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남의 선물 고르기가 이렇게 어렵다
돈을 빌려달라는 게 웃긴가?
“재밌구나.”
웃긴가보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연비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니.
어디가 웃긴 거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연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재밌어.”
……칭찬인가? 떨떠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슬며시 기대가 되었다.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것 같으니 돈을 빌려준단 거겠지?
그러나 기대를 하자마자 연비는 웃음을 뚝 그쳤다.
“폐하께 빌려보련.”
게다가 저런 말까지.
“자신 없니?”
도발도 해주시고.
“가능하면 내가 여기 왔겠어?”
솔직하게 되묻자, 연비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왜 안 되지? 폐하께선 널 가장 총애하시는데?”
“싸웠어.”
그리고 총애는 무슨. 그놈은 나더러 대놓고 그랬다고. 후궁은 후궁이고, 자기는 고백해도 되지만 나는 안 되고 등등.
하지만 연비는 싸웠다는 내 말에도 남 일답게 시원스레 권했다.
“그럼 이참에 화해해보련.”
돈 꾸면서 화해하는 사람이 어딨어! 싸우고 나서 뜬금없이 찾아가 “돈 빌려주십시오, 폐하.” 하면 내가 뭐가 돼?
돈 꾸는 후궁이 되겠지.
……뭐, 그래도 무림인들의 공적보단 낫긴 하네.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 * *
내가 사립문 울타리를 열고 들어가자,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쁘던 원웅과 부성은 얼른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뭐라 하세요?”
“빌려주신대요?”
두 사람 모두 내 궁핍한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까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폐하한테 꿔래.”
내 대답을 듣자마자 원웅이 반사적으로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유 짜. 너무하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원웅의 말에 동의했다.
“그뿐만 아냐. 말하는 게 잘 벼려진 칼날 같더라. 원래 그래?”
다정할 땐 다정한데 무서울 땐 또 무섭게 말하고.
사람 표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휙휙 변하고. 아랫사람들이 비위 맞추기 되게 어려운 성격 같던데.
원웅은 내 말이 말인지 알겠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원래 그러셨어요. 입궁하기 전부터.”
반면 부성은 조금 좋은 쪽으로 말을 돌렸다.
“위엄 있고 영민하시고.”
부성이는 연비를 되게 좋게 평가하네? 이건 또 의외인걸. 하긴.
이게 무슨 상관이야. 누굴 좋게 보건 그건 부성이 마음이지.
나는 더 말을 나누는 대신 발을 질질 끌면서 마당에 놓인 평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 지금은 연비가 문제가 아니야. 그 사람은 돈 안 빌려준다잖아. 그걸로 끝이지. 나한테는 돈이 문제라고.
나는 무릎 위에 팔을 괴고서 멍하니 연비가 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황제에게 가서 꿔라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건 아니야.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하늘 위 동동 떠가는 구름마저 돈으로 보여서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내가 왜 이딴 걸 고민해야 하는 걸까?
“아. 녹봉. 나 녹봉 언제 나와?”
“친왕 전하 생신 이후에요.”
“가불은…….”
“될 리가요.”
나는 팔을 내리고 몸을 통째로 옆으로 뉘었다. 이대로 누워 있으면 얼굴에 자국이 나겠지만 지금 자국이 문제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확 기분이 상했다.
젠장. 내가 빈털터리가 된 게 누구 때문인데, 그 누구를 위해 선물을 고민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부조리한 일이 있을까?
뭐 많겠지.
어쨌든 마음 같아서는 사자친왕 탓이라 구구절절 따진 다음 그에게 내가 뭘 주든 주는 대로 받으라 따지고 싶을 정도…… 아!
“어디 가세요, 소주?
내가 평상 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벌떡 일어나자 원웅이 얼른 물었다.
“사자친왕한테!”
“예?”
놀란 원웅에게 대충 설명해주고서 나는 얼른 사립문 울타리를 들추고 밖으로 뛰어갔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사자친왕은 내 사정을 알잖아?
그러니 내가 빈털터리란 걸 알면 선물을 소박하게 해도 된다 할지 몰라.
양심이 있으면 그러라고 하겠지. 명색이 왕인데, 별달리 가지고 싶은 물건도 없을 거고.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소박한 선물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들풀 같은 거?
* * *
“그럴 리가요.”
하지만 사자친왕은 내가 사정을 설명하고서, 들풀을 꺾어다가 예쁘게 포장해서 주면 안 되냐고 묻자 대번에 정색했다.
“들풀 싫으세요?”
“들풀은 들에 피었을 때 예쁘지, 생일 선물로 받으면 안 예쁩니다.”
“들풀이 슬퍼할 거야.”
내가 헛소리를 중얼거려보았지만, 사자친왕은 가볍게 무시하고서 빙그레 웃더니 갑자기 자기 부채를 들어 올려서 약 올리듯 팔락거렸다.
“요즘 부챗살이 좀 부실한 듯도 하고.”
“부채 사달란 말인가요?”
분노를 누르며 묻자, 사자친왕은 방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이건 돈 한 푼 없는 후궁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닌데.”
한 대 때려도 되나? 코에서 김이 날 것 같다.
씩씩거리느라 어깨가 자꾸 들썩이려는 걸 애써 참으면서 나는 항의하듯 물었다.
“그럼 뭘 가지고 싶으신데요?”
그러자 사자친왕은 픽 웃더니, 부채를 넣으면서 아까의 놀려대던 말투를 그만두고 평소처럼 말했다.
“사정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봐줄 순 없다?”
“아닙니다. 봐 드려야지요. 우리 사이에 우정도 있는데.”
이놈아! 우리 사이에 언제 우정이 있었는데?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말이지만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염 귀인도 그렇고 사자친왕도 그렇고, 궁궐에 와서 내 동의 없는 친구들이 왜 이렇게 늘어나는지 모르겠네.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사자친왕이 빙그레 웃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요, 천 귀인.”
“어떻게요?”
“정보호에게 ‘진짜’로 뭘 물었는지 내게 알려주십시오.”
“!”
그가 한 뜻밖의 제안에 나는 입을 벌렸다. 뭐라고?
하지만 사자친왕은 그냥 한 말이 아닌 듯했다.
“그러면 난 천 귀인이 무엇을 주든 감동하는 시늉을 하겠습니다. 들풀? 아까 말한 그 들풀. 오는 길에 대충 꺾어와 내밀어도 좋아하겠습니다. 약조하지요. 이러면 어떻습니까?”
천 귀인은 돈을 안 쓰고, 나는 원하는 걸 얻고.
참 좋은 의견이라는 듯 덧붙인 사자친왕은,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자 놀라울 정도로 화사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어 본 사람?
난 그런 속담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난 뱉을 수 있거든. 하나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무공을 잃은 후궁 처지이고 상대는 왕이니 원래 성격대로 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얼굴이 구겨지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내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사자친왕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내 제안이 별로입니까?”
별로냐고? 당연하지! 애초에 내가 빈털터리가 된 게 네놈 탓이잖아!
너 같으면 네 돈 훔쳐 간 놈이 가문의 비밀과 떡 한 덩이를 교환하자면 기분 좋겠냐?
* * *
“소주, 친왕 전하께서 뭐라고 하세요? 괜찮다고 하세요?”
사자친왕과 헤어져 처소로 돌아가는 길.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다 싶자 원웅이 얼른 내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세요?’라고 묻지만 ‘안 괜찮다고 하시죠?’에 가까운 표정으로.
“어. 싫대.”
따지자면 거절은 아니고, 조건부 허락이긴 한데.
난 그 조건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니까. 뭐 거절이나 다름없겠지.
“그럴 것 같았어요.”
한 걸음마다 한숨을 한 번씩 내쉬었지만, 처소에 돌아갈 때까지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아아. 정말 어쩌지. 정보호에게 하려던 질문을 사자친왕에게 알려주긴 싫고.
아무 선물도 준비를 안 했다가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싫은데.
딱 적당한 수준에서 구색을 갖추어 중간 즈음만 하면 좋은데, 이 수준이 어딘지 짐작도 안 가고…….
“작년에 혜비마마께서 노래를 선물하셨잖아요.”
처소에 들어와서도 내가 계속 고민하자, 부성이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소주도 노래나 춤을 잘하시면 좋을 텐데요.”
의견을 내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같이 한탄해주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딱 튕기다가, 부성의 말에 아주 번뜩이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노래?”
“네? 네.”
“그래도 돼?”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묻자 부성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요.”
“춤도 되고?”
“네.”
부성은 대답하면서도 계속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통 짐작이 가지 않는 듯했다.
“좋아! 그럼 난 그걸로 해야겠어!”
그러다 내가 대놓고 계획을 말하자, 부성은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트릴 뻔했다.
“네? 노래요? 춤이요? 하지만 소주는…….”
부성은 어물어물 뒷말을 생략했지만, 뒤에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명확했다.
소주는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 부르잖아요. 이 말 하고 싶은 거지?
진짜 천 귀인은 그랬나 보지. 하지만 난 아니다. 나는…… 춤을 잘 추거든!
* * *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오랜만에 청적으로 뛰어갔다. 그곳에서 춤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혹시 떡돌이를 만나면 내 춤이 어떤지 미리 봐달라 해도 좋고.
“떡돌아!”
다행히 청적에는 떡돌이가 먼저 와서, 늘 있는 그 바위 위에 붙박이처럼 앉아 하염없이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떡돌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제자리에서 발만 움직였다. 뭐야. 왜 제자리걸음을 해?
“떡돌아!”
뭐 괜찮아. 뒤로 안 가면 됐다. 내가 앞으로 가니까.
몇 걸음 만에 나는 그의 코앞으로 다가가 히죽 웃었다.
고민을 끝낸 덕에 기분이 후련해서인가. 입이 자꾸 크게 벌어졌다.
그런데 왜 저러지? 나는 웃는데. 떡돌이는 입술을 깨물고 나를 원망스레 보기만 했다. 좀 억울한 표정으로.
그러다가 뱉는 말.
“너무하는군.”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질책이라니. 너무 뜬금없잖아. 나는 놀라서 물었다.
“뭐가?”
“…….”
그러나 떡돌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뭐가 너무한데?”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는 “있다. 그런 게.” 하고서 얼버무렸다.
“뭐래.”
툴툴대보지만 역시 설명을 하지 않기에, 나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거라면 말했겠지 싶어서.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있지, 내가 뭐 보여줄 테니까 눈 크게 뜨고 잘 봤다가 소감 말해봐.”
“뭘.”
“봐봐. 아, 검 좀 빌려줘.”
“검? 이건 실용적인 검이 아닌데.”
“괜찮아.”
떡돌이는 의아해하면서도 허리춤에 찬 장식용 검을 내밀었다.
나는 그를 밀어서 도로 바위에 앉히고서 몇 발자국 뒤로 가서 검을 수평으로 들었다.
“봐봐.”
떡돌이는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무슨 상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명하는 대신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검을 아래로 빠르게 내렸다가 다시 위로 올리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꺾으면서 머리도 하늘을 향하게…….
이건 예전에 개원이 만들어 준 검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존에 유행하던 천…… 무슨 검무를 변형한 거라는데, 어디로 불지 모를 바람 같은 게 꼭 내 무공 같더라면서 알려주었지.
어쨌든 그 검무를 맛보기 정도로만 춘 다음, 나는 검을 내리고서 ‘짠!’ 하는 자세를 취하며 그에게 물었다.
“어때?”
“…….”
그러나 떡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어떠냐니까?”
하도 말이 없기에 결국 직접 다가가 검을 돌려주면서 재차 묻자, 그제야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아니. 사자친왕 전하 생신 선물로 출 건데, 어떤지 의견 좀 구하려고.”
“!”
“어땠어?”
잘 췄지? 잘 췄으니까 이렇게 놀란 표정이지. 그치?
“엉망인데.”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과 전혀 반대였다.
“진짜? 그럴 리가.”
내가 이 검무를 추면 개원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우박 같다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는데.
“눈 똑바로 뜨고 잘 봤어? 승언이 본 거 아냐?”
도저히 그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내가 다시 묻자, 나무 뒤에서 승언이 항의하듯 이파리를 흔들었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
나는 떡돌이에게 손으로 허공을 여기저기 찌르는 시늉을 하면서 다시 물었다.
“진짜 제대로 본 거 맞아?”
그러나 떡돌은 이번에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엉망이야. 그런 걸 친왕 생일에서 추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마.”
“…….”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떡돌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화났나?”
자기 입으로 엉망이라 해 놓고서. 내가 그 말에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박한 평가는 취소하지 않는다.
“아니. 화 안 났어.”
어쨌든 화난 건 아니었기에 나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화난 얼굴인데.”
떡돌이는 내 말을 안 믿는 듯하지만.
“진짜로 화 안 났어.”
정말이다. 난 화나지 않았다.
“화날 게 뭐가 있어. 네가 뭐라 하든, 난 내가 잘 추는 거 아는데.”
“!”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넌 오답을 말했지.”
“!”
“너 안목이 형편없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