후궁들 사이에서는 좀 묻히는 편이었다.
솔직히 오원요는 천 귀인이 후궁들 틈에 끼어 있으면 잘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절색이라고? 차라리 흰 절편 같다면 동의했을 것이다.
‘폐하. 소신이 보기에 폐하는 이미 사감에 좀 취하셨습니다.’
* * *
‘이 꽃 이름이 자목련이던가?’
청적에 갔더니 예전에 개원이가 이름을 알려준 꽃이 피어 있었다. 자목련. 꽃 주제에 어두침침한 녀석.
하지만 개원이는 이 꽃이 좋다고 했다.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날 닮아서 좋다고 했지.
당시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욕이었던 걸까.
“좋아하는 꽃인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자목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람이 불어온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떡돌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좀 반가웠지만, 의리도 없고 입도 가벼운 떡돌이와 좀 거리를 두기로 한 참이기에 나는 일부러 팩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너무 쉽게 보이면 안 된다.
떡돌이에게도 알려주어야 했다. 그가 가볍게 굴 때마다 우리 사이의 우정이 팍팍 깎이고 있단 걸.
“이거. 꽃떡.”
“흥. 내가 꽃떡 하나 받고서 널 용서해 줄 것 같아?”
“도로 가져갈까?”
“그건 아냐. 일단 거기 놔둬 봐.”
“거기가 어딘데?”
허리를 쫙 펴고서 위엄 있게 손을 뒤로 내밀자, 뒤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난다.
그래도 순순히 떡을 주기에 받아서 입으로 얼른 가져…….
“손이잖아!”
하지만 그가 내게 건넨 건 손이었다. 떡이 아니라.
손을 먹을 뻔했다가 깜짝 놀라서 패대기치자, 떡돌이는 자기 손이 벌레냐는 둥 구시렁거리면서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내가 지금 너랑 장난칠 기분으로 보여?”
그 태연한 모습에 약이 올라 식식거리자, 떡돌이는 이번에는 제대로 꽃떡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화가 났기에 나는 그가 쥐여준 꽃떡을 위엄 있게 팽개쳐 버렸다. 그런데…… 너무 세게 팽개쳤나?
떡이 바닥에 꽂히면서 풀이 약간 위로 튀자, 떡돌이 얼굴이 굳었다.
그의 옆모습을 보자 너무 미안해져서 나는 얼른 떡을 도로 주워서 후후 턴 다음 입에 넣었다,
그러고서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이러면 됐지?
“젠장! 천 귀인!”
안 됐나 보다. 오히려 떡돌이는 기겁해서는 내 입에 자기 손가락을 넣으려 들었다.
“먹지 마! 뱉어라!”
“괘안아.”
윽. 입에 떡이 들어가 있는데 떡돌이가 손가락까지 넣으니까 발음이 새잖아!
나는 떡돌이 손을 퉤 뱉고서 떡은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대단한 무림 고수인 내가 새는 발음을 해대다니! 절대로 안 될 일이지.
하지만 떡돌이는 내가 떡을 삼키고서 ‘히’ 웃자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지 마라!”
“기분이 좀 풀렸어?”
“풀렸냐고? 놀랐다! 그걸 왜 먹지?”
“뭐 어때. 난 땅에 떨어지고 하루 지난 것도 잘 먹어. 진흙이나 오물 같은 데 떨어진 게 아니면 상관없어.”
쫓기다 보면 제대로 끼니를 못 챙길 때도 있지. 굶는 것보단 땅에 떨어진 음식이라도 먹는 게 백배 낫다.
하지만 떡돌이는 내 말에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땅에 떨어지고 하루 지난 음식 먹을 일이 뭐가 있는데?”
아. 없나? 하긴. 천소여는 귀한 집 자제니까 없겠구나. 이런. 말실수다. 말 돌려야지.
“꽃떡에서 특이한 맛이 나. 꽃이랑 풀이랑 흙 섞인 맛. 신기해.”
“꽃밭에 떨어진 걸 주워 먹으니 그런 맛이 나지!”
아. 그런가.
떡돌이는 이마에 자기 손을 올리더니 연극배우처럼 한탄했다.
“넌 집안에서 그런 대접을 받아? 어째서? 넌 적출이고, 내가 알기로 네 모친인 공오부인도 종리씨 가문 적출이어서 권력이 막대하다 알고 있는데?”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인가. 나는 너무 무식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뭐라고 하는지 아주 조금 못 알아듣겠어. 네 말이 너무 빨라서 그런가 봐.”
아니, 그보다 떡돌이 얘는 천소여 집안 사정에 왜이리 빠삭해?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혹시 내 정체를 의심할까 봐 나는 얼른 둘러댔다.
“나 귀하게 잘 컸어. 땅에 떨어진 거 막 주워 먹고 그렇게 안 컸어!”
하지만 한 번 말을 바꿔서인가. 떡돌이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집안에서 천대받으며 떨어진 밥이랑 반찬을 주워 먹는 천소여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아닐 건데. 아마도.’
하여튼 고작 떨어진 음식 좀 주워 먹었다고 이리 난리라니.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내시들은 집안이 가난해서 먹고살기 위해 거세를 하고 내관이 된다던데. 떡돌이는 곱게 큰 그 소수인가보다.
“손 좀 봐도 돼?”
나는 슬그머니 떡돌이의 손을 가져다가 그의 손바닥과 손등을 살폈다.
손을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니 과연. 굳은살이 있긴 하지만 손등은 아주 말랑말랑했다.
손바닥은 거칠지만, 손등이 참 곱고. 맞아, 곱게 컸네.
“!”
하지만 내가 너무 손을 오래 만졌나. 보라고 줄 땐 언제고 떡돌이는 갑자기 자기 손을 휙 뺏어가 버렸다.
너무하네. 내가 째려보자 떡돌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돌연 발치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을 보며 말을 돌렸다.
“우리 사이가 이 꽃처럼 오래…….”
그게 기분 나빠서 그가 보고 있던 꽃을 뚝 꺾어버리자, 떡돌이는 말을 멈추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락 외쳤다.
“왜 꺾어!”
“아. 달라는 줄 알고.”
거짓말로 둘러대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 꽃이 시들 때 우리 우정도 시들면 어쩌지, 하고 말하려 했다.”
아, 그랬구나.
“어쩌니이. 생각보다 빨리 시들어서.”
“태연하게 말하지 마. 과하게 말 늘이지도 마.”
떡돌이는 이런 거 잘 믿는구나.
왜 꽃잎 개수가 홀수면 사랑이 떠나가고 짝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꽃잎 다 떨어지면 사랑도 다 떨어지고 뭐 이런 미신 말이다.
엄청 삐지네.
나는 슬쩍 떡돌이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제대로 화가 났는지 떡돌이는 입가가 단단히 굳어서 풀릴 생각을 않았다.
결국, 제대로 달래주기 위해 나는 떡돌이 귀에 방금 꺾은 꽃을 꽂아주고서 오글오글하게 속삭여주었다.
“이 꽃은 시들어서 죽지 않아. 활짝 피었을 때 내가 꺾어버렸잖아. 영원히 이 상태인 거야. 우리 우정도.”
개소리지만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효과가 있나? 떡돌이는 내가 꽃을 꽂아준 자기 귓가를 만지작거리다가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