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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44화 (44/283)

##  44화. 너에겐 없는 게 너무 많구나

“소주. 폐하께서 오늘 시침 상대로 이번에도 소주를 고르셨습니다.”

잘 준비를 마치고서 신이 나서 누웠는데, 경사태감이 찾아와서 하등 쓸모없는이 말을 전했다.

게다가 말을 전하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게, 아주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러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서. 정말 웃겨. 황제가 되려면 뻔뻔한 마음도 갖춰야 하나 봐?

최근 내내 싸워 놓고서는 시침을 들라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그렇지만 대놓고 황명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꾀병을 부리자. 나는 이불을 움켜잡고서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좀 아픈데.”

그러고서 힘없이 침상 위에 쓰러지자 경사태감은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안 아프잖아’라고 말하는 눈길.

하지만 내가 계속 아프다고 하자, 결국 경사태감은 알겠다 웅얼거리고서 밖으로 나갔다.

경사태감이 나가자 원웅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소주, 이래도 될까요?”

원웅은 내 의도를 대번에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녁때만 해도 밥을 세 공기나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으니.

“솔직하게 가기 싫다 거절할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프다는 데 뭐 어쩌겠어.”

“그렇지요. 그런데 소주 안색은 누가 봐도 건강한 안색이어서요.”

“그 정도야?”

“네.”

원웅이 작은 손거울을 가져다주기에 얼굴을 비춰보니, 음. 요즘 훈련을 많이 해서인가. 확실히 건강해 보이긴 하네.

혈색도 좋고 뺨도 좀 동그래졌고. 게다가 입술도 핏기가 잘 돌아서 붉은빛이 난다.

그래서 경사태감이 날 그렇게 쳐다봤구나.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아프다고 돌려보냈는걸.”

“폐하께서 진노하실까 염려됩니다…….”

“한 번 정도는 봐줄 거야.”

사람이라면 그러겠지. 근거는 없지만 확실한 척 원웅을 위로하고서 나는 다시 침상 위에 엎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일어나야 했다.

“소주.”

경사태감이 돌아오는 바람에.

“폐하께서 어의를 불러 진맥해주시겠으니 데려오시랍니다.”

“!”

* * *

결국 또 이불말이 상태가 되어서 황제의 침방에 가게 되었다.

태감이 날 침상 위에 내려준 뒤.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온몸을 꿈틀거려서 이불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고서 매섭게, 하지만 너무 불경하진 않도록 황제를 째려보려 했는데…….

“아무리 고운 얼굴로 해도 보기 추한 행동이 있구나.”

황제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 날 구경하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이딴 소리나 했다.

사실 눈이 안 보여서 웃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아마 웃고 있었을 거다. 목소리가 웃는 목소리니까.

“잠자리에서까지 얼굴 가리는 분이 할 말씀이 아니십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항의하고서 휙 고개를 돌렸다.

“역시 꾀병이었지?”

황제의 질문에 얼른 몸에서 힘을 도로 빼야 했지만.

“속 보인다.”

황제는 픽 웃고서 손쉽게 나를 돌려 눕혔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 보게 되자 황제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길고 쭉 뻗은 목덜미. 목만 보면 잘생겼는데. 얼굴은 왜 가리고 있는 걸까.

물론 황제가 목이 잘생기건 말건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아니, 그래도 잘생겼으면 좋지.

“어때. 불러줄까?”

“뭘 말입니까.”

“어의 말이다.”

“!”

두 눈에 반항심을 잔뜩 담아 쳐다보자, 황제는 처진 눈썹을 쭉 위로 올려 주고는 혀를 찼다.

“눈꼬리랑 눈썹 끝이 따로 노는군.”

“아픈 사람에게 시침을 시키시고. 참 취향도 별나십니다.”

“안 아프지 않느냐.”

“그래도요.”

“따지자면 네가 진짜 시침을 하는 것도 아니고.”

“!”

불경하건 말건 조금 더 눈에 힘을 줘서 째려보자, 황제는 내 눈 덜미를 엄지로 둥글게 문지르며 또 놀렸다.

“우리 계란이는 왜 매일 화가 나 있을까.”

“그걸 모르십니까?”

“모르겠는데. 방 안에서 몇 시진이나 기다린 사람은 네가 아니라 짐 아니었느냐?”

“그 전후를 생각해보세요, 전후를!”

“전후?”

내가 조목조목 칼처럼 따지자, 황제는 잠시 고민하는 척 정면을 향해 돌아눕더니 다시 휙 옆으로 돌아서면서 웃었다.

“혹시 짐이 연비와 산책 한 일로 화가 났느냐?”

“!”

뭐야. 내가 그 광경 목격한 걸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그럼 내가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거야? 어디에 화를 내야 하는 거야?

아니, 화를 낼 게 아니지. 그가 연비와 팔을 찰싹 붙이건 입술을 찰싹 붙이건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화 안 났는데요? 제가 화가 난 건 폐하께서 그전에 제게 했던 말들 때문입니다.”

“전후로 화가 났다면서.”

“제가요?”

“그래. 네가.”

“아닌데요?”

“반의 반 각도 지나기 전에 한 말인데. 그새 잊었느냐?”

“잊은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딱 잘라 거짓말하자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더니, 손을 올려 내 입술을 위아래로 딱 잡고 흔들었다.

“음. 음. 으으.”

그 상태로 내가 항의하자 황제는 그게 또 재밌는지 웃다가 입술을 놓아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행태였다.

나는 황제와 연달아 싸운 일로 아직 화가 나 있는데, 이 황제는 왜 혼자 풀려서 이리 재밌어하는지.

결국 아예 말을 섞지 않으려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눈을 딱 감아 버렸다. 잠든 사람에게 말을 걸진 않겠지.

“내 아내가 다른 사내에게 춤을 선물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다른 거로 골라라.”

그러나 황제가 이다음에 한 말은 무시하기 어려워서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떡돌이 이 새끼…… 그 내시 자식, 내가 검무를 준비 중이란 걸 그새 황제에게 일렀어?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제에게 물었다.

“그거,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누구에게 들었다.”

이가 아득아득 갈린다. 떡돌이 자식. 없는 게 거시기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신의도 양심도 없었어! 이럴 수가 있나. 뒤통수가 다 얼얼하다.

하지만 떡돌이에게 화내는 건 나중에 하자. 지금 중요한 건 다른 거니까.

“작년에는 다른 후궁이 노래를 불렀단 걸 들었습니다. 그전에 춤을 춘 후궁이 있었단 것도 들었고요.”

그런데 어디서 약을 팔아?

“올해부터 바꾸면 되지.”

하지만 약장수가 너무 권력이 셌다. 하긴. 그러면 되긴 하겠네.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리자, 황제는 팔로 머리를 괴면서 물었다.

“왜 굳이 그런 선물을 하려는 거지? 그냥 평범하게 물건 하나 사 주는 게 낫지 않느냐?”

“그렇죠. 근데 전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돈 안 드는 선물을 해야 해요.”

“!”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황제의 손길이 잠시 삐끗했다. 내 말에 좀 놀란 듯했다.

나 역시 만만치 않게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젠장. 황제가 법 뜯어고친단 말을 너무 쉽게 하는 바람에 놀라서 실언했어.

황제 앞에서 돈이 없니 어쩌니 하는 얘긴 안 하고 싶었는데.

그러나 이미 내 궁핍한 사정을 들어버린 황제는 황당하단 투로 물었다.

“녹봉이…… 적으냐?”

“예.”

“처소에도 별 물건이 없고. 걸치고 다니는 것도 별 물건이 없는데. 어디 쓴다고? 네 가문……이 네 녹봉을 뺏어갈 만큼 어렵지도 않을 텐데?”

“어디든 쓰게 됩니다.”

딱 잘라 말하자 황제는 몇 번이나 ‘허 허’ 소리를 내더니 잠시 생각하다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황제가 내게 제안한 건 사기였다.

“내가 적당한 선물을 주겠다. 그걸 네 선물이라 말하고 사자에게 주거라.”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황당해서 쳐다보자. 자기도 이런 제안을 한 게 민망하긴 한지 황제가 헛기침했다.

“짐이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거다.”

그건 당연한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 동생에게 줄 선물을, 폐하가 직접 주신다고요?”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사실…… 뭐 그래도 상관이 없긴 했다.

저 제안을 한 게 황제가 아니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생색을 낼 수 있다니, 참으로 편리하지 않은가.

“대신 앞으로 검무는 짐 앞에서만 추도록 하라.”

그러나 황제가 덧붙인 말이 내 입술을 저절로 움직였다. 거절을 말하도록.

“싫어요.”

황제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걸 뚝 멈추었다.

“싫다고?”

“네.”

황제의 입술이 일자로 변했다.

그가 내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단 게 노골적일 정도로 뚜렷했다.

그래도 나는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 싫단 거지?”

“전 남들 앞에서 춤추는 게 좋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황제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뭐라?”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짐의 말을 거절해?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니까.

나는 남들 앞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그냥 황제와 저런 약속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그는 황제이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별개로 그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걸.

그가 검무를 추지 말라 명령한다면, 나는 결국 출 수 없을 거다.

그렇지만 그 명령이 좋은지 싫은지 그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할 거다.

억지로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그런 명령 듣는 건 싫다고.

내 앞날을 두고서 황제가 멋대로 약조시키는 건 싫다고.

특히 그 명령이 내게서 무언가를 제한하는 거라면 더더욱.

“네가 그렇게 춤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좋아합니다. 전 혼자 있을 땐 늘 춤을 춰요.”

“사람들 앞에서 추는 게 좋다더니.”

이 황제가 진짜 계속 말꼬리 잡고!

“혼자 춰도 좋고 사람들 앞에서 춰도 좋죠. 어쨌든 폐하 앞에서만 추진 않을 겁니다.”

“황명이라도?”

“몰래 출 거예요.”

나는 똑 부러지게 말하고서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뒤에서 황제가 불길할 정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에, 결국 슬쩍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돌아보자마자 눈이 마주쳐서 도로 시선을 피했지만.

분명 화를 내거나 차갑게 빈정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 후로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내가 처소로 돌아갈 때까지.

그리고 사자 친왕의 생일이 될 때까지 나를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았다.

* * *

결국,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사자 친왕의 생일날이 되었고, 나는 무난하게 꾸미고서 연회 장소로 걸어갔다.

수많은 태감과 궁녀들이 황제가 가장 아끼는 아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화화정에 있는 넓은 터를 연회 장소로 꾸민단 이야기는 이미 다른 궁녀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관련자들의 출입을 막아서 어떻게 꾸미는지는 전혀 보지 못했는데. 연회장에 와서 보니 생각 이상으로 놀라웠다.

“와. 참 예뻐요.”

내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내내 걱정하던 원웅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감탄할 정도로.

화화정은 후궁들의 처소가 있는 동쪽 구역 전체를 둘러싼 커다란 정원으로, 그 안쪽에는 주위가 온통 꽃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 있다.

특히 휘장처럼 내려온 꽃 덤불 아래로 바깥쪽과 이어진 호수며 그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커다란 정자는 이 공간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워서,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아도 계절이 늘 이곳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런 곳을 작정하고 꾸미자, 연회 장소는 정말 신선들이 모여서 노는 곳만큼 화려했다.

이 때문일까? 사자 친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모두 얼굴이 활짝 피어서 온갖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나한테 이상한 차를 건넸다가 근신 명령을 받은 안비 역시 근신이 풀렸는지 간만에 얼굴을 비추었고, 다른 후궁과 황후는 물론 연얼 군주까지도 자리했다.

그 외에 내가 얼굴 모르는 황족들도 몇몇 왔고.

그렇게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문 악공들과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했다.

이후에는 전문 무희들이 춤을 추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춤과 노래를 구경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대체 선물은 언제 보내는 건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사자 친왕의 태감 하나가 능청스럽게 바람을 잡았다.

“선물을 가져오신 분들께서는 이쪽으로 선물을 놓아주시면 됩니다. 우리 전하께서 빨리 선물을 받고 싶으시답니다!”

태감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그걸 시작으로 하나둘 자기들이 준비한 선물을 사자 친왕 쪽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신분이 높은 순서대로 보내는 건 아니고, 그냥 뒤죽박죽 아무 순서로 보내는 듯했으나, 보통은 자기 밑의 태감을 시켜 사자 친왕의 태감 쪽으로 선물을 보냈다.

사이가 좋은 황족 몇 명만이 직접 선물을 가져가 건넬 뿐.

나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사람들이 전부 다 선물을 보냈을 즈음.

결국 더 미루지 못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내가 왔는데도 술 한잔 안 건네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내가 사자 친왕의 곁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면사로 가렸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가장 상석 탁자에 태후와 황후, 황제, 사자 친왕이 나란히 앉아 있었기에, 태후와 황후 역시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를 나누던 걸 멈추고 내 쪽을 쳐다보았고.

젠장. 그런데 상석에 앉은 네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왜 다른 사람들까지 다 조용해진 거야?

내가 직접 와서? 나도 다른 후궁들처럼 그냥 태감을 시켜서 선물을 건넬 걸 그랬나?

하지만 내 선물은 태감을 통해서 보내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단 말이야.

“천 귀인.”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자기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내 텅 빈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사자 친왕이 이 상황이 재밌는지 눈이 휘어져라 웃으면서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자식아, 일어나지 마! 더 눈에 띄잖아!

“무슨 선물을 주려고 여기까지 몸소. 참으로 고맙습니다.”

기대도 높이지 마!

젠장. 하지만 사자친왕이 덩달아 일어나면서 저런 말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악공들까지 뭐 특별한 선물을 전달하는 구나 싶은지 곡 연주를 멈추었다.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오네. 아까까지는 가벼운 분위기였는데, 왜 내 순서가 되니까 분위기가 바뀐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돌아가면 더 이상해.

옆에서 따끔따끔 쏟아지는 황제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나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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