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반쪽은 짐이 완성해주고 싶다
“원웅아. 부성이가 너한테 와서 ‘원웅이가 찾아, 원웅.’ 하고 말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
내가 질문하자 원웅이 수건을 개다 말고서 부성을 보았다. 부성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소주께서 그냥 하시는 말이야. 내가 한 말 아니야.”
원웅은 다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쟤가 미쳤나…… 싶을 거 같아요, 소주.”
“그렇지?”
“네. 그런데 그건 왜요?”
“흠.”
“누가 소주한테 그런 비슷한 말을 하던가요?”
나한테 하진 않았지. 황제한테 태감이 해서 그렇지.
……역시 이상해. 나한테 계란이라 부르는 거나, 내가 없던 말 지어내던 걸 눈치채는 걸 보면 분명 내가 알던 황제가 맞는데 말이지.
“왜요, 소주?”
내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하자, 부성이 침대보를 정리하며 물었다.
“아, 그게 있잖아.”
나는 내가 본 걸 이야기하려다가 도로 입을 닫았다.
“그냥 책에서 봤어.”
수상쩍긴 하지만 이런 건 신중해야 해. 내가 헛소리를 들은 거든 진짜 이상한 말을 들은 거든.
그렇잖아? 황제가 두 명이어도 큰일 날 일이고, 황제가 두 명이 아닌데 두 명이라 하는 것도 큰일 날 일이니까.
“소주는 책 안 보시잖아요…….”
그런데 원웅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소주, 소주.” 하고 나를 불러댔다. 귀자 목소리인데?
“왜?”
대답하자, 귀자가 문을 열더니 황급히 알려주었다.
“소주, 폐하께서 곧 여기로 오신답니다!”
오면 오는 거지 곧 오는 건 무슨 소리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웅은 잽싸게 알아듣고는 나를 재촉했다.
“얼른 일어나세요, 소주! 폐하께서 깜짝 놀랄 만큼 꾸미자구요!”
“아니, 폐하가 오시는데 내가 꾸미기까지 해야 돼?”
“네! 지금 잠옷 차림이시니까요!”
원웅과 부성이 나를 떠미는 바람에, 나는 얼결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원웅과 부성은 작은 방 안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성은 온갖 크기의 빗을 가져와 내 귀밑머리를 최대한 부풀리려 애썼고, 원웅은 하늘색 옷과 연두색 옷을 가져와 내 얼굴 아래에 대어 보더니 절망하며 다른 옷을 가지러 뛰어갔다.
절망은 왜 하는데, 절망은!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준비를 했는데도 황제가 먼저 도착해 버렸다. 아직 화장을 반 밖에 안 했는데.
한쪽 눈썹을 짙게 그린 다음 눈 아래에 깨끗하고 보송하게 분을 칠해주던 원웅은 황제가 도착했단 소리에 놀라서 심지어 화장 도구까지 죄다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 어쩌지요 소주?”
원웅은 울상을 짓고서 손을 허둥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천 귀인!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나오라고 잡죄어대잖아. 나가야지…….
* * *
“천 귀인,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문을 열고 나가자, 황제가 잔소리를 하려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천 귀인 왜 얼굴이 반쪽이냐.”
그가 너무 호탕하게 웃어대는 바람에 황제가 데려온 궁인들도 괜히 따라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마음껏 웃으세요 마음껏.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웃긴 상태였긴 하니까.
아예 화장을 안 하면 웃길 게 없는데, 반만 하고 반은 안 하니까 좀 그랬어.
차라리 위아래 반이면 나은데 하필 또 좌우 반이어서.
하지만 이대로 나만 웃음거리가 되는 건 억울해서.
나는 황제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다 폐하 탓입니다.”
“네 얼굴이 반쪽인 게 왜 짐의 탓이지? 짐은 네 얼굴을 반만 남겨달라 한 적이 없는데.”
“폐하가 올 거란 예고 없이 왔으면 내 궁녀들이 흥분해서 이러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니면 좀 넉넉하게 오시던가. 예고 하자마자 바로 오시면 어떡한대요?”
“너무 몰아가는군. 난 그저 우리 계란이와 어제는 제대로 얘기도 못 하고 헤어진 게 신경쓰여 온 것뿐인데.”
황제가 어제 일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툴툴거리던 걸 멈추었다.
맞아, 어제. 어제 아주 묘한 말을 들었지.
아침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장하고 뭐 하고 하면서 까먹었어.
하지만 황제 덕에 다시 생각나서,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황제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제 일’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어제 만난 사람이 황제가 맞긴 맞는가?
그럼 역시 태감이 ‘폐하가 폐하를 찾으신다’는 말은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계란아.”
“왜요.”
“지금 얼굴론 무슨 표정을 지어도 우습게 보인다.”
“지금 제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게 우스워 보이세요?”
“조금.”
황제는 자꾸 내 반쪽짜리 화장을 가지고 놀려대려 했지만, 나는 그의 조롱을 깔끔하게 흘려 넘기고서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황제는 내 표정을 보자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술을 씰룩였다.
하지만 곧 표정 관리를 하고는 태연한 척 물었다.
“그래, 우리 계란이가 진지하게 한단 고민이 무엇일까?”
그러고는 대인처럼 하는 말.
“폐하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물어볼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대답을 듣자마자 황제는 소인배가 되어서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짐에게 묻지 말라. 짐은 비밀을 간직한 사내이고 싶다.”
“제가 뭘 물어보실 줄 알고 그러세요?”
어제 일에 관해서 슬쩍 물어보려다가 황당해서 되물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을 돌렸다.
“모르지. 하지만 고민 끝에 물어보는 거라면 감이 오지 않느냐? 쉬이 대답할 내용이 아니라는 거.”
결국 이도 저도 못하게 막히자, 나는 괜히 부성이 최종적으로 골라준 노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폐하는 무슨 일로 오신 거래요?”
황제는 대답 대신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내 얼굴? 내 얼굴이 왜? 나는 손을 올려서 내 얼굴을 더듬거렸다.
멀쩡한 얼굴이다. 황제의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리둥절해 있자니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남은 반쪽은 내가 그려주어도 되느냐?”
“예?”
이게 무슨 소리야?
* * *
“이걸로 눈썹을 그리면 되는 건가.”
황제가 눈썹을 검고 짙게 만들 붓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의자에 어색한 자세로 앉아 이게 무슨 일일지 머리만 팽팽 굴렸다.
황제와 내내 이야기를 나눈 내가 이 정도이니, 옆에서 화장 도구에 대해 설명해주는 원웅은 어떤 심정일까?
원웅은 아예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예. 붓 끝을 이쪽에 살짝 묻힌 다음 옆에 놓인 흰 천에 몇 번 눌러서 내용물을 덜어내고…… 그리시면 됩니다.”
원웅은 설명을 마치자마자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면사 때문에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그걸 보자 황제가 대단하긴 대단한 위치란 자각이 이제야 좀 든다.
하긴. 나도 무림인이던 시절에는 황제 얼굴 보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했지.
뭐랄까. 은신술로 몰래 들어와서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볼 필요도 없을 뿐더러, 황제는 그…… 좀 별세계 사람 같은 느낌이니까.
다른 세계 사람. 구름 뜯어서 아래에 뿌려 놓고 그 위에서 지내는 사람.
실제로 보니 구름은 커녕 좀스럽기 그지 없지만.
“알았다. 입술은?”
“입술은 여기 이 천에 붉은 물을 먼저 들인 다음…….”
원웅이 입술을 붉게 물들이는 방법과 볼에 분 바르는 방법까지 설명한 뒤 물러나자, 황제는 내쪽을 똑바로 보고 앉았다.
뭘 기대하는 건지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단 미소가.
“그냥 얼굴에 붓질 몇 번 하는 건데, 뭘 기대하시는 거예요?”
나는 하나도 안 재미있는데 혼자 즐거워하는 게 괜히 심통이 나서 묻자, 황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았다.
구시렁거리다가 얼굴이 위로 조금 올라가자 나도 모르게 말이 뚝 멈추었다.
황제의 손이 뜨끈뜨끈해서 그렇다. 아주 크고.
게다가 누군가 내 턱을 잡고 유심히 바라보는 상황은 몹시 드물어서…….
“하려면 빨리 하세요.”
괜히 민망해서 재촉하자, 황제는 서두르지 말라면서 커다란 손으로 얇은 붓을 쥐더니 검은 먹을 붓 끝에 조심스럽게 묻혔다.
붓은 그의 손 안에서 부서질 것처럼 보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화장 도구란 건 참 얇고 부실하구나.
원웅과 부성이 해줄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황제가 쥐고 있으니 새삼 얇은 게 티가 나네.
저런 붓으로 기몽 장군이 늘 거울 앞에서 화장한단 거지…… 아니면 기몽 장군 하인들이 해주나?
“자. 이쪽.”
황제의 손을 보느라 저절로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나 보다.
황제가 내 턱을 조금 돌려서 내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방향을 조정해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황제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긴 목이, 목울대가, 반듯한 턱이, 혈색 좋은 입술이…….
“계란아.”
“왜, 왜요?”
“왜 자꾸 침을 삼키느냐?”
“아닌데요!”
“침 넘어가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진짜 아닌데요!”
“그럼 이 꿀꺽꿀꺽 소리는 누구 소리지?”
황제가 눈썹용 붓에 묻힌 검은 먹을 흰 천에 조금씩 조금씩 눌러 덜어내면서 놀려댔다.
나는 내가 황제의 입술을 보면서 침을 삼켰던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냥 입술색이 예쁘네, 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침을 삼켰던가?
아니야. 난 안 삼켰어. 하지만 황제도 안 삼켰지. 내가 그의 목과 입술을 계속 보았으니 확실해.
그렇다면 범인은 하나다!
“승언이에요.”
오늘은 승언이가 방 안에 안 들어와 있는지 쾅쾅 항의하는 소리가 안 난다. 교대했나?
대신 황제가 픽 웃었다.
“넌 나중에 황귀비나 이쯤 되거든, 승언이한테 좋은 선물 하나 해주어야 한다. 알지?”
알겠다고 중얼거리려는데 말하려다 보니 방금 이상한 단어가 하나 있네?
“황귀비면 황후 다음 아니에요? 저 황귀비 시켜주시려고요?”
놀라서 묻자, 황제는 대답 대신 붓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오더니 화장이 되지 않은 쪽 눈썹에 대고 조심스럽게 눌렀다.
말랑한 붓이 얼굴에 닿자, 이번에는 괜히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궁녀들이 해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균형 맞추기가 힘들군.”
황제가 중얼거리고서 얼굴을 좀 더 내 가까이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너무 가까워서 내가 숨을 쉬면…….
“왜 숨을 안 쉬느냐?”
“폐하 면사가 날아갈까 봐요.”
그 순간. 내 대답이 뭐 어쨌다고, 내 눈썹 위에 조심조심 붓질을 하던 황제가 갑자기 붓을 찍 이상하게 긋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왜 그래? 의아해서 내려다보자, 그는 내 무릎에 기댄 채 등을 떨며 끅끅거렸다.
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등짝을 내려치기 참 좋은 자세란 건 알겠다.
그래도 감히 황제를 찰싹찰싹 칠 수는 없어서 빤히 등만 보고 있자니, 황제가 고개를 숙인 채 놀려댔다.
“얼마나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려고?”
“아닌데요!”
“면사가 날아갈까 걱정될 정도면…….”
그러고서 고개를 든 황제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앞으로 쓰러졌다.
뭐야. 이번엔 또 왜? 왜?
“왜요?”
이젠 완전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이기에 당황해서 묻자,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의아해서 거울을 보니…….
황제 이 자식이? 왜 내 눈썹이 잘 나가다 급경사로 꺾였어? 완전히 팔(八) 자로 만들어 놨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