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천씨 가문 자매들
겨울에도 공부하기 싫었는데, 봄이 되니 더욱 공부하기 싫어진다.
두꺼운 양의억 뭔가 하는 책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까딱까딱 넘어갔다.
봄에는 낮잠이지. 잘까? 충동이 든다.
하지만 다른 후궁들만큼은 공부해 둬야 하긴 해. 아니면 무식한 취급을 받을 테니까.
가장 머리 좋을 필요는 없어도 중간은 가야 하는데…….
“그렇게 공부하기 싫으세요, 소주?”
“응.”
“많이 졸리면 한 바퀴 산책하고 오세요.”
“벌써 그렇게 다섯 번이나 산책하고 왔잖아.”
오늘 내로 이거 열 장 정도는 읽고 싶은데. 세 장 넘기기가 힘드네.
그런데 팔을 괴고서 무겁게 느껴지는 책 한 장을 넘기고 있자니, 어디서 본 듯 만 듯한 궁녀 하나가 사립문으로 다가왔다.
누구더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얼핏 본 얼굴인데?
“천 귀인, 연비 마마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아아. 궁녀가 인사하는 걸 들으니 생각났다. 천소여 언니네 궁녀지. 그때 돈을 꾸러 찾아갔다가 잠깐 봤어.
“그래. 언니는 잘 지내시고?”
일단 의문이 풀리자 나는 괜히 연비와 친한 척 인사를 건넸다.
“그럼요.”
‘왜 친한 척?’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궁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서 권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천 귀인, 연비 마마께서 자매끼리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니 놀러 오라 하셨습니다.”
연비가? 왜?
반사적으로 ‘싫은데’ 표정이 나갈 뻔했으나. 나는 가까스로 입술 양쪽 끝에 힘을 주어 참았다.
왜. 부를 수도 있지. 친자매라잖아. 별로 사이좋아 보이지 않던 자매지만.
“바쁘신지요?”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연비의 궁녀가 내 팔 아래에 깔린 서적을 보았다.
그러면서 짓는 표정이 ‘설마 그거 읽는다고 우리 연비 마마 부름을 무시할 건 아니지?’ 딱 이 짝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싫다’ 하고 싶지만…….
“알았어.”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친언니고 뭐고를 떠나서, 연비는 나보다 훨씬 품계 높은 후궁이니까.
여기는 품계가 무림인들 내공 양만큼 중요한 궁궐이고.
* * *
연비는 품계 높은 후궁이지만 같이 자란 언니이기도 하기에, 원웅과 부성은 너무 치장하는 것보다는 본가에서 지낼 때처럼 편안한 차림으로 가는 게 낫겠다며 과하지 않은 연두색 의상을 주었다. 장신구도 딱 하나만 달았다.
“연비 마마는 동복 언니기도 하시지만, 네 명뿐인 빈 중 한 분이시잖아요.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어요.”
나는 원웅의 잔소리와 함께 연비가 지내는 오월궁으로 걸어가면서, 입 모양을 이리저리 움직여 웃는 연습을 했다.
맞는 말이야. 자매인데 사이 나쁘게 지낼 필요는 없지. 좀 무서운 언니 같았지만.
남궁세가의 사이 좋은 자매 고수가 떠오른다.
늘 둘이 붙어 다니는 건 물론, 2인 1조로 무공을 펼칠 때 개개인의 실력보다 훨씬 강해지는 고수들이었지.
음. 좀 부럽긴 했어. 합공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사이가. 그 둘은 서로에겐 늘 한 편이 되어 줄 거잖아. 영원한 아군.
‘나도 연비랑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난 개원이 빼놓곤 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사이좋은 자매가 될지 모르겠다.
“원웅, 부성. 너희는 자매가 있어? 자매끼리는 어떻게 해야 사이가 좋아져?”
“싸우지 않으면 보통 사이좋지 않나요?”
“그냥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것 같은데요?”
그런데 막상 오월궁에 있는 연비의 처소에 도착해보니 다른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입도 큰데 얼굴만 작은 여자가.
전에 황후 문안 갔을 때 본 얼굴인데. 누구더라? 후궁인 건 확실한데.
하여튼 당황해서 보고 있자니, 연비가 내가 앉을 자리를 알려주며 놀렸다.
“이쪽으로 앉거라. 영빈 얼굴에 구멍 나겠다.”
연비가 가리킨 자리는 자신의 왼쪽 옆자리였다.
영빈이란 여자가 앉은 자리는 연비의 오른쪽 자리고. 그러다 보니 자리는 삼각형 구도가 되었다.
나는 연비가 말한 자리에 앉으면서 얼른 둘러댔다.
“미안해, 언니. 자매끼리 모이는 자리라길래 우리 둘만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잘못한 말 없는 거 같은데? 말을 하자마자 영빈이 깊은 야산에 나타난다는 호랑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 혹시 ‘자매’라는 게 진짜 자매가 아니어도 후궁들 간에 서로를 부르는 말인가?
무림인들은 친해지면 의형제니 의자매니 많이 맺지.
의형제자매가 되지 않더라도 형 아우 언니 동생 불러대는 일도 많고. 후궁들도 그런가?
그런 의미에서 ‘자매’라 했는데, 내가 영빈을 ‘자매’에서 제외해 버려서 기분이 상했나?
눈치를 보고 있자니 연비가 영빈의 눈앞에 손가락을 툭 튕겼다.
그 행동에 영빈이 날 향해 보내던 부리부리한 시선을 떼자 연비가 덤덤하게 설명했다.
“소여는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저러니 기분 상해하지 마련.”
그 말에 영빈은 알겠다면서 표정을 폈다.
반대로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했다. 나도 설명 좀 해줘.
내가 뭔 말을 했다고 영빈은 저리 기분 상해하고 연비는 그런 영빈을 달래주는 건데?
다행히 연비는 이어서 내게도 영빈이 기분 나빠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우여는 자매 중 막내란다.”
“진짜?”
“그래. 진짜.”
아…… 그러고 보니까 저 두 사람, 얼굴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 닮았네. 닮았어.
자매라 생각하고서 보니까 연비랑 영빈은 많이 닮았다.
세상에. 천소여만 안 닮았잖아?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나는 둘이서만 쏙 닮은 자매 얼굴을 차례로 보다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면서 농담했다.
“하하, 누가 보면 둘이 동복 자매고 나만 이복자매라 하겠다.”
……뭐야 뭐야. 내가 또 뭐 실수했어? 왜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영빈 얼굴이 또 무서워지는 거야?
이젠 거의 밤도깨비 수준이었다.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아.
당황해서 연비를 보자, 연비는 찻주전자에 살짝 손을 대 뜨거운지 확인하며 말했다.
“우여가 이복자매야.”
“뭐? 정말? 그럼 우리 아버지가 우여네 어머니랑 재가한 거야?”
“재가한 게 아니라 첩을 들인 거지.”
물이 적당히 식었는지 연비는 찻주전자를 들더니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직접 따라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여는 서출이란다.”
아…… 서출. 천소여 아버지, 아랫도리가 가벼운 분이었구나.
그보다 이거 참. 어쩌지. ‘쟤가 왜 우리 자매 만남에 끼어?’에 이어 진짜 이복자매 앞에서 이복자매 운운해 버렸으니.
나는 찻잔을 호호 부는 시늉을 하면서 영빈 눈치를 힐긋 살폈다.
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영빈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자신 앞에 놓인 빈 잔만 보고 있었다.
연비가 따뜻한 물을 따라주자 그걸 마시긴 했지만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거 참 분위기 이상해지네.
“소여, 우여. 궁궐 안에도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지만, 마지막까지 한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핏줄이란다.”
그 와중에 연비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이젠 소여도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니, 우리 세 자매가 힘을 합해서 가문을 이끌어야 해. 알았니?”
영빈은 바로 웃으면서 “그럼요, 언니.”라고 대답했고 나도 일단 따라서 “그럼!” 하고 대답은 했다.
연비는 그걸로도 모자라 나와 영빈이 손을 잡게 하고서 잘 지내라 당부까지 했지만…….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영빈이 내 쪽 볼 때마다 표정이 안 좋은데.
* * *
차를 마시고 돌아가는 길. 영빈이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려 하지 않기에, 나는 슬그머니 먼저 말을 걸어 보았다.
“저기, 우여야. 내가 아깐 일부러 자매가 아니라 한 게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기억이 아직 안 돌아와서 그래. 기분 상해하지 마.”
모르고 한 말이지만 그래도 내 말실수이고. 영빈으로선 기분 상할 수도 있는 말이었으니까.
다행히 영빈은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자 내 쪽을 보며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전혀 기분 상하지 않았으니 염려 마, 언니.”
그 표정은 무척 온순해 보여서 나는 안심해서 따라 웃었다. 연비는 무서운데 쟤는 착하구나. 다행이야.
하지만 영빈은 곧 신중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당부했다.
“그래도 앞으론 나한테 반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언니.”
“어?”
“마음 같아서는 언니가 날 편하게 대하는 게 나야 좋지. 하지만 내명부에도 규율과 질서가 있잖아. 남들 이목도 있는데, 언니가 훨씬 품계 높은 내게 함부로 반말해대는 건 보기 좋지 않을 거야.”
“…….”
어어…… 역시 얘 나 싫어하는 거 같은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를 촘촘히 박았잖아? 아닌가? 내가 못 알아듣는 건가?
잠시 어리둥절해 있자니, 영빈은 ‘난 나쁜 의도 없어’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갑자기 내 팔짱을 꼈다.
음. 이런 걸 보면 날 싫어하는 거 같진 않은데. 내가 너무 의도를 곡해해 들었나?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지, 언니?”
“응, 아니, 그럼요.”
일단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영빈은 빙그레 웃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려한 전각을 가리켰다.
“저기가 내 처소야. 난 이제 저기로 가야 해. 언니는 훨씬 더 걸어가야 하지?”
“응. 아니, 네.”
“조심해서 들어가.”
방긋 웃은 영빈은 내 팔을 놓고서 자신이 가리킨 전각으로 가리켰다.
영빈은 연비의 오월궁에서 같이 지내는구나. 집 좋네.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기웃하며 돌아섰다.
“언니. 잠시만.”
하지만 영빈이 다시 다가와 붙잡는 바람에 또 돌아서야 했다.
“왜요?”
내가 묻자, 영빈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듣기 좋게 소곤소곤 설명했다.
“인품으로 보나 인망으로 보나 재주로 보나, 우리 세 자매 중에서 가장 높게 올라갈 수 있는 게 대여 언니란 건 언니도 알지?”
“아 그래요?”
“인정하기 싫은가 보구나? 하지만 그래.”
“기억 잃고 두 번 만난 사람 인품 인망 재주를 내가 어떻게 알고 인정하고 뭐고 하겠어요.”
“언니는 여전히 사소한 데 집착하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손을 꼭 잡은 영빈은 ‘안 그래?’ 하고 묻는 것처럼 웃더니 길고 길었던 서두를 치우고 본론을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대여 언니가 높게 올라가도록 밀어주어야 해. 디딤돌이 되어야지.”
“디딤돌?”
“언니는 요즘 폐하께 총애받잖아. 맞지?”
“글쎄요.”
총애받는 건 모르겠고 웃음을 받고 있긴 하지. 비웃음.
내가 뚱하게 대답하자, 영빈은 자신이 잡은 내 손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당부했다.
“언니가 눈치껏 폐하와 대여 언니가 만날 자리를 만들어 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자매끼리 이기적으로 굴 셈이야?”
“난 죽었다 깨어나고도 시일이 지나도록 자매가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나랑 대여 언니가 병문안 가지 않았다고 이래?”
고개를 끄덕이자, 영빈은 폭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놓았다.
“그건 미안해. 하지만 언니가 그랬잖아. 우리가 동영궁에 오가면 언니가 안비 눈치를 보게 되니 오지 말라고.”
천소여가 그랬다고? 진짜인가? 하지만 지금으로선 천소여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있자, 영빈이 나무라듯 따졌다.
“아직 귀인인 언니가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서도 다른 후궁들에게 눈총받지 않은 게 누구 힘이라 생각해? 대여 언니 덕이야. 지금껏 대여 언니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불렸으면 이제라도 갚을 생각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