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갑자기 궐을 떠나라 하오시면……?”
흑합 장군은 황제가 난데없이 떠나라 명령하자 당황한 듯했다. 하긴. 누구라도 황당해할 황명이었지만.
뭐라 둘러대시려구요. 승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제법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수오부 군왕과 손을 잡았던 무림인들이 누구인가 알아내야겠으니 23천도로 가보라.”
수도는 중천에 있고, 수도로부터의 거리에 멀어질수록 '천도' 앞에 붙은 숫자가 커졌다.
즉 23천도면 수도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였다.
“명령이시라면 당연히 따를 것입니다, 폐하. 하나 왜 23천도를 짚으시는 건지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이에 흑합 장군이 뜻밖이란 내색을 숨기며 물었으나, 황제는 단호하게 재차 지시했다.
“그곳에 불안한 무리들이 모여 수시로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들었다. 속히 가서 네가 살펴보고 오라.”
“하나-.”
“지금 당장.”
“!”
* * *
만복일에 아이를 가지면 아이가 영리하고 건강하단 말이 있다.
이 때문에 대대로 모든 황제들은 이날만큼은 꼭 시침해야 했다.
특히 한 달에 두 번 있는 만복일 중 한 번은 반드시 황후와 시침해야만 하는 게 규칙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 황제는 밤이 되자 몸소 황후궁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이번에도 두 사람은 함께 침상을 나누어 쓰는 대신 술상과 잔만 나누었다.
하지만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지라 시중을 드는 궁녀도 태감도 다들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동침하진 않지만,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가는 대화는 조용하고 상냥한 데다 서로를 존중하는 티가 났다.
애정을 나누지 않을 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왜 폐하께서는 다른 후궁들에겐 대역을 보내시면서, 신첩에게만 늘 친히 오십니까?”
덤덤한 대화가 오가던 중 황후가 궁금하단 얼굴로 뼈 있는 말을 던졌다.
황제는 술잔을 기울이다 잠시 손을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그는 당연하단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황후는 황후인데, 예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십니까.”
황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신도 술을 한 모금 마셨지만, 표정은 술이 아니라 고민을 마시는 표정이었다.
“괜찮소?”
그 표정을 본 황제가 걱정이 되어 묻자, 황후는 얼른 미소 짓더니 아무것도 아니라 둘러대었다.
순간 보인 표정이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었으나 황제는 더 캐묻진 않았다.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요즘은 천 귀인을 가까이 하시더군요. 천 귀인이 만나는 건 폐하의 대역입니까, 폐하입니까?”
내내 침묵하던 황후가 돌연 천 귀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갑자기 천 귀인 이야기가 나온 게 의외이긴 했으나, 아주 놀랄 일도 아니었다.
황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모든 후궁을 돌보아야 했기에, 이런저런 일로 황제에게 후궁들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누가 문제를 일으킨다거나 누가 누구와 친하게 지낸다거나 누가 공격적이라거나 누가 어디에 재능을 보인다는 등 이야기 주제도 다양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소?”
오히려 평소와 다른 건 황제의 대답이었다.
황제는 웃는 얼굴로 대답을 피하고는 황후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런 점이 생기거든 바로 말하시오.”
* * *
“한마디도 못 해 봤어! 말이 돼?”
이럴 수가 있을까. 이제부터 흑합 장군과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흑합 장군의 처소로 가보니, 부하가 말하길 그는 이미 궁궐에 없다고 했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소주. 잠시 수사차 다녀오는 거라잖아요. 오래 있다 오진 않으신대요.”
측근궁녀인 원웅은 나를 위로해주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젠장! 그럴 수밖에. 당장 흑합 장군과 친하게 지내야 떡돌이가 질투를 할 테니 말이다.
흑합 장군과 깨소금을 볶으면서 놀아야 떡돌이가 엉엉 울면서 나와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텐데!
흑합 장군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시간이 어영부영 지나가면, 떡돌이가 뭐라 하겠어? 질투는커녕 그냥 웃고 말 거다.
하지만 먼 길을 떠났단 장군을 내가 불러올 수도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후로 며칠간 나는 홀로 수련에만 몰두했다.
가끔 떡돌이는 뭘 하면서 지내나 궁금해졌지만, 일부러 청적 쪽으론 시선도 오래 두지 않았다.
그러기를 나흘 가량.
흑합 장군은 여전히 오지 않았는데, 뜻밖의 사람이 처소로 몸소 나를 찾아왔다.
“천 귀인. 나랑 같이 월담 한 번 해보겠습니까?”
사자 친왕이.
“갑자기 찾아와서 월담이라니요?”
황당해서 되묻자, 사자친왕은 농을 한 거라며 손을 젓더니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정보호 그자가, 일전에 천 귀인에게서 돈만 받고 제대로 된 정보를 안 주었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내 앞에 있는 누구 때문에.
“그건 자기 명성을 망가트리는 일이라고, 이번엔 제대로 된 정보를 주겠다더군요. 하지만 그자는 천 귀인의 이름도 위치도 모르니 내게 귀인을 데려와 달라 부탁했습니다.”
웬일이야.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나는 그 돈은 날려 먹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습니까? 나갈 겁니까? 물론 정말 월담을 하잔 건 아닙니다. 내 시비 중 하나로 분장을 해서 나가면 될 겁니다.”
의외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좋아요.”
결국 나는 바로 사자 친왕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음 날 아침.
그의 도움을 받아 친왕부의 시비로 변장한 다음 또다시 궐을 빠져나갔다.
게다가 이번엔 딱 정보호만 약속 장소에서 만난 다음 바로 돌아올 예정이라, 전처럼 내가 나간 사이 황제가 찾아와 밤늦게 내 방에서 기다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해서 정보호를 만나고 나니 이번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자, 무슨 정보를 알고 싶지? 말해보시오 낭자.”
사자 친왕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자리를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 문제였다.
“그쪽은 왜 안 비켜줘요?”
질문을 하려 해도 사자 친왕이 없어야 제대로 하지.
내가 황당해서 사자 친왕에게 묻자, 사자 친왕은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낭자가 뭘 물어볼 건지 나도 궁금해서. 같이 들으려고 그럽니다.”
“…….”
심지어 사자 친왕은 내가 황당해 쳐다보자 오히려 자기가 더 놀란 척 물었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질문입니까? 남 있는 데서는 묻지도 못할 만큼?”
결국, 나는 정보호에게 직접 요구했다.
“저 사람 좀 잠시 비키라 해주시오.”
사자 친왕은 정보호를 좋아하는 듯하니, 그가 요구하면 비켜 주겠지 싶어서.
그러나 정보호 이 자식은 웬일로 예쁜 짓 좀 하나 싶더니. 내 요구를 듣자마자 당당하게 거절했다.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난 낭자가 원하는 정보 하나만 주면 끝인데?”
“그럼 환불을 해주던가 자식아.”
하지만 환불을 해주긴 싫은가보다. 정보호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내가 가자미눈을 하고 매섭게 노려보자, 마지막 남은 양심을 쥐톨만큼 떼선 내밀었다.
“알겠소. 추가 금액을 내시오. 그러면 친왕 전하께 자리를 물러 달라 부탁하지.”
그 양심마저도 아주 잘게 갈아서 내미는구나.
젠장! 하지만 지금은 내가 밀리는 상황이니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정보호가 돈을 떼먹겠단 건 아니고, 먼저 정보를 주겠다면서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하기도 했으니.
“추가 금액 얼마? 난 지금 빈털터리라 돈이 더 없는데.”
“돈 없는 건 딱 봐도 알겠고.”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내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정보호는 큼큼큼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착한 낭자 한 명 소개시켜 주시오.”
“뭐? 호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등쳐먹으려고?”
“무, 무슨 소리오! 누굴 사기꾼으로 아시오?”
“그럼 착한 사람을 왜 소개해 달란 건데?”
정보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자기 목덜미를 손으로 받치며 소리쳤다.
“여자 소개시켜 달라는 소릴 누가 그렇게 해석하오! 평생 사기꾼만 만나고 살았소?”
자주 만나는 편이었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소개해 달란 건데?”
“…….”
“아 말을 해 말을.”
거듭 재촉하자 정보호는 얼굴이 벌게져서 나를 노려보더니 험악한 목소리로 항의하듯 말했다.
“난 무림인이지 않소!”
“그렇지.”
근데 그게 왜.
“심지어 모르는 게 없다고, 황제의 속곳 개수조차 안다고 소문이 난 정보원이고.”
뭐야? 황제 속곳 개수를 안다고? 정말이야?
“몇 개인데?”
내가 당황해서 묻자, 사자 친왕이 쿡 내 팔을 찔렀다.
쳐다보자, 그가 나를 아주 변태 보듯 보고 있었다. ‘내 동생 속곳 개수는 알아서 뭐 하게?’ 하는 얼굴로.
그런 거 아니라고 손을 저어보지만,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사이. 정보호는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때문인가 무림 여인들은 나를 다 꺼림칙하게 생각한다오. 그래서 무림 외에서 찾아야 하는데, 평생 무림인들하고만 어울려서 무림인이 아닌 여인들과는 어떻게 만나고 연애하는지 통 모르겠거든.”
“그래서. 나더러 소개시켜 달라?”
“낭자는 무림인이 아니라 들었소만.”
“그건 그런데. 내가 소개시켜 준 사람이 그쪽을 싫다 하면 어쩌게?”
“그건 내 문제이니 어쩔 수 없고. 낭자는 소개만 시켜 주시오.”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정보호가 재차 물었다.
“어떻소?”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수긍했다.
“그래.”
내 즉답에 정보호는 눈을 반짝이면서 좋아했다.
반면 사자 친왕은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뒷짐을 지고서 내게 물었다.
“낭자가 정 대인에게 소개시켜줄 여인을 아나?”
그는 내가 후궁인 걸 아니 내 주위 여자들은 전부 후궁 아니면 궁녀들이란 걸 알 터.
당연히 내가 그에게 소개시켜줄 만한 여자가 없다 생각해서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다 생각이 있고 계획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자 친왕에게 설명해 줄 일은 아닌지라, 나는 바로 정보호에게 요청했다.
“바로 소개시켜 줄 테니 일단 친왕 전하부터 치워주시오.”
그 말을 듣자 정보호는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바로? 지금 바로 소개시켜 줄 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자친왕은 떨떠름해 서 있다가 “아아.” 하고 알겠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친정 가문 사람 중에서 누군가를 소개시켜 줄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그것도 아니지만 굳이 정정하는 대신, 나는 정보호에게 사자 친왕을 가리키며 얼른 저자 좀 보내 달라 부탁했다.
“전하. 이렇게 되었으니 자리를 좀…….”
예상했던 대로 사자친왕은 정보호가 부탁하자, 얼굴 가득 호기심을 담았으면서도 결국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내가 비켜달라 할 땐 안 비켜 주더니. 나쁜 놈. 짐작은 했지만 서운하네.
어쨌든 우리 둘만 남게 되자 정보호는 활짝 웃으면서 나를 재촉했다.
“그래, 소개시켜 주겠단 착한 여인이 누구오?”
“그전에 약속부터 하시오.”
“약속?”
“소개시켜 주면 무조건 순순히 정보를 주겠단 약속.”
내가 손가락을 내밀자 정보호는 가슴을 쭉 펴면서 큰소리쳤다.
“염려 마시오! 나 정보호, 다른 건 몰라도 신뢰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중시한다오!”
알아 자식아. 그 신뢰도를 앞세워서 네놈이 내 이름을 팔아먹고 다녔는데 모를 리가 있겠냐.
어쨌든 잘난 척을 한 정보호는 눈을 빛내면서 날 재촉했다.
“자, 누구? 어느 낭자를 소개시켜 줄 거요? 이동? 이동할까? 어디 다른 곳으로 가야 하오? 나 옷 좀 갈아입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내 말에 정보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주위를 살폈다.
“내게 소개해 줄 착한 낭자가 이미 근처에 있소? 어디? 저기? 저기?”
그의 눈동자가 다리 위를 지나는 여인, 저 멀리서 과일을 파는 여인 등을 짧게 짧게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이번에도 고개를 젓자 정보호는 영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 되었다.
“그럼 누굴 소개시켜 주겠단 거요?”
나는 씩 웃고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보호의 시선이 내 손끝에 모였다.
내가 그 엄지를 천천히 움직이자 그의 눈동자 역시 도르륵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그 엄지가 날 가리키는 순간. 정보호의 눈동자도 내게 멎었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잠시 그 상태로 정지해 있던 그는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몸을 떨었다.
“낭자, 설마!”
“그래. 나다.”
“이런 사기꾼! 낭자가 접시로 내려친 이 머리, 이 머리가 아직도 욱신욱신한데 자기가 착하다고?”
“나도 마음은 착해. 겉으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겉으로 티가 안 나면 무슨 소용이오!”
“자자, 그만. 난 약속대로 착한 여자 소개시켜 줬어.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지?”
정보호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억울해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는 끄덕였다.
나는 히죽 웃고서 물었다.
“천년비가 사하비단에 들어갔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