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은혜 갚은 장군
“궐에서 도망치게 도와줘요.”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인가.
흑합 장군을 찾아가 부탁하자, 장군이 입을 연못가의 붕어처럼 쩍 벌렸다. 못 들을 걸 들은 얼굴이었다.
눈을 세 번 정도 깜빡인 후에는 그는 아예 자기 뇌를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천 귀인. 제가 뭘 잘못 들었습니다.”
“미안하다면 궐에서 도망치게 도와줘요.”
“…….”
흑합 장군은 입을 꾹 다물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전, 정보호를 만나야겠단 마음을 먹은 후.
나는 처음에는 떡돌이에게 이 부탁을 했다. 하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떡돌이는 내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지.
그다음 순서로 내가 떠올린 게 바로 흑합 장군이었다. 흑합 장군은 마음이 넓잖아. 내게 빚을 지기도 했고.
그래서 달려와 부탁한 건데. 어째 반응을 보니 이 사람도 좀……?
“싫은가요?”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라.”
흑합 장군은 한 손으로 자기 입가를 가리더니 난처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천 귀인께서는 황제 폐하와 정이 깊은 줄 알았습니다.”
“안 깊어요.”
“!”
“그리고 내가 궐 밖에 나갔다 오는데, 정이 무슨 상관이래요?”
“나갔다가…… 다시 오는 겁니까? 이쪽으로?”
떡돌이도 그러더니, 흑합 장군도 내가 아주 떠나겠단 뜻으로 오해한 건가? 뭐야.
이러니까 떡돌이 말처럼 내가 말을 똑 부러지게 못 하는 건가 싶잖아.
흑합 장군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더니, 굳이 우리 사이에 놓인 땅을 한 번 더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런 거군요.”
“그런 거예요. 도와줄 수 있어요?”
“하오나 신은-.”
“난 염 귀인 도와줬는데.”
“……제 시비들 사이에 섞여서 나갔다 오는 건 어떠십니까? 가능할까요?”
* * *
시비들 사이에 섞이긴 했는데. 나는 되게 자연스럽게 섞였는데. 시비들이 자연스럽지가 않네.
내가 황제의 후궁인 걸 알아서인가. 흑합의 시비들은 나와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내내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 사이에서 혼자 멀뚱멀뚱 걷다가 인적 드문 길거리에 왔을 즈음. 나는 결국 흑합 장군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여기서부턴 헤어지자고요. 그쪽 시비들 덕에 내가 너무 수상해 보이잖아.
하지만 흑합 장군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호위와 시비들에게 무언으로 눈짓했다.
그러고는 그들이 뒤로 물러나자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 나와 계실 건지요?”
“한 저녁 무렵?”
“해시면 충분하시겠습니까?”
모르겠다. 정보호를 바로 찾으면 충분하고. 아니면 안 충분하고. 그렇지만 무리해서 돌아다닐 필요는 없지.
오늘 못 찾으면 다음에 나와서 찾는 게 안전해.
“그럼요.”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흑합 장군은 제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묶은 끈을 풀었다.
검은 끈이네. 그런데 왜 저걸 담벼락 옆 나뭇가지에 묶고 있지?
“보이십니까? 해시에 이곳으로. 기억하실 수 있겠는지요?”
아하. 이 용도구나. 흑합 장군 머리 좋네! 하긴. 돌아가려면 다시 흑합 장군과 만나야 하지. 하지만…….
“아는 집 나무예요?”
“…….”
“기억은 했는데. 혹시 이 집 주인이 끈만 가져갈까 봐요.”
그러면 기억해 둬도 나중에 헷갈릴 거 아냐.
손가락으로 담장 너머를 가리키자, 흑합 장군은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 집입니다.”
아. 그러면 안심이고.
“알았어요. 해시. 여기로. 고마워요.”
* * *
흑합 장군과 헤어진 뒤, 나는 간만에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는 여전했다. 한쪽에선 곡예사가 입에서 불을 뿜고, 한쪽에선 과일을 팔고 있고, 어린아이들이 서넛씩 뭉쳐서 뛰어다니고.
늘 시끌벅적하구나.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이랑 똑같아. 좋네.
어딘가에 숨어서 날 노리는 정파 놈들이 없으니 그것도 좋다.
여유롭게 좀 놀다 가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정보호부터 찾자.
“실례하겠소.”
나는 편안하게 걸어 다니다가, 지나다니는 사람 중 일부러 무림인 복식인 여인을 불렀다.
정보호는 무림인 사이에서 유명하니까.
“무슨 일이지요?”
“수도에 정보호란 자가 왔다 들었는데.”
“정보호.”
예상대로 여인은 정보호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어째서인지 쉬이 대답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녀는 내 행색을 아래위로 살폈다.
내가 무림인 같지 않으니 ‘왜 정보호를 찾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단순히 복장의 문제가 아니라, 내 몸에선 무술을 익힌 느낌이 없으니까.
“심부름이오.”
“심부름꾼의 말투가 이럴 정도면, 어디 궐에서라도 오셨나.”
“!”
뭐야. 그냥 지나가는 무림인 하나 붙잡은 건데,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내가 찔끔해 쳐다보자, 여인은 빙그레 웃더니 손가락으로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 확인해 본 건 아니고. 얼핏 듣기로.”
“저 건물은 어디오?”
“태안루.”
여인은 그리 말하고서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런데 어째서지? 돌아설 때 묘하게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데.
‘태안루가 어디기에 저래?’
* * *
‘아. 저래서 장난치듯 말했구나.'
태안루에 와서 보니 아까 그 무림인이 묘한 말투로 위치를 알려준 이유를 알겠네.
태안루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합! 돌아가시오!”
문 앞에, 덩치도 키도 일반 사내의 두 배는 돼 보이는 거구와 호리호리한 체구의 학사가 나란히 서서,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제멋대로 합과 불합을 매기고 있었다.
“아니, 니들이 뭔데 멋대로 불합을 외쳐?”
때마침 그들에게 불합 평가를 받은 이가 화가 나서 따지고 있었고.
나는 바로 문으로 가는 대신, 태안루로 들어가는 다리 난간에 앉은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행색이 추레하고, 눈빛이 탁하고, 기골이 약하며 부귀하지 않아 보이니 불합!”
오 저게 기준인가.
“누, 누가 추레하고 탁하고 약하다고?”
“빈궁해 보이는 건 왜 빼지?”
“이, 이 미친놈들이!”
불합 받은 이는 화가 나서 삿대질을 했으나, 거구 쪽이 그 손가락을 꼭 쥐고서 가만히 바라보자 독기가 순식간에 쭉 빠져서는 슬그머니 제 손을 거구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그러고는 얌전하게 돌아섰다.
그 모든 광경을, 합격을 받아 손님이 된 이들이 안쪽에서 낄낄거리면서 놀려대고.
……뭔진 모르겠지만 입구에서부터 되게 기분 나쁜 자들이네.
정보호는 왜 하필 저런 데 들어가 있는 거야? 나도 저기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정보호가 나오길 기다릴까? 어차피 정보호 얼굴은 아는데.
그런데 들어갈지 말지 결정을 아직 못한 그때.
“거기 낭자.”
거구와 학사 중 학사 쪽이 날 부르며 씩 웃었다.
“여기 들어가려던 거 아니신가?“
입구에서부터 사람을 급 나눠서 골라내는 놈들이라 그런가.
나 말고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한가득한데. 어떻게 내가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중이란 걸 알았지?
당황스럽다. 학사의 말이 사실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난 저 안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의복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엄청 깐깐하게 판단하는 모양이던데.
앞에 악평을 받은 사내도 저자들은 ‘추레한 행색’이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무난한 정도였는걸.
“들어갈 거야 말 거야?”
내가 당황해 있는 사이, 학자가 아까보다 한결 오만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눈치 빠른 새끼. 내가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만만해진 모양이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 나는 턱을 치켜들고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들어갈 거다.”
저렇게 무시하는 놈 앞에선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아니면 더 무시하거든.
저런 놈들 사상이야 어차피 비슷해서 이쪽이 거만하게 굴면 알아서 합격을-.
“불합. 가시오, 낭자.”
……아닐 수도 있고. 아니, 내가 뭐 했다고 벌써 꺼지래?
“내가 왜 불합이란 거냐?”
수긍할 수 없어서 따지자, 학사는 아까 불합 받은 사람에게 하듯 빙그레 웃으면서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행색이 추레하고, 눈빛이 좋지 않고, 기골이 약하며 부귀하지 않아 보이니 불합.”
이 새끼. 아까랑 거의 똑같이 말하잖아?
“여긴 차를 파는 곳 아닌가. 차를 마실 돈이 있으면 됐지, 내가 여기 직원들 눈요기까지 시켜주어야 하나?”
저 말이 진짜인지 아닌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발끈해서 따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꼭 안 들어가도 되긴 했다. 여기에서 정보호가 나오길 기다릴 수도 있지. 언제 나올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오기가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겠다는 오기가.
“다들 그렇게 욕하며 떠나가지.”
그러나 학사는 웃으면서 내 말을 술술 넘겨버렸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단 듯이.
나는 더욱 어깨를 펴고 따졌다.
“내가 누군 줄 알고 행색만으로 판단하지? 이렇게 나왔다가 후회할 거란 생각은 안 드냐?”
“호. 알고 보면 대단한 신분이기라도 하단 건가?”
“알고 보면 대단히 무서운 사람일 수 있단 거지.”
거구와 학자가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 비웃었다. 짜증나는 건, 구경하는 사람들 역시도 같이 비웃는단 거였다.
이 자식들아, 니들도 못 들어가서 여기 구경하고 선 거 아냐? 공감은 못 해줄망정 왜 비웃고 있어?
나는 화가 나서 주먹을 쥐고 씩씩거렸다.
“난 저 안에 꼭 들어가야 한다. 꼭 들어가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어!”
그런 내 모습에 뭐 감흥이라도 왔나? 학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돌연 이렇게 제안했다.
“좋아. 그럼 내기를 하지.”
“내기?”
“이 친구와 힘겨루기를 해서 이기거나. 시를 읊어 내가 인정하게 만들거나. 그러면 들여보내 주지. 어떻소, 낭자?”
“…….”
“자신 없으면 가도 좋고.”
학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도발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자신 있어. 그쪽과 붙지.”
절대로 도발에 넘어간 게 아니다. 진짜로 자신이 있어서 이래!
* * *
“이게 무슨 소란이냐.”
보통은 ‘태안루주’라고 불리는 이 다루의 주인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고서 난간으로 나왔다.
그러자 난간을 꼭 잡고서 아래를 구경 중이던 총관이 얼른 손을 내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밖에서 한 손님이 안으로 들어오겠다 떼를 쓰다 내기를 하게 된 모양입니다.”
태안루주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기를? 어느 미친 자가? 여기 소문도 모른다더냐?”
“물정에 어두워 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총관의 설명에 태안루주는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럼 적당히 돌려보내면 될 것을.”
문턱을 높이고 거만하게 굴수록 오만한 손님은 덩달아 열광한다. 이게 태안루주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다루 자체가 돈 벌자고 만든 가게도 아니었고, 태안루주는 돈을 벌기보다 명성을 얻기를 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 명성을.
이런 안이한 마음가짐으로 태안루주는 실험적으로 다루를 운영했다.
손님을 받을 때도 깐깐하게 가려서 받았고, 입구 밖에선 누구보다 냉랭하게, 가게 안에선 누구보다 따뜻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가게에 들어올 수 없단 평가를 내린 손님 중 억지로라도 들어오겠다 우기는 이가 있다면, 문지기들의 안목이 틀렸다는 걸 내기를 통해 증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입구에서 불합을 받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손님들이라 해도 대부분은 항의만 할 뿐 내기는 하려 하지 않았다.
내기에서 지면 문지기들이 속곳만 남기고 죄다 벗겨 쫓아내 버리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웬 여인이 그 내기를 하려 한단다.
“어찌할까요? 지금이라도 그만하게 둘까요?”
총관이 태안루주에게 질문하는 사이. 평범한 복색을 한 여인은 이미 손가락으로 학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자와 시 내기를 하겠다!”
태안루주는 바로 전 안타깝다는 듯 말했으면서도 무심하게 대꾸했다.
“두어라. 요즘은 내기하겠다 나서는 손님이 아예 없었으니. 이 일이 우리 다루의 악명을 높여 주겠지.”
“예.”
“술이나 한잔 가져오고.”
“술이요?”
“저렇게 당당하게 시로 내기를 하자 제안할 정도면, 한 수 자신감은 있지 않겠나. 시에는 술이지.”
태안루주가 어느새 구경꾼처럼 난간에 걸터앉자, 총관은 얼른 밖으로 나가 심부름꾼에게 술을 가져오게 시켰다.
내기를 건 여인이 시를 읊기도 전에 술과 안주가 차려지자, 태안루주는 작은 잔에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여인을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총관도 다시 옆에 자리를 잡고는 히죽이며 물었다.
“저 여인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설마.”
“그런데 술까지 가져오라 하셨습니까?”
“웬만한 시로는 절대로 문지기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 하지만 도전하다 쫓겨가는 모습만으로도 즐거운 놀잇감은 되지 않을까.”
빙그레 웃은 태안루주는 먼저 술을 한 잔 마셨다.
술의 씁쓰름한 끝 맛이 사라지기 전, 딱 맞게도 겁 없이 내기를 건 여인이 시를 읊기 시작했다.
“즐거운 기분으로 문을 나와 그리운 이를 보러 왔는데. 님도 아닌 이가 들여보내지 않고 있으니, 지금 내 기분은 어떠한가.”
투박하지만 흐름은 괜찮군, 생각하면서 태안루주는 다시 눈을 감고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가엾은 미래를 모르고 발버둥 치는 생명이라. 참으로 가련하고 운치 있지 아니한가.
“개 같구나.”
“!”
하지만 그 운치는 한 문장이 보태지는 순간 와그작 일그러졌다.
태안루주는 술을 마시다가 ‘풉!’ 총관을 향해 뱉고 말았다.
총관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상사에게 따지지는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옷을 닦았다.
“방금 그게 시였느냐?”
태안루주는 황당해 중얼거리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생각인지,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학사도 입술을 깨물고 묻고 있었다.
“그런 수준으로 여길 통과하려고 온 거요?”
반면,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오히려 낄낄거리면서 더욱 즐거워했다.
“그냥 욕한 거네.”
“어우 속 시원하다.”
“그래, 입구에서 잘리면 기분 더럽지.”
태안루주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리고서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이따위 시로는-.”
학사가 ‘절대 인정 못 한다’고 외치기 전.
시를 읊은 여인이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멱살을 쥐고서 서늘하게 물은 것이다.
“이젠 내가 내기를 내지. 내 시를 인정해라. 인정하면 살 것이되,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여인이 엄지로 학사의 목을 좌에서 우로 스윽 긋는 순간. 태안루주는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렸다.
‘저 동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