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8화 (38/283)

##  38화. 피하려면 더 붙잡는

어느 날, 친구가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묻는다. 이런 경우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일번. 나 좋아해?

이번. 왜?

삼번. 미쳤어?

평소처럼 청적에서 만난 떡돌이 이야기다.

이전에는 얌전히 떡을 꺼내 줄 녀석이, 오늘은 뭘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런 질문을 꺼낸 거다.

내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자, 떡돌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천 귀인? 괜찮아?”

괜찮냐고? 아니! 엄청나게 놀랐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해? 미쳤어? 나 좋아하니?”

전혀 괜찮지 않기에 나는 딱 잘라서 우수수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사랑보다 우정이 더 대단하단 걸 알아차렸고, 떡돌이와는 우정만 나누기로 맹세까지 한 터였다.

떡돌이 본인에게도 나의 이러한 결심을 잘 전했지. 그런데 인제 와서 뭐? 입을 맞추어봐도 되냐고?

그러나 내 질문에 떡돌이는 자기가 더 떨떠름해 하는 눈치였다.

“난 네가 이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무어라?

“왜 그런 오해를 해?”

“그야 네가…… 내게 그런 약을 주었으니.”

“그런 약? 정력제? 내가 주둥이 맞추자고 정력제 줬겠어?”

황당해서 되묻자, 떡돌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잠시 고개를 기웃하다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래!”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타박했다.

“그리고 내가 분명 말했잖아. 우린 우정만 할 거라고.”

하지만 떡돌이는 자기가 오해를 했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태연히 웃으며 넘어갈 뿐.

“우정도 나누고 입도 나눌 수도 있는 거지, 뭘.”

“안 그래. 내 상식에선 안 그래. 황궁에선 다 그래?”

“글쎄.”

떡돌이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

입 맞추는 우정이 무슨 우정이냐고, 인공호흡 빼곤 인정 못 한다고 따지려다가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가 궁궐에 대해 뭘 안다고. 궁궐 일에 빠삭한 내관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게다가 궁궐은 후궁부터가 하나둘이 아니잖아. 거기서부터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걸.

* *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정도 나누고 입술도 나누자는 떡돌이의 제안은 이후 곧장 잊어버렸다.

일부러 잊으려고 잊은 게 아니라, 다른 일로 바빠서.

염 귀인은 수사청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혐의를 벗은 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도 사건 관련자로서 진술을 하기 위해 이래저래 불려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 탓이었다.

하긴. 내가 바빠 봐야, 이 일로는 염 귀인 쪽이 더 바쁘긴 하겠지만.

어쨌든 오며 가며 염 귀인을 만날 일이 많아진 터라, 나는 이참에 그녀에게 내내 벼르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염 귀인을 위해 기몽 장군에게 서신을 쓴 건, 흑합 장군이 부탁해서 그런 거예요.”

“흑합 장군이…….”

그런데 염 귀인은 정말로 아예 짐작을 못 했나봐.

내가 이야기를 해주자마자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데, 그 표정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괜찮은가?’

난 그냥 긴장 없이 그냥 툭 전해준 건데. 저렇게 반응하니 괜히 신경 쓰이네.

내가 눈에 띄게 눈치를 살피자, 염 귀인은 그제야 손을 저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러면서 힘없이 웃는데. 그 미소는 어쩐지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염 귀인은 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배반당한 게 아니라니 좋네요.”

아아. 실제로 안도하는 거구나. 하지만-.

“배반당한 거라니요?”

“흑합 장군이 날 배신했다 생각했거든요. 그건 아니라니 다행이라고요.”

사연이 가득해 보이는데. 염 귀인은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너무 사적인 일 같아서 더 묻진 않았다.

하지만 ‘배반당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면서 웃는 모습에, 어쩐지 개원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묵직해진다.

개원이도 날 배반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건 오해일 수가 없으니.

“?”

그런데 힘없이 막 돌아서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염 귀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던 걸 멈추고, 나는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았다.

시선의 주인은 기몽이었다. 그가 근처 건물 난간 뒤쪽에 뒷짐을 지고 서서 날 보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빤히 쳐다보다가 걸린 건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로.

‘참 대단하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나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쟤랑은 엮이지 말자. 사냥개 같아.

* * *

먼 거리에서도 상대를 강렬하게 잡아두는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존재감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건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었다.

기몽 장군은 천 귀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기몽 장군은 어떤 사람들이 이런 느낌을 주는지 잘 알았다.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남들의 시선을 붙잡는 분위기를 풍긴다.

딱 저렇게.

그래서 기몽 장군은 더욱 이상하게 여겨졌다.

뭘까. 저 여자는 대체 뭘 감추고 있기에, 저렇게 혼자 어두운 구덩이처럼 호기심을 자극할까.

적당히 부유하고 적당히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고생 없이 탄탄한 대로만 밟아온 사람일 텐데?

그때.

“장군님.”

부관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기몽 장군은 아쉽지만 천 귀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관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장군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천년비’란 이름에 관해 조사하였습니다.”

기몽 장군은 자신이 부관에게 했던 명령을 떠올렸다.

염 귀인이 ‘천년비진쾌도래’라는 종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 묻자 천 귀인이 쓰러진 사건.

미신이라면 미신일지도 모르나,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천년비’란 이름에 관해 조사를 지시한 지 며칠. 그 결과가 벌써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 누구지?”

“고관대작의 자제나 본인 중 그 이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전체에 그 이름을 가진 이는 총 225명이옵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수많은 백성 중 225명만이 ‘천년비’ 이름을 사용한다면, 사실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몽은 하나하나 조사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225명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예.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안은 따로 보고서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고관대작이 없다지만 설마 다 고만고만하게 살진 않을 거고. 개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누구였지?”

“무림 악적 천년비입니다.”

* * *

“원웅. 궁궐 담을 몰래 넘어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돼? 큰 벌을 받아?”

내 질문이 적절하지 못했나? 월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원웅이 새 옷을 꺼내오다 말고 우뚝 멈춰서더니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월담이요?”

저 황망한 표정이라니. 생각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나?

“소주, 월담하시려구요?”

원웅은 당황해서 내게 캐물었다.

“월담은 무슨. 내가 무슨 수로.”

원웅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하기에 나는 농담인 척 하하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월담할 수 있으면 하고 싶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되찾자마자 가장 먼저 월담부터 할 거다. 그렇지만 이걸 굳이 원웅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한데 그런 무서운 얘길 왜 물으세요? 어휴, 듣기만 해도 곤란해져요.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듣는 것만으로 곤란할 정도야? 들키면 어찌 되는데?”

“모르긴 몰라도 큰일 나지 않을까요?”

“몰라?”

모르면서 그렇게 무서워한 거야?

“월담하다 걸린 후궁이 없거든요.”

“그럼 의외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요.”

원웅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몰라도 짐작 가는 게 있잖아요. 이게 그런 일이에요. 분명 수상하다고 이상한 누명까지 써서 아주 큰 벌을 받을걸요?”

그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다시 한번 철저하게 확인했다.

“소주. 월담하려고 꺼낸 말 아니시죠? 정말로?”

“그럼!”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서 건성으로 책 한 장을 넘겼다.

하지만 속으로는 ‘젠장!’ 하고 외쳤다. 젠장 젠장 젠장! 어쩌지?

* * *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무림에서 가장 아는 게 많다는 정보호. 그자가 수도에 왔단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보통 정보 하면 개방과 하오문, 정보호 이렇게 셋을 꼽는데, 개방과 하오문은 집단인 반면 정보호는 개인이었다.

정보호는 개인의 몸으로 그 대단한 개방과 하오문 사이에 이름을 끼워 넣은 괴짜 무림인이었다.

‘내 위치도 그 새끼가 많이 흘리고 다녔지…….’

어쨌든 그 밉지만 유명한 정보호가 수도에 왔다는 소식은, 어제 청적에 놀러 갔다가 떡돌이 대신 만난 사자친왕에게 들었다.

무림에 관심이 많은 사자친왕은, 정보호를 초대해서 온갖 이야기를 들을 거라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었지.

덕택에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해주었고, 그 바람에 나도 얼결에 같이 바람이 들어버렸다.

정보호 그자라면, 사하비단과 사하비단에 들어갔다는 ‘가짜 천년비’ 이야기도 알지 않을까? 하고.

‘젠장. 나도 그자를 만나보고 싶어!’

하지만 지금 내 실력으로 월담은 무리였다. 황궁 월담은 그냥 담만 넘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담벼락 주위를 포진하고 있는 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나가야 하고, 들키지 않고 돌아와야 하니까 뛰어난 경공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들지.

“어쩐다.”

떡돌이한테 물어볼까? 걔는 내관이니까, 개구멍이라던가 그런 데 빠삭할 것 같긴 한데…….

* * *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떡돌이에게 남몰래 궐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에 관해 물었다.

“궐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하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떡돌이는 내가 부탁이 있다고 하자 무엇이든 말하라 하더니.

궐 밖에 나가고 싶은데 방도가 없다고 묻자, 차갑게 되물었다.

“왜? 황제가 이중적인 사람이라서, 아예 떠나고 싶어?”

“그거 알아?”

“뭘.”

“떡돌이 넌, 가끔 폐하한테 너무 이입해.”

“!”

“정신 차려, 자식아.”

너는 내시라고. 황제가 아니야. 왜 네가 그렇게 차갑게 되물어?

무릎을 찰싹찰싹 두드리고서 현실을 일깨워주자, 떡돌이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고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밖에는 왜? 후궁이 싫어? 귀인 자리가 너무 낮나?”

“아니. 그냥 밖에 잠시 나가고 싶단 건데.”

“떠나고 싶단 게 아니라?”

“응.”

떡돌이는 내 말에 헛기침하더니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그리 말하지. 말을 왜 그렇게 헷갈리게 해? 똑 부러지게 말해야지.”

“이 이상 어찌 똑 부러지게 말하란 거래?”

“한데 밖에는 왜?”

떡돌이는 괜히 자기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더니 나를 곁눈질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의아해서 덩달아 같이 쳐다보자, 떡돌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시장이라거나. 그런 데 가보고 싶어 그래? 같이 갈까?”

“같이?”

“밖에서 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닌가? 나도 나가기 힘든 몸이지만, 네가 같이 가자 하면 시간을 좀 내어 줄 수도 있고.”

“아닌데.”

“아니야?”

“응.”

“그럼 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

내 말에 떡돌이는 옷고름에서 손을 떼더니 허리를 세우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누구? 네 가문 사람? 아니면 옛 친구?”

“친구는 아니고.”

“그럼?”

남자……라고 말하면 수상하겠지? 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있어, 그런 사람.”

떡돌이는 그 대답이 더 수상쩍게 여겨지는 모양이지만. 표정 좀 봐. 눈이 얼마나 가늘어지는 거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화제인지라, 나는 결국 머뭇거리다가 거짓말했다.

“여자야.”

“남자로군.”

소용없었지만.

“아닌데? 진짜 여자야.”

“여자라면 굳이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겠지.”

나는 딱 잡아뗐지만, 떡돌이는 이럴 때만 예리해졌다. 그는 팔짱을 끼더니 바위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난 능력이 없어서 궐 밖에 나가는 걸 못 돕겠는데.”

“아까는 같이 나가자며?”

말이 왜 그새 바뀌어?

“내가?”

“네가.”

“잘못 들었겠지.”

* * *

떡돌이에게 개구멍 위치라도 들을 생각이었는데.

그걸 실패한 후, 나는 내 비밀 수련 장소로 가서 눈앞에 떡돌이가 서 있다 생각하고 열심히 발차기를 했다.

에이, 치사해라! 거시기 떼면서 대인배의 풍모도 같이 떼어 버렸나?

분명 개구멍 위치를 아는 것 같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간다니까 일부러 안 가르쳐 주는 거야.

틀림없다. 그러니 처음에는 같이 나가자고 신나서 말했다가 뒤늦게 말을 바꿨지.

하지만 아무리 씩씩대도 떡돌이는 이미 지나간 마차였다. 날 도울 리가 없었다.

이제 와 거짓말로 같이 나가자 한들 거짓말이란 걸 분명 알 테니.

떡돌이 이놈. 내가 우정으로만 남자 했는데도 아직 날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질투하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궐 밖으로 나가는 건데…….

‘아! 그러면 되겠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