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어느 쪽 과거 사람일까
협박은 웬만한 일에는 다 잘 통한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이지.
하지만 가끔 목숨을 가지고 협박해도 안 통하는 자들이 있는데, 허세와 자존심이 목숨보다 소중한 자들이 그렇다.
“한가락 하는 자로군. 하지만 여기서 내 목을 따더라도 그따위 시는 인정할 수 없다!”
눈앞의 이 학사 같은 사람들 말이다.
좀 기분 나쁘네. 내 시가 죽어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단 거냐.
물론 작정하고 지은 시가 아니라 그냥 협박용으로 대충 지은 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이 몸이 궁중에서 한가락 날리는 시인인데!
“정말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래.”
내가 거듭 위협적으로 건들거려 보지만, 학사는 외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곳이 어디지? 대중천의 수도 한가운데다. 날 죽이고 이 안에 들어간다 한들, 보는 눈이 몇일까. 과연 낭자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자식…… 천잰데? 맞는 말만 하잖아?
떨떠름해서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학사는 그 틈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무섭긴 했는지 거구의 뒤로 쏙 숨긴 하지만.
어휴 얄미워.
하지만 학사의 말이 옳다 한들, 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천년비의 몸이었다면 이쯤에서 포기하고 돌아갔을 거다.
돌아갔다가 몰래 숨어들어왔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경공 실력이 없잖아.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를 일각 가량.
서로 눈싸움만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다루 안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누군가 싶어 보니, 염소의 수염과 사슴의 눈을 가진 아저씨였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여기 직원들과 아는 사이인 모양인지, 학사와 거구는 사슴 눈 아저씨가 가까이 오자 바로 인사를 건넸다.
“잘 나오셨습니다, 총관님. 그렇지 않아도 여기 이 무식한데 살기 넘치는 낭자 때문에 아주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인사뿐만 아니라 고자질도 건네고.
그보다 저 아저씨가 여기 총관이구나. 이상한 기준으로 손님들을 쫓아내는 다루의 총관치고는 참 눈이 따스하시네.
“보았다.”
어쨌든 그 총관은 거구의 고자질을 들었는데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았다고.
어디서 본 거야? 설마 저 위층에서?
얼결에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난간에 팔을 걸치고 여기를 보고 있는 웬 수려한 미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복색이 후궁들 복장을 여러 개 합친 것보다 더 화려한 남자였다.
사자친왕과는 다른 의미로 화려한 사람. 사자친왕이 깃털파라면 저자는 보석파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난간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리면서 고개를 기웃하는데…… 왜 저렇게 날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천년비일 적, 누가 날 저렇게 바라보면 답은 하나였다.
날 노리는 정파 새끼. 혹은 사파인데도 현상금이 고픈 새끼들.
하지만 지금 내 몸에는 현상금 같은 거 안 걸려 있는데? 저렇게 볼 만한 사람이 있나?
의아해하고 있자니 총관이란 자가 갑자기 날 불렀다.
“거기 낭자.”
고개를 내리자, 눈이 따스한 총관이 차갑게 턱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와라. 루주님께서 시가 인상 깊었으니 특별히 통과시켜주라 하신다.”
* * *
학사는 뭐 씹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자기 자존심을 짓밟고 가는 것처럼.
하지만 여기 주인이 들어오라는데 자기가 뭐 어쩔 건가.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학사에게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소를 다시 잘 감추어두었다.
음.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나도 내 시가 적절하지 않았단 걸 아는걸.
아까 그 학사 놈처럼, 죽어도 인정 못 한다고 우기는 건 기분 나쁘지만.
어쨌든 여기 주인이 내 시에 감탄해서 만나자고 할 정도는 아니란 걸 분명히 안단 말이지.
그런데 여기 주인은 왜 날 만나자고 할까?
“여깁니다.”
의아해하는 사이. 총관이 5층 꼭대기 방 앞에 멈추어 서며 말했다.
“고맙네.”
나는 머릿속에 연신 떠올랐다 사라지는 온갖 가정을 뒤로하고서, 방문을 열었다.
일단 만나보면 알겠지. 진짜로 내 시에 탄복해서 만나자고 한 사람인지, 다른 속내가 있어서 날 만나자고 한 사람인지.
* * *
문이 열리자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아까 저 앞에서 보았던 남자.
화려한 차림을 하고서 난간에 기대어 날 내려다보던 보석파 남자였다.
저 사람이 여기 주인이구나. 여유롭게 구경하는 걸 보고 분명 백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 눈이 마주쳤어. 나는 남자를 살피던 걸 멈추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일단 도와줘서 고마우니까.
하지만 태안루주는 인사를 받는 대신 내게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한 채 자기 앞의 탁자를 가리켰다.
뭐야, 거기 앉으라고? 나 바쁜데?
그러나 거기 앉기 싫다는 의미로 내가 고개를 젓자, 태안루주는 자연스럽게 찻주전자를 들어 맞은편 잔에 따라주려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나를 ‘왜 안 앉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안 앉냐고?
“들어오게 해줘서 고맙다. 근데 지금 좀 바빠서.”
이 이유 때문에. 흑합 장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게다가 실제로 보니 그는 내 시에 탄복한 것 같지도 않았다. 즉, 다른 목적으로 날 부른 것 같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태안루주는 날 도와준 사람이기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제안했다.
“나중에 나도 그쪽을 한 번 도와주마.”
이 정도면 됐겠지? 도움 한 번 도움 한 번이면 피차일반이고.
그런데 나가려는 나를, 태안루주가 뒤에서 말을 걸며 한 번 더 붙잡았다.
“날 어디서 본 적이 없나?”
나가려다 말고 돌아보자, 그는 아까 내게 따라주려던 차를 자기 찬에 따르고 있었다.
졸졸졸 차 따르는 소리가 적막한 방에 울려왔다.
차 한 잔을 다 따른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다시 나를 보았다.
“없는데.”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고서 다시 나가려는데, 뭐야. 태안루주는 또 거듭 물었다.
“정말로 날 본 적이 없나?”
“없는데.”
왜 루주는 저렇게 과거사에 집착하는 거야?
아. 맞아. 난 천소여의 옛 지인들에 대해 모르잖아.
혹시 천소여가 저 남자와 아는 사이인가? 그래서 날 도와주고, 자기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나?
그렇다면 본 적 있다고 대답해야 하나? 그런데 난 기억 잃은 걸 딱히 감추고 있지도 않은걸.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 사방에 알리고 다니지도 않지만…….
어쨌든 떨떠름하게 있자니, 태안루주가 찻주전자를 달칵 앞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천년비란 사람. 그 사람은 혹시 본 적 있나?”
“!”
뭐야 이 인간. 내가 천년비라는 거, 혹시 알고서 묻는 거야?
갑자기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아무 관련이 없잖아? 내가 말실수를 했나? 아냐. 생각해보아도 그런 건 없다.
난 저자가 묻는 말에 최대한 단답으로 했다고.
머리를 팽팽 굴려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누군데?”
일단 시치미를 떼자.
“흠.”
그러나 태안루주는 찻잔 주둥이를 엄지로 문지르면서 웃었다. 과연 정말 모를까, 묻는 듯한 눈으로.
하지만 내가 아니라는데 자기가 뭘 어쩔 건가. 나는 덩달아 당당하게 쳐다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은 양 뒤로 휘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 태안루주가 코앞에 와 있었다. 손에는 검을 들고서.
심지어 그 검은 내 이마 바로 앞에 있어서, 간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하지만 놀라움보다 더 커다란 감정은 분노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다 보았으면서 막지 못하다니!
그러나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태안루주에게 혼란을 준 모양이다.
“아닌가…….”
내가 멍하니 있기만 하자, 그는 바로 내 코앞까지 들이밀었던 검을 내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젠장. 저 ‘아닌가…….’는 ‘천년비 같았는데 천년비가 아닌가.’를 줄여 말한 거겠지?
미치겠네. 저자는 갑자기 내 어딜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심장이 쫄깃해지다 못해 고동이 되겠다.
어쨌든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건조하게 상대를 쳐다만 보았다.
다행히 상대는 의심과 호기심이 같이 사라졌는지, 매몰차게 손을 저으며 추방령을 내렸다.
“모른다면 됐다. 나가봐라. 엉터리 시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란 걸 명심하고.”
* * *
태안루주……. 누군진 모르겠지만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어.
일단 오늘은 정보호를 보러 온 거니 그쪽을 탐문하지만, 다음에는 태안루주 쪽도 조사해 봐야겠다.
그가 나를 뜬금없이 천년비와 엮어서 생각한 것도 이상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천년비로서도 나는 그 자를 모른단 거다.
‘이건 조사해 볼 만한 일이야.’
어쨌든 지금은 정보호에 집중하자. 빨리 해결하고 흑합 장군과 약속한 장소로 가야 하니.
보자……. 무사히 다루 안에도 들어왔고. 이젠 정보호만 찾으면 되는데. 정보호는 어느 쪽에 있으려나?
‘저기 있네.’
다행히 고생고생하면서 안으로 들어온 보람이 있어서, 나는 정보호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했다.
사실 발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제일 넓고 값비싼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안심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정보호의 옆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서 주춤 멈추어 섰다.
‘사자친왕?’
정보호와 사자친왕이 마주 보고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뭘 계속 마셔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맞아. 사자친왕이 정보호와 식사할 거라던가, 그딴 말로 자랑을 해댔지. 여기 있을 만 하구나.
젠장. 하지만 이해가 가는 것과 별개로 속으로는 욕이 나온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사자친왕 앞에서 정보호를 만날 수는 없잖아.
‘어쩌지?’
* * *
천년비가 정보호를 발견했지만, 뜻밖의 방해물에 봉착해 고민하는 그 시각.
천 귀인의 측근 궁녀 두 사람 역시 뜻밖의 인물을 마주해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일찍 잠들었다고?”
황제 때문이었다. 황제가 직접 천 귀인의 처소로 오더니, 부실한 울타리 너머에서 그들의 소주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원웅과 부성은 서로를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원웅과 부성은 그들의 소주가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아예 궐 밖으로 나간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디에 간단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새벽 즈음 돌아올 거라 하였고.
-폐하께서 찾으시면 어쩌지요?
그 통보를 들은 원웅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천 귀인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요즘 폐하는 날 부르지도 않잖아. 싸운 후로 영 관심이 없어. 찾으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잠들었다고 해. 거짓말하기 영 그러면 외출한 후로 아직 안 들어왔다 하거나.
-만약 직접 오시면…….
-안 그래, 안 그래.
원웅은 울상을 지었다. 소주, 엄청 자신만만하게 확신하시더니 이게 뭐예요. 직접 찾아오셨잖아요.
하지만 원웅은 황제가 자기 얼굴은 가리고 다녀도, 남 얼굴 살피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란 걸 몰랐다.
황제는 원웅과 부성의 태도를 보고서 방 안에 사람이 없다는 걸 대번에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외출했나 보군. 아직 안 들어왔고.”
황제는 그냥 알아챈 바를 말했을 뿐이었으나, 원웅과 부성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감히 황제에게 거짓을 아뢰다니. 잘못하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됐다. 천 귀인이 시켰겠지.”
하지만 황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일어나라 손짓했다.
그러고는 원웅과 부성이 쭈뼛거리며 일어나자,
“안에서 기다리겠다. 날이 늦었으니 곧 오겠지.”
하고 태연히 말하면서 천 귀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말리지도 못하고서 원웅과 부성은 서로를 쳐다보며 발을 굴렀다.
“빨리 오셔야 할 텐데. 금방 오시겠지?”
“밤을 새우고 온단 말씀은 없으셨으니…….”
부성은 한숨을 내쉬고서 초조하게 입술을 제 손으로 꼬집었다.
“대체 어딜 가신 거야?”
* * *
어디나 마찬가지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좋은 기회는 꼭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그렇다. 정보호와 사자친왕을 주시하기를 3각 정도.
마침내 사자친왕이 술기운이 오른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루에서 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황당했지만, 이거야말로 사자친왕의 눈을 피해 정보호에게 접근할 기회였다.
때마침 점소이 하나도 그들이 새로 주문한 요리를 들고 지나가기에, 나는 그 점소이에게 얼른 돈을 건네고서 부탁했다.
“그 요리. 내가 저 객에게 전달해도 되겠나?”
점소이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다가, 내가 건넨 돈의 액수를 보고는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막상 돈을 챙기려다 말고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혹시 자객은 아니시지요?”
“이런 허술한 자객이 어딨어?”
“한데 왜……?”
“싫음 말아.”
대답 대신 돈을 도로 압수하려 하자, 점소이는 돈을 홱 낚아채 소맷자락에 넣으면서 웃었다.
“갔다 오시지요.”
아무래도 입구에서 학사와 덩치 두 명이 손님들을 한 차례 가려내다 보니, 일단 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아주 위험한 손님은 아닐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그러나 돈을 받고 요리 접시를 내게 건네다가, 점소이는 다시 행동을 멈추고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자객이 아니시지요?”
“아니라니까.”
“진짜지요?”
“그럼. 그냥 접시만 저기에 전달하고서 질문 하나만 할 거야.”
점소이는 그제야 요리 접시에서 손을 뗐다.
염려 마. 나는 점소이에게 안심하라고 방긋 웃고서 얼른 정보호 쪽으로 다가가 접시로 정보호의 머리를 내리쳤다.
“으악! 자객 아니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