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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7화 (37/283)

##  37화. 선물의 의도가 궁금하도다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로 여러 학문이나 서적에 대한 담론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황제가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우정보다 사랑이 더 좋단 증좌를 찾아내라.”

뜬금없는 명령에 신하들이 웅성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딴 증좌가 어디 있다고 저런 명령을 내리시나?

우정을 그리는 시는 많고 사랑을 찬양한 시도 많으나, 두 개를 비교한 시는 적었다.

설령 있다 한들 그건 증좌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우정이 사랑보다 좋다 확신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걸로.”

뭐란 말인가 저 까다로운 조건은? 신하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웅성거리자, 사태를 아는 오 공공이 황제를 슬쩍 곁눈질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기 어두우나, 오 공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 다부지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는 걸.

오 공공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 귀인은 왜 갑자기 폐하께 우정이 최고란 말을 해서…….

물론 천 귀인에겐 ‘떡돌’은 친구이니,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터이지만.

그때. 용기 있는 대신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어찌 그런 명을 내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면사에 가려진 황제의 표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은 용감하게 나선 이를 걱정스레 보았다.

혹시 저 질문이 폐하의 심기를 노하게 하는 건 아닐까, 염려하면서.

그걸 보며 진실을 아는 오 공공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번에도 혼자만 알았다. 황제가 지금 대답하지 않는 건 그냥 할 말이 궁해서란 걸.

잠시 후.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열렸다.

“다 쓰임이 있다.”

* * *

“쓸모없어 보이는데.”

굳이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서 내 의견을 들려주자, 염 귀인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쓸모없어 보인다고요?”

“네.”

상황은 이렇다.

이 각 전. 염 귀인이 날 찾아왔다.

또. 귀찮지만 가라고 떠밀 수도 없는지라, 나는 마지못해 염 귀인을 방 안에 맞이했다.

가만히 마주 앉아서 얼굴만 보면 심심하니, 부성에게는 차를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웬걸. 부성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일까지 같이 가져왔다.

차와 과일이 차려졌으니, 일단 다 먹어야지. 남기면 아까우니까. 그

래서 이걸 먹다 보니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음식을 다 먹었을 때. 나는 이제야 염 귀인을 돌려보낼 좋은 구실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염 귀인은 나가지 않았다. 대신…….

“이것까지 주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말을 꺼내더니, 내 처소에 올 때부터 들고 있던 연한 녹색 보따리를 턱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염 귀인이 이걸 가지고 왔을 때부터 내내 신경이 쓰인 상태였지. 팔 힘을 기르려고 들고 다닐 리는 없으니 분명 내게 줄 선물이다, 싶어서.

하지만 나는 표정 관리를 하고서 모른 척 물었다.

“그게 뭔가요?”

“선물이요.”

이 부분에서는 솔직히 표정 관리가 좀 어려웠다. 난 선물을 좋아해서…….

어쩔 수 없다. 받아본 적이 많이 없는걸.

게다가 내가 받아본 선물 종류만 해도 그렇다. 보통은 숨어 있던 자객이 검을 휘두르면서 이렇게 외치지.

“받아랏, 이게 내 선물이다!”

그러면 난 그 자객을 없앤 다음, 검과 돈, 기타 여러 가지 도구들을 알뜰살뜰하게 챙긴다.

이게 내가 받은 선물의 4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4할은 음식 안에 숨겨진 독이라거나 방석 안에 숨겨진 검. 뭐 이런 종류.

그 외 2할은 개원…… 개새끼. 개원이 생각은 하지 말자.

어쨌든 그런고로 나는 선물, 정상적인 선물을 좋아한다.

“흠흠. 어떤 선물인데요?”

“기대해도 좋아요. 아주 좋은 선물이니까.”

근데 이미 충분히 기대한 얼굴이네요, 얄밉게 덧붙이면서도 염 귀인은 순순히 보따리를 끌렀다.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자체는 이뻤다.

안에 풀뿌리 같은 게 든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독?”

이번에도 내 선물은 독인 거야? 궁궐까지 들어왔는데 또? 내가 떨떠름해서 묻자 염 귀인은 딱 잘라 부정했다.

“아니에요. 몸에 좋은 거예요.”

“보약?”

“비슷하죠. 아니, 보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염 귀인은 그리 말하고는 독약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직접 뚜껑을 열고서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자. 독약 아닌 거 확인.”

그걸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에! 천년비가 보약도 선물 받다니! 그것도 궁중 사람한테!

히죽 웃으면서 나는 얼른 병을 끌어다 챙겼다.

“고마워요, 염 귀인. 가끔은 착하네요.”

“가끔…….”

염 귀인은 인상을 찡그렸으나, 자기도 그간의 행적이 걸리는지 반박하는 대신 턱을 치켜올렸다.

“폐하께 드리면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염 귀인의 말을 듣자 나는 그녀의 턱을 도로 내려주고 싶어졌다.

“폐하? 폐하께 드리라니요?”

“정력에 좋은 음식이거든요. 아니, 약이죠. 절세단이라고. 들어 봤어요? 알음알음하게 유명한데.”

“정력?”

“그거, 천신괴의가 만든 거예요. 사실 정력에 좋다고는 하지만, 그 부분을 빼고 보아도 아주 좋은 보약은 맞고요.”

천신괴의. 안다. 유명한 무림인이자 의원이지. 의술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데 사람을 치료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의원.

주로 하는 일은 위험한 험지를 돌아다니며 재료를 캐다가 별 희한한 약 종류를 만들어 파는 것.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정력에 좋은 음식을 왜 나한테 줘?

“폐하한테 직접 드려요. 이걸 왜 나한테 줘요?”

폐하한테 줘야 하는 거면 내 선물이 아니잖아!

내가 놀림당한 기분에 씩씩거리면서 유리병을 염 귀인 쪽으로 도로 밀어내자, 염 귀인은 되레 자기가 더 짜증 내며 되물었다.

“장난해요? 님을 봐야 뽕을 따지, 폐하를 못 뵈는데 정력에 좋은 약을 언제 먹이래? 요즘 폐하께선 천 귀인만 보잖아요.”

“난 내 입에 들어가는 거 아니면 내 선물로 안 쳐요.”

“그럼 이걸 폐하한테 드리고서 점수라도 따요.”

내가 싫다는 데도 염 귀인은 굳이 절세단을 내게 넘기고서 가버렸다.

“와! 염 귀인께선 참으로 세심하고 배려 깊으시네요!”

부성은 방 안에 들어왔다가 설명을 듣고는 사람 속도 모르고 염장을 질렀고.

부성까지 나가고 방 안에 홀로 남은 뒤. 나는 쓸데없이 가지게 된 절세단을 노려보았다.

젠장. 저걸 어쩌지? 황제에겐 주기 싫은데. 주면 오해할 거 아니야.

“…….”

아. 떡돌이? 떡돌이에게 줄까? 그래, 좋은 생각이다.

걔는 내시니까 정력에 좋은 약도 그냥 보약처럼 먹지 않을까? 이거 몸에 좋은 약은 맞다면서?

* * *

약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이틀 후. 나는 청적에 약을 가져가서, 떡돌이를 만났을 때 등 뒤에 절세단을 감추고 물었다.

“떡돌아. 보약 줄까?”

떡돌이는 종이로 총총 감아온 떡 포장을 끄르다가 영문 모를 얼굴로 날 보며 되물었다.

“보약? 갑자기?”

“응. 줄까?”

떡돌이도 선물이 좋은가보다.

그는 보약 이야기에 안색이 환해지더니, 떡 포장 끄르던 걸 멈추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오.”

나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유리병을 내밀었다.

“짠.”

떡돌이는 유리병을 받아 들고는 안에 든 풀뿌리를 살피며 물었다.

“이 안에 든 게 약초인가? 어디에 좋은 거지?”

“여러모로 몸에 좋대. 가장 좋은 부위는 따로 있지만, 그거 빼고도 대체적으로 다 좋대.”

“가장 좋은 부위?”

“응. 그게 어디냐면-.”

그런데 내가 설명을 해주려는 찰나. 떡돌이가 씩 웃더니 한 손을 들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쳐다보자 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먹어보고 알려줄게. 어디에 가장 좋았나.”

무어라? 나는 떨떠름해서 그의 턱을 도로 내려주었다.

“안 될걸. 먹어봐도 넌 모를 텐데?”

넌 내시니까. 그건 내시한텐 소용없는 거고.

그렇지만 내가 떡돌이 정체를 안단 건 비밀이잖아. 아, 어쩌지?

내가 우물거리자 떡돌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그리고서 주저하다가 일단 약의 성능을 말하려는 찰나. 떡돌이는 손을 들더니, 아예 내 입을 막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내가 먹어보고 알려주겠다.”

“아 뭐…… 그래. 그러면.”

그렇게까지 거부하니 못 알려주겠네. 하긴. 위험한 게 아니면 그걸로 된 거지.

쟤는 어차피 먹어도 몸이 건강해졌단 외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뭐.

* * *

“잠이 오지 않으니 노래 좀 불러주겠느냐.”

난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꺼리더니. 흑합 장군과 어울리자 다가와 질투하고.

이번에는 밤중에 불러서 노래를 부르래.

솔직히 좀 고깝다. 이 황제, 진짜 제멋대로잖아?

“왜 노래를 제게 불러 달라 하십니까? 노래 잘하는 가인들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요.”

“네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책임이요?”

“……그런 게 있으니, 노래나 불러 보거라.”

노래를 부르게 할 거면 날 돌돌 싸매고 있는 이 이불 계란말이부터 풀어주던가.

차라리 이전처럼 정원에 불러서 노래를 시키던가.

시침을 들라며 계란말이 상태로 불러놓고서 노래를 부르라니, 아주 짜증이 난다.

난 오늘 밤 떡돌이가 그 절세단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궁금해하며 보내야 하는데!

어쨌든 시키니 해야지. 저 사람은 황제고 나는 황제가 아니니까.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십니까?”

“천년의 흥분도 가라앉는 노래. 건전하고 담백하고 무정한 노래로.”

“취향 한 번 독특하십니다. 그런 노래가 어디 있습니까?”

“너라면 가능하다. 너라면.”

무슨 뜻이야 이 황제? 저거 욕 아냐?

떨떠름하지만, 어쨌든 저잣거리에서 축제 날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부르는 노래를 마지못해 불러주었다.

“개굴개굴 개구리가 너굴너굴 너구리랑 뽀글뽀글 머리를 말면, 지나가던 양이 야앙야앙 울면서 비웃고 간다……”

자, 내 노래 실력이 형편없는 걸 알았다면 이 상태로 노래시키진 마.

그러나 웬걸?

“노래가 야하구나. 좀 더 담백하게.”

황제가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더니 희한한 소리를 했다.

“이게 야해요?”

내가 황당해서 묻자, 황제는 더욱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래. 양을 빼거라. 야하냐는 질문도 빼고.”

뭐지 이 남자.

“뭐 이상한 약 드셨습니까?”

‘야앙 야앙’ 소리 듣고서 야하다 할 정도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수준 아닌가?

그런 사람은 아닌 듯했는데. 뭐 저녁 식사 후에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나?

“이게 누구 때문……!”

“누구 때문인데요?”

황제는 헛기침을 하더니 단호하게 다시 요구했다.

“노래하라. 계속하라. 양 빼고.”

* * *

“좋은 아침.”

처소로 돌아온 내가 평소보다 쉰 목소리로 인사하자, 측근 궁녀 둘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자기들끼리 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귀자는 큼큼 헛기침하면서 시선을 피하고.

그러다가 원웅이 히히 웃으면서 물었다.

“소주, 꿀물을 타 드릴까요?”

“응. 밤새 노래를 불렀더니 좀 힘드네.”

원웅은 ‘노래는 무슨’ 하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는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내 쉰 목소리가 궁녀들에게 오해를 일으켰단 걸 깨달았다.

진짜로 밤새 노래를 부른 건데. 궁녀들은 다른 걸 상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굳이 아니라 할 필요도 없어서, 나는 오해를 방치한 채 원웅이 타다 준 꿀물을 마셨다.

그러고서 한숨 자자, 그제야 피로가 가셔서 청적으로 갈 만한 힘이 났다.

사실은 청적도 안 가고 쉬고 싶지만, 그래도 떡돌이에게 무슨 약인지 알겠냐고 묻고 싶어서.

진짜 먹었는지도 궁금하고.

* * *

“무슨 약이었어?”

이 질문은 내가 떡돌이를 보자마자 하려던 건데. 뭐, 정확히 따지자면 내가 하려는 질문은 ‘무슨 약효 같아?’ 쪽이지만.

어쨌든 날 보자마자 질문은 떡돌이가 먼저 했고,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다.

“먹었어?”

“어.”

“무슨 약 같은데?”

나는 뒷짐을 지고서 히히 웃으면서 그를 놀렸다. 역시 넌 효과 없지?

떡돌이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 그러다가 재차 물었다.

“무슨 약이었지?”

“정력에 좋은 약. 대단한 신의가 지었단 약.”

나는 히죽 웃었다. 너랑은 상관없는 약이지? 거봐! 넌 먹어도 모른다니까?

떡돌이도 그 생각을 한 건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시인 자기에게 그런 약을 주다니, 놀리는 건가 의심하는 표정.

“그걸 왜 나한테…….”

“몸에 좋대.”

* * *

천 귀인과 헤어진 후.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황제는, 심궁으로 걸어가다가 돌연 멈추어 서서 오 공공에게 물었다.

“천 귀인이 무슨 의도로 ‘떡돌’에게 정력에 좋은 약을 준 것 같으냐?”

오 공공은 두 손을 모으고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신은 7세 때 거세를 하여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옵니다, 폐하.”

“나는 거세하지 않았으나 천 귀인의 의도를 모르겠다.”

황제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황제’ 쪽에 주었더라면 무슨 의도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한데 그걸 ‘떡돌’ 쪽에 주다니.

게다가 사랑보다 우정이 좋다고, 우정만 하겠다고 선언을 한 뒤에? 앞뒤가 맞지 않지 않았다.

그때. 있는 듯 없는 듯 뒤따르던 그림자 승언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서 의견을 냈다.

“분발해 보라는 뜻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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