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낭자 무림인이오? 왜 그런 데 관심을 가지오?”
내게는 중요한 질문인데. 정보호는 황당하단 투로 되묻더니 손을 저었다.
“고작 그런 질문을 하려고 날 부른 거라면 돈 좀 아깝겠소. 내가 아니어도 정보 좀 빠삭하다 싶은 무림인이라면 다들 대답해줄 수 있는 얘기였는데. 맞소. 무림악적 천년비가 사하비단에 들어갔소.”
“뭐? 정말이오? 하지만…… 천년비는 죽었지 않소. 개새, 아니, 개원이 천년비를 죽였다 들었는데.”
이건 헛소문이 아니다. 그럼. 내가 장본인이자 증인인걸.
그러나 정보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죽은 줄 알았지. 다들 죽었다 했고. 그런데 천년비 본인이 나타나 잘만 돌아다니던걸?”
“!”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너무 놀란 티를 안 내려 하는데. 이게 잘되지 않는다.
하긴. 죽고 난 뒤에 나도 내 몸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돌아다니기까지 하오?”
“예전엔 생각 없이 막사는 것 같더니. 요즘은 뭔 생각을 하는지, 사하비단 무리와 어울려 다니며 흑도인들을 자극하더군.”
내가 천 귀인 몸에 들어와 움직이듯 내 몸에도 누군가의 영혼이 들어와 움직이고 있는 건가?
물론 잠시 내 원래 몸으로 돌아갔을 때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
변태 타천천이 몇 시간 전에 내 몸과 얘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굴었으니.
그래도 이렇게 딱 객관적으로 듣고 나니 더 당혹스럽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거북이랑 토끼가 경주하다가 돌연 토북이로 합체하는 걸 본 기분?
사실 뭐. 난 지금 이 몸으로 쭉 살아도 상관은 없다.
이전보다 약해졌지만 생활은 편하고, 날 죽이겠다고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오는 적들도 없고.
내 목표는 날 배신한 개원이에게 복수하는 것이지, 몸을 되찾아 다시 쫓기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만 ‘내’ 입장이지, ‘진짜 천 귀인’의 입장은 아니잖아?
만약 천 귀인의 혼이 다른 어딘가에 있어서 몸을 돌려받길 원한다면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몸을 돌려준 다음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 진짜 천소여가 제 몸을 찾아가면 난 가짜 천년비에게 가서 내 몸을 돌려받아야겠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이니까…… 일단 사하비단의 수장 타천천을 다시 만나보긴 해야겠네.
그놈은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 테니까.
그놈에게 왜 이렇게 영혼과 몸이 바뀐 건지, 천 귀인의 영혼은 어디 있는지, 지금 ‘천년비’ 몸에 들어온 영혼은 누구인지 알아내야겠어.
어쨌든 이걸로 정보호에게 볼일은 끝. 나는 속으로 정리를 마치고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알려줘서 고맙소. 안녕.”
비록 ‘천년비가 살아나서 사하비단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내 생각처럼 희귀한 정보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도움은 됐으니 뭐.
그런데 손을 흔들고서 가려는 나를 정보호가 “잠시. 잠시만!” 하고 붙들었다.
“왜 그러시오?”
내가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서자, 정보호는 허둥지둥 내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나한테 스스로를 소개해 줬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소? 같이 식사라도 안 할 거요?”
“아. 말 안 했구나. 나 결혼했어.”
이 말을 하자마자 도로 허둥지둥 뒤로 갔지만.
잠시 뒤. 그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더니 몹시 억울하단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사기꾼! 낭자는 진짜 사기꾼이오!”
“착한 여자 소개해 달라고 했지 미혼 소개해 달란 소린 안 했잖아.”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망언을 뱉자 정보호는 바람 부는 날의 버들가지처럼 분노했다. 즉, 엄청 하찮아 보였단 뜻이다.
그래도 괜찮다. 난 정보호 이 자식한테 맺힌 게 많아서 이래도 안 미안한걸.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은 다음 돌아섰다.
“어쨌든 안녕.”
하지만 정보호는 이번에도 또 날 붙잡고 씩씩거렸다.
“내가, 낭자가, 사기꾼이라고, 다 소문낼 거요!”
“내가 누군진 알아?”
“알 수 있소. 내가 누군데? 정보호 아니오! 내가 모르는 건 이 세상에 없소!”
“그럼 내가 누군지부터 찾아봐.”
“!”
“그다음 정해. 사기꾼이라 소문을 낼지 말지.”
웃으면서 그의 뺨을 가볍게 톡 두드리자, 정보호는 자기가 당했단 생각에 열이 받는지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 상태로 그는 몇 번 어깨를 들썩이다가 선언했다.
“꼭 찾아낼 거요.”
* * *
아무리 정보호라도 황궁에 틀어 박힌 후궁을 어찌 찾아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황제 속곳 개수를 알 정도면 금방 찾아내는 거 아냐, 그놈?
약속할 때는 하찮게만 들렸던 정보호의 다짐이 새삼 찝찝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 찝찝함은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사자 친왕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면서 한 말을 듣자마자 싹 날아갔다.
“나흘 전인가 닷새 전인가. 폐하께서 황후마마와 시침한 후로 아직 아무 후궁도 찾지 않으셨지요?”
황제가 황후랑 동침했다고? 내가 쳐다보자 사자 친왕이 방긋 웃더니 되물었다.
“아닙니까?”
나한테 물어봐야…… 모르지. 내가 황제 일거수일투족을 어찌 알아? 아니, 나는 황제가 황후와 동침했단 이야기도 몰랐다.
내가 뚱하게 고개를 돌리자 사자 친왕은 아까보다 더욱 짓궂게 웃더니 턱을 괴고서 놀리듯 물었다.
“폐하의 속곳 개수는 궁금해하더니, 이런 건 별로 안 궁금한가 봅니다?”
“안 궁금해요. 어느 쪽도 다.”
“정말입니까?”
사자친왕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나는 더 말을 섞는 대신 창밖만 쳐다보았다.
정말이었다. 그냥…… 황제에게 마음을 주는 건 정말 할 짓이 못 되겠구나, 이런 생각만 들 뿐. 궁금하진 않다.
뭐. 황제가 황후를 계란말이 시켜 놓고 놀려먹진 않겠지만.
아마 황후에겐 솜털처럼 다정하게 대하겠지. 자길 사랑하지 말란 이야기도 안 할 거고.
황후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란 말도 안 할 거고.
* * *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어지럽다. 이럴 땐 좀 긴장감이 필요해.
이틀 정도 설렁설렁 수련하다가, 결국 나는 의욕도 돋울 겸 현재 내 무공 실력도 점검할 겸 간만에 수련 성과를 보기로 했다.
수련 성과를 본다고 해서 지나가던 병사를 아무나 붙잡고 비무를 요청할 건 아니다.
그냥 은신술을 펼쳐서 궁 안을 몰래몰래 돌아다녀 보는 정도만 할 생각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내공에 비하면 지금의 내공은 ‘새 발의 피’ 정도밖에 안 되지만, 사실 예전에도 나는 내공의 양이 아니라 운용으로 강한 편이었으니 뭐.
이 정도로도 은신술은 펼칠 수 있다.
‘좋아. 가보자.’
마음을 먹자마자 나는 끝없이 뻗은 회랑 위 어두침침한 기둥 안쪽으로 훌쩍 올라가 그림자와 어둠 사이로 몸을 숨겼다.
‘아주 불편할 정도는 아니네.’
다행히 이 정도만으로도 은신술을 펼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개원이 정도로 대단한 고수를 만나는 게 아니라면 웬만한 이들은 날 눈치채지도 못할 거야.
그래 봐야 무공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기초 체력이 떨어져서…… 장거리는 이동할 수 없겠지만.
그런데 몸 상태를 점검하면서 혼자 얼마나 이동했을까.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 낯익다고 하기는 좀 애매하구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니까.
‘저 사람은 혼자 있을 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네.’
내가 찾아낸 이는 황제였다. 얼굴을 면사로 가린 채 회랑 난간에 기대어 앉은 황제.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오늘따라 어깨가 내려가 보여. 며칠 전에 황후랑 동침까지 해 놓고선 왜?
하지만 평소 보이지 않는 모습인지라 신경이 쓰인다. 평소에는 허리며 가슴이 죄다 빳빳한 인간이잖아.
“…….”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먼발치에서 그를 발견한 척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쪽 기둥으로 이동하기 전. 먼저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폐하.”
황제가 자주 데리고 다니는 태감 중 하나였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제자리에 있자.’
나는 태감이 오는 걸 보자마자, 이동하려던 걸 멈추고 호흡을 낮춘 다음 다시 기둥에 몸을 기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
그러나 태감이 한 말을 듣자마자, 애써 호흡을 고른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짧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야? 황제가 황제를 찾다니?’
그 순간.
“누구냐.”
황제가 확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내가 숨은 방향으로.
순간 두 가지 길이 오른쪽과 왼쪽에 동시에 떠올랐다.
오른쪽. 도망친다.
왼쪽. ‘나예요’ 하고 나간다.
‘젠장. 어쩌지?’
이중 내가 선택한 건 ‘나예요’ 하고 나가는 쪽이었다.
물론 바로 나간 건 아니고.
모습을 감춘 채 이동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를 은신술을 펼쳐 빠르게 이동한 다음 거기서 밖으로 나갔다.
“나예요.”
이 정도 거리에서 나가면 내가 태감이 한 말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겠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무공 수준으로는 은신술을 펼치면서 장거리 이동은 할 수 없다고.
무공은 쥐뿔도 모르던 명문가 출신 후궁이 갑자기 은신술 펼치면서 달아나다 잡혀봐. 이상한 정도가 아냐. 수상할걸?
내가 슬그머니 나가자 황제가 “천귀인?” 하고 중얼거렸다.
목소리 끝이 삐죽 올라간 게,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투였다.
“왜 거기 숨어 있던 거지?”
다음에는 대놓고 묻기에 나는 얼른 발뺌했다.
“숨어 있던 게 아닌데요.”
“누가 봐도 숨어 있던 건데.”
“아니에요. 폐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거예요.”
“보통은 그걸 숨어서 훔쳐봤다고 하지.”
“아니라니까요? 조금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에요.”
“망설이다니?”
“폐하가 제게 잘못을 했잖아요. 지금 말을 걸면 제가 꼭 용서하는 것처럼 여겨질까 봐 좀 고민하고 있었죠. 전 폐하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말을 하고서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이라고 해봐야 면사로 가려서 잘 안 보이지만, 하여튼.
그러다가 슬쩍 덧붙였다.
“물론 폐하께서 제게 약조하신 ‘그것’을 주신다면 화를 풀 수도 있어요.”
방금 덧붙인 말은 물론 거짓이다. 황제는 나한테 뭘 주겠다고 약조한 거 없다. 일부러 덧붙인 거였다.
아까 태감이 황제에게 ‘폐하, 폐하가 찾으십니다’였나? 하여튼 그렇게 말한 게 신경 쓰여서.
나는 일부러 골이 난 표정을 짓고서 황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만약 황제가 여기서 우리 사이에 정말 약조한 게 있는 것처럼 군다면…….
“넌 참. 조금만 방심하면 짐에게 사기를 치려 하는구나.”
안 속네? 안 속는다. 황제는 오히려 나지막하게 웃었다. 평소보다 좀 더 포근하게.
“응? 우리, 계란이.”
그러고서는 자기가 멋대로 지은 내 별명을 부르면서 손을 올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가볍게 쥐었다 내렸다.
……황제가 혹시 둘인가, 생각했는데. 아닌가? 태감이 한 말은 암호 같은 거였나?
“큼. 크흠흠. 흠흠흠흠.”
그런데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자니 뒤에서 태감이 과할 정도로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내시인 자기 앞에서 애정 행각을 해대는 게 몹시 언짢은 듯했다.
나는 떡돌이가 생각나서 얼른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황제도 태감의 아픈 속을 알아차렸는지 더 내게 손을 대지 않고 뒷짐을 지며 물었다.
“짐은 일이 있어 가봐야 하는데. 우리 계란이는 이제 화가 풀렸을까?”
“참 염치없으시네요. 폐하가 뭘 했다고 제가 그새 화를 풀겠어요?”
“…….”
* * *
천 귀인이 뚱하게 가버린 후. ‘황제’는 심궁 어실로 걸어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던 대로 천 귀인은 특이한 성격이로구나.”
“그렇지요.”
태감도 수긍했다.
“폐하께서 푹 빠지실 만합니다. 대대로 고관대작을 배출해 온 명문가 적녀가 말하는 거며 행동하는 건 꼭 맹…… 흠. 그런 태가 없으시니까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앞으론 그분 얼굴에 손을 올린다거나, 그런 행동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들려온 말에 ‘황제’의 발길은 잠시 주춤했다. 면사 아래로 그의 입술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 뒤에서 그리 계속 헛기침을 해댔군. 손 떼라고.”
“폐하께서 귀히 여기는 분입니다. 행동에 주의해주십시오.”
“…….”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