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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41화 (41/283)

##  41화. 어딜 갔다 왔느냐

“아니, 낭자는 누군데 내 머릴 내려치시오?”

정보호는 그 짧은 찰나 손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아내고는, 황당하단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막을 만도 하지. 정보호가 정보에 미친 자라지만, 단순히 정보 수집 실력만 좋은 건 아니었다.

그는 무술 실력도 누군가에게 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보를 모은답시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데. 사지 멀쩡히 목숨 부지하려면 웬만한 실력으로 될 리가.

어쨌든 비명을 질렀던 점소이는 정보호가 멀쩡하자, 그제야 안심해서 내게 다시 외쳤다.

“자객 아니라면서요!”

“앞에서 공격했으면 자객 아니잖아.”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앞에서 공격하면 기습이고 뒤에서 공격하면 암습이지. 자객이 하는 건 암습이고, 내가 한 건 기습이니까 엄연히 다르지 않나?

하지만 굳이 이 부분을 두고 점소이와 논쟁할 필요는 없지. 나는 점소이와 말을 더 섞는 대신 정보호에게 사과했다.

“초면에 공격해서 미안하오. 내 급한 볼일이 있어 눈길 좀 끌어 보았소.”

정보호는 멀뚱멀뚱 날 쳐다보다가 입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벌렸다.

“접시 내려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눈길을 끌려 그랬다고?”

“그대는 아는 것도 많고 쫓아다니는 이들도 많다 들었소. 그래서 웬만한 이와는 아예 상대도 안 해준다고. 그대의 눈길을 사로잡아야만 말을 섞어 준다던데.”

“아니, 이 낭자 해석 실력이 아주 국가 장원급이로구만. 눈길 사로잡으란 말을 어찌 그리 해석하나?”

“정말 미안하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미안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이건 가식적인 표정이고,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절대적인 악감정이 있어서 그렇다. 내가 무림악적 천년비로 악명을 떨칠 때, 이 새끼가 내 위치를 여기저기 팔아댄 탓에 엄청나게 고생했거든.

이놈은 내가 접시가 아니라 대접으로 내려쳐도 순순히 머리를 내밀어야 해.

“이보시오, 낭자. 내 눈길을 사로잡으란 말은, 사회적 위치를 쌓아오든, 눈 돌아갈 재물을 가져오든, 그걸 무시할 만한 강자가 되어오든, 하여튼 이런 뜻이지, 냅다 머릴 내려치란 뜻이 아니오!”

“아하.”

“아하?”

“이제 알았으니 헷갈리지 않겠소.”

“이 낭자가?”

황당해하는 정보호에게, 나는 얼른 천 귀인의 처소에서 박박 긁어 모아온 패물 주머니를 내밀었다.

정보호는 고함을 지르려다가 떨떠름해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이건?”

“정보값.”

“그래도 챙길 건 챙겨 왔군.”

정보호는 툴툴거리면서도 주머니 안을 살폈다. 하지만 그뿐. 그는 주머니를 챙기지도 돌려주지도 않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저러지? 양이 좀 애매한가? 하지만 있는 건 다 담아온 건데. 저거 꽤 돈 좀 나갈 텐데.

걱정이 되어 보고 있자니, 정보호의 입가에 꺼림칙한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하하하하.”

멀지 않은 곳에서 소나무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사자친왕이 다가오며 웃고 있었다.

젠장. 술기운 오른다더니 빨리도 왔네. 그를 보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하지만 사자친왕은 가까이 오면 올수록 더욱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완전히 가까이 오자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정보호에게 말했다.

“정 동생,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네. 왜 이런 모습으로 왔는진 모르겠지만, 이분은 아주 신분 높은 분이니.”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보호도 같이 욕을 뱉었다는 거.

아무래도 정보호는 내게 정보를 팔지 않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 뭘 묻고 싶소, 의외로 신분 높은 낭자?”

다행이지 않은 게 있다면…….

‘사자친왕, 이 쓸모있는 척 구는데 쓸모없는 자식.’

기껏 정보호가 내게 정보를 줄 준비가 됐는데. 막상 옆에 선 사자 친왕 때문에 뭘 제대로 물어볼 수가 없다는 거.

지금 천년비라던가 사하비단에 관해 물어보면 사자친왕이 수상쩍게 여기겠지?

무림과는 관련도 없는 천 귀인이 굳이 몰래 궐 밖으로 나와서 이런 걸 물어볼 이유가 없으니…….

“…….”

“뭐 묻고 싶냐니까?”

젠장. 어쩔 수 없지. 의문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심을 사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뭘 좋아하실까.”

결국, 나는 사자친왕을 의식하고서 후궁이 할 법한 질문으로 무난한 걸 골랐다.

뭐, 후궁이라고 해서 꼭 이런 것만 묻진 않겠지만. 그래도 편견이란 게 있잖아.

지금은 평범하고 눈에 안 띄는 질문이 최고니까.

하지만 내 사정을 모르기에 정보호는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겨우 그딴 걸……. 물론 폐하의 취미는 소중하지만, 하여튼 그걸 물어보려고 내게 접근한 거요?”

“그딴 거라니. 어허. 황제 폐하와 관련된 정보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발끈해서 황제의 위엄을 언급하자, 정보호는 살코기를 먹다가 뼈를 씹은 얼굴로 인상을 굳혔다.

황제 운운하니 반박은 못 하겠는데. 여전히 내 질문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동감이다.

그 옆에서 사자친왕은 혼자 눈치 없이 밝게 웃었다.

“내 친우는 참 귀엽구만.”

하지만 태안루에서 나간 후. 날 바래다주겠다면서 잠시 따라 나온 사자친왕은 빙그레 웃으면서 뼈있는 말을 던졌다.

“나 때문에 진짜로 묻고 싶은 걸 못 물어서 어쩝니까, 천 귀인.”

“!”

* * *

분명 고생은 좀 한 것 같은데. 왜 성과가 없을까.

흑합 장군과 무사히 만나 궐 안에도 잘 돌아왔지만, 수확이 없다 보니 어깨가 내려가 올라오질 않는다. 축 처진 기분 탓이다.

결국 시무룩한 기분을 바꾸지 못한 상태로, 나는 터덜터덜 내 처소로 돌아갔다.

맛있는 걸 좀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까?

그런데 웬걸. 처소 앞으로 와 보니 측근 궁녀인 원웅과 부성이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묻자마자 답은 스스로 알아차렸다. 와, 황제 왔나 봐.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 초라한 처소를 황제의 호위들이 둘러싸고 있잖아. 분명 황제가 온 거다.

“소주, 폐하께서-.”

“알아.”

나는 부성이 설명하려 하는 걸 손을 들어서 막았다. 조용히 해.

네가 설명하면 황제가 저 안에서 들어. 여긴 방음이 안 된다고.

‘후우. 미치겠네. 왜 이렇게 일이 꼬이지?’

하지만 상대가 내 방에 있으니 도망칠 곳도 없었다.

여기서 오래 망설여봤자 수상하기만 하겠지. 이미 황제는 내가 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황제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거면서,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모른 척 탁자 앞에서 술만 마셨다. 나쁜 놈.

자기 방이면 그나마 이해할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지, XX 여기 내 방인데요?

“크흠.”

일부러 헛기침을 해보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기는 마찬가지.

“크흠흠.”

다시 헛기침을 하자, 황제는 그제야 내게 말을 걸었다.

“재밌게 놀다 왔느냐?”

그나마 쳐다도 안 보고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황제야. 여기는 내 방이에요.

“언제 오셨습니까? 미리 언질을 해 주셨으면-.”

“잘 속이고 다녀왔을 텐데.”

“그럼요.”라고 대답하면 안 되지.

“여기서 기다렸을 텐데요.”

말하고 나니 에이, 치사해라. 자기가 온다는데 내가 왜 여기서 기다려?

……하긴. 저놈은 황제지. 기다려야지.

에이, 그래도 역시 치사하네. 아니, 우리가 전에 싸운 건 생각이 안 나나? 왜 다짜고짜 찾아왔대?

“재밌게 놀다 왔느냐.”

하지만 내가 속으로 씩씩대건 말건 황제는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반복할 뿐이었다.

모르지, 어쩌면 저놈도 속으로는 만만치 않게 씩씩거리고 있을지도.

“제가 어디 다녀왔는 줄 알고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은 아니었지.”

남의 방에 와서 구는 저 차가운 태도가 괜히 거슬린다.

황제만 아니었으면 주둥이를 찰싹 때리고서 이쪽 좀 보고 말하라 할 텐데. 억울해.

아니, 요 며칠 계속 싸워댔는데 갑자기 올 줄 알았겠냐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 이게 뭐야.

얼마나 억울했던지 순간 내 입에서 끙하는 소리가 나갔다.

“할 말이 있거든 해라. 혼자 앓지 말고.”

황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게 다시 차갑게 말했고, 이때다 싶어서 나는 얼른 하소연했다.

“오래 기다려서 지루하신 건 알겠는데요. 전 폐하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방 안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합니까? 이런 거 가지고 막 화내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졌나. 황제가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나는 솔직하게 항의했다.

“전 뭐 폐하 한 사람만 보고 늘 여기서 대기라도 해야 합니까? 아니잖아요.”

“아닌 게 아닌데.”

“!”

“그러라고 있는 게 후궁 아닌가.”

저…… 재수 없는…… 저걸 말이라고 한 건가? 내가 들은 게 말인지 엿인지 모르겠다.

황당해서 쳐다보자 황제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내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뭐!

“!”

그러나 다가온 그가 한 건, 두 팔을 벌려 나를 가볍게 포옹하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황당해서 뭐라 하려 했으나, 황제는 바로 손을 거두고 몸을 뒤로 뺐다.

“억울해서. 그냥은 못 가겠더라.”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황제는 자기 행동을 친히 해석해주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잠시 문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 궁녀들이 걱정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만 벌리고서 황제의 뒷모습을 째려보았다.

* * *

“소주, 괜찮으세요?”

황제가 완전히 멀어지자마자 원웅과 부성은 얼른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부실한 방음 탓에 안에서 낸 소리를 다 들었는지, 둘 다 걱정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안 괜찮아. 기분 나빠.”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고서 침상에 털썩 앉아 황제가 술을 먹다 간 흔적들을 가리켰다.

“저거 잔이랑 주전자랑 다 치워버려.”

사실 평소의 나는 지금보다는 좀 더 너그럽다.

황제가 내 방에서 날 무시하고 간 게 기분이 상하지만, 그놈은 원래 그렇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너그러운 천년비가 되기에는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그럴 수밖에. 정보호를 만나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기껏 정보호를 만나 놓고서 아무런 수확이 없었으니!

그뿐인가? 정보호에게 가진 재산만 죄다 넘기고 왔다.

젠장. 가진 돈 싹 다 가지고 나갔는데, 나는 이제 땡전 한 푼 없는 후궁이 된 거라고!

그런데 이 와중에 황제는 내 방에서 적반하장으로 굴고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저…… 소주.”

하지만 부성은 주전자와 접시를 가지고 바로 밖으로 나간 반면, 원웅은 내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여기서 세 시진이나 기다리셨어요.”

그 말에는 나도 좀 놀랐다.

“세 시진? 진짜?”

“네.”

“…….”

그래서 내가 왔는데도 무시하고 있던 건가.

아니, 그래도 내 방에서 날 무시한 건 화나지만, 음. 세 시진 기다렸으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기도 하고…….

* * *

다음날까지 곰곰이 생각해도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 시진이나 기다렸으니, 섭섭할 만도 하지…… 싶고.

어떻게 생각하면 아니, 약속도 안 잡고 멋대로 와 놓고서는 왜 자기가 삐졌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자꾸 신경이 쓰인단 것이었다.

‘신경이 쓰이면 해결을 해야지.’

결국,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직접 황제를 만나러 가보기로 했다.

한 번 더 싸우든 화해를 하든 그래도 만나는 봐야 할 거 같아서.

“심궁에 직접 가시려고요?”

내가 황제를 보러 가겠다고 하자 원웅과 부성은 질색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간 적이 있긴 하니까.

“응. 말이나 좀 더 해보자 싶어서.”

두 사람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내가 평소보다 좀 더 단정하게 차려입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여기서 단정은 후궁 기준 단정이다.

두 사람이 내게 준 옷은 생김새는 나풀나풀하지만 색은 검은색과 흰색뿐이어서, 마치 학의 날개처럼 보였다.

“이렇게 입으면 문사 느낌이 날 거예요.”

글쎄. 문사 흉내 내는 돈 많은 집 불량한 자제 느낌 같은데.

어쨌건 나보다는 두 사람이 옷에 대해 더 잘 알겠지 싶어서, 나는 학 차림을 하고서 황제를 찾아갔다.

‘두 번째 오는 건데도 다들 엄청나게 쳐다보네.’

관리들은 내가 나름 문사처럼 차려입고 왔는데도 귀신 보듯 힐긋거렸지만, 이번에도 황제가 어디 있는지 위치는 잘 알려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심궁에 있지 않다고 했다. 이번에는 심궁과 동쪽 구역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젠장, ‘어딘가’는 또 뭐야?

어쨌든 그들의 말에 따라 나는 다시 동쪽 구역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헤맨 끝에야 마침내 황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기껏 찾아낸 황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

다른 후궁과 함께 있었다. 심지어 사이도 좋아 보여.

딱 붙어서 호숫가를 산책하는 모습이 아주 족자에 나오는 한 쌍의 그림 같구만. 마음에 안 드는 그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원웅이 “소주……” 하고 힘없이 중얼거린다. 내가 저 모습을 보고 충격받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진짜로. 단지 저렇게 사이좋게 딱 붙어 있는데, 내가 끼어들어도 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렇지.

저쪽에 끼어들면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되려나?

그때. 황제와 나란히 산책하던 후궁이 내 쪽을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여겨지는 순간. 그 후궁이 빙그레 웃으면서 황제의 팔을 꼭 잡더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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