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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6화 (36/283)

##  36화. 사칭범이 누구냐

목이 졸린 남자는 ‘켁’ 소리를 내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주먹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개원이 다른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잡아 꺾어버린 탓이다.

“무림인이야!”

“사파다!”

그 소란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으나, 이 와중에도 싸움에 익숙한 몇몇은 오히려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면서 좋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원은 흉흉한 눈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길에, 시선을 받은 남자는 덜덜 떨면서 위세를 부렸다.

“누, 누구냐. 내가 누군진 알고-.”

개원은 무표정하게 말을 잘라버렸다.

“가문이든 이름이든 내세울 필요 없다. 난 널 모를 테고, 넌 날 알 테니.”

“사파. 사파냐.”

남자는 모르겠지만 지금 개원은 말을 하면서도 진지하게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함부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이자를 그냥 죽여버릴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는 아직까지 천년비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천년비는 살아 있을 적 수많은 헛소문에 시달렸고.

- 세상 사람들, 얘 좀 보라고요! 이게 뭐가 정파 영웅이야!

이 와중에도 천년비가 ‘아이고 아이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대지 않았더라면…….

결국 개원은 스스로를 다잡고서 남자의 목을 놓고 숨을 골랐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남자는 벽에 딱 달라붙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개원의 분위기가 한결 가라앉자 덜덜 떠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호, 혹시, 혹시 내가 천년비 이름을 얘기해서 그러오? 천년비 부하요?”

이어서 남자는 억울한 얼굴로 울먹였다.

“아니, 천년비 부하면 내가 없는 말 한 게 아니란 것도 알 거 아니오.”

개원은 미간을 찡그렸다. 없는 말을 한 게 아니라니?

남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로 몹시 답답하고 분한 얼굴. 개원은 남자를 놓아주고서 물었다.

“무슨 말인가.”

남자는 욱신거리는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천년비가 사하비단에 들어간 걸 모르나? 그러면 부하도 아닌 것 같구만 왜 저런대.

주군이나 부하나 수준이 똑같구만 똑같아.

물론 속내일 뿐. 남자는 아주 공손하게 설명했다.

“사하비단이란 단체에 대해서는 아시지요, 대인?”

“안다.”

“네, 천년비가 거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직 공개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지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랍지요.”

“헛소문.”

“아니, 아닙니다. 왜, 개천문 문주 아시지요? 그 주둥이가 비틀려도 바른말만 한다 했는데 천년비가 진짜로 주둥이를 비틀어버린…….”

“그자가 왜.”

“그자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였습니다. 천년비가 사하비단 수장과 나란히 걸어가는걸요.”

개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남자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누구기에 천년비 소식에 이리 집중하지? 순간 정영검 개원이 떠올랐다. 천년비의 연인이라는.

하지만 남자는, 눈앞의 아름다운 사내가 절대로 정영검 개원은 아닐 거라 확신했다.

정영검 개원은 정의롭고 온화한 영웅 중의 영웅이지,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 목이나 조르고 그런 이가 아니니까.

하긴. 이자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판단을 마친 남자는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빼내다가 얼른 밖으로 줄행랑쳤다.

“아이고오! 밥값! 저자가 밥값 안 내고 도망치네!”

뒤늦게 객잔 주인이 펄쩍펄쩍 뛰었으나 남자는 이미 달아난 후였다.

객잔 주인은 개원을 원망스럽게 보면서도 사람 목 조르는 걸 막 본 후라서 대신 돈을 내란 소리는 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개원은 충격에 잠겨 있다가 뒤늦게 분노로 타올랐다.

‘사하비단의 누군가 천년비를 사칭하는 건가.’

* * *

“폐하도 사람인지라, 그냥 마음이 계속 변하는 게 아닐까?”

한참 만에야 떡돌이가 내놓은 답은 그리 마음에 차지 않았다.

“뭐야 그게.”

“사람은 수시로 마음이 변하니까.”

떡돌이는 대답을 하고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자기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몹시 궁금하다는 듯이.

“아이고.”

저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네. 한숨도 나오고.

“왜?”

자기가 뭔 말을 한 줄 모르나? 떡돌이는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내 대답이 오답 같아?”

그럼 그걸 정답이라고 말한 거냐.

“애써 폐하를 두둔하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어. 넌 폐하의 내, 흠. 폐하의 편이니까.”

“방금 무슨 단어를 말하려다 바꾼 것 같은데.”

“아니야. 말이 꼬인 거야.”

“정말?”

“그래. 어쨌든 네 말은 오답이야.”

“어째서?”

떡돌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너도 황제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고?”

“다른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 어딨어? 사람은 다 남이랑 다르지 뭘.”

“!”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네 말대로라면, 황제는 XX 이기적인 사람이 되잖아.”

“!”

떡돌이는 눈을 부릅뜨더니 몹시 당황스럽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격적이고 험악한 단어 선정에 놀라야 할지, 말의 내용에 놀라야 할지.”

“맞잖아. 내가 연모한다고 할 때는 싫다고 피해 다녔으면서, 내가 잘난 사내와 있는 건 싫어서 막 질투하고. 그런데 그게 그냥 생각이 변해서 그렇다고?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

“이리 말하니 좀 똘똘해 보이는 것도 같고…….”

“뭐래.”

떡돌이는 말없이 내게 기자떡을 건넸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기 변명이 이상했단 걸 알아차린 거지.

“변명 못 하는 사람은 변명할 일이 거의 없는 거라는데. 떡돌이 넌 평소에 변명할 일이 많이 없나 봐?”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내시라면 높은 분들 사이에서 말도 잘하고 눈치도 빠삭할 것 같은데. 변명 솜씨도 일품이고.

그런데 떡돌이 쟤는 왜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날 쳐다봐?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내가 콕 집어서 물은 후에야 떡돌이는 표정을 관리했다.

그의 커다랗고 고운 손이 자기 얼굴을 더듬거리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왜 웃지?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작스러운 웃음이 이상해서 쳐다보자, 그는 턱을 괴고서 놀리듯 물었다.

“언젠간 너도 알게 될까. 네가 가끔 얼마나 예리한 말을 했는지?“

* * *

“속도 좋지. 안 그럴 것처럼 행동하면서.”

기몽은 천년비가 보낸 편지를 보며 혀를 찼다.

맞은편에 앉은 염 귀인은 파리한 안색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염 귀인은 기몽이 읽는 편지가 누가 보낸 건지 몰랐다.

심문 도중 갑자기 꺼내 읽으니, 그냥 수사와 관련된 편지겠거니 할 뿐.

잠시 후. 기몽은 탁 소리가 나게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고서 물었다.

“혹시 천 귀인의 약점 잡은 거 있습니까?”

염 귀인은 딱 잘라 부정했다.

“그럴 리가.”

기몽은 미묘하게 웃었다.

“차라리 그편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무슨 소리지? 염 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기몽이 하는 말은 아까부터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시선을 느꼈나. 마침내 기몽이 편지를 탁상에 내렸다.

염 귀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편지로 향했다. 편지 가장 아래쪽에 쓰인 이름으로.

“천 귀인……?”

“천 귀인이 말하길, 염 귀인께선 자신을 음해하는 짓을 할 리 없다는군요.”

“!”

기몽은 뜻밖의 발신인 이름을 보고 놀란 염 귀인에게 떠보듯 물었다.

“어느 쪽입니까?”

무슨 소리지?

“천 귀인이 안목이 없는 겁니까, 안목이 있는 겁니까, 안목을 가린 다른 원인이 있는 겁니까.”

질문 하나를 던질 때마다 기몽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한 번씩 톡 톡 톡 두드렸다.

염 귀인은 의외로 반듯한 서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되물었다.

“어느 쪽이길 원하는가.”

* * *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하곤 한다. 문제는 그게 꼭 나한테 좋은 방향은 아니란 거지.

예를 들면 기몽. 아니, 자기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편지 한 통 읽고 염 귀인을 놓아줘?

물론 수사청에 구속되어 있지 않을 뿐이고, 처소에서 계속 수사는 받을 거라지만…… 그래도 영 이상해.

염 귀인은 범인이 아닐 것 같다는 내 서신 한 통에 기몽이 염 귀인을 풀어주다니.

“기몽 장군이 쓸데없는 배려를 했네요.”

어제 떡돌이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예리한 말을 했단 걸까. 자기가 내시란 걸 알고 있단 걸 들킨 건가.

하지만 자기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니 돌려서 표현한 건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수련 갈 채비를 하는데. 뜬금없이 염 귀인이 찾아왔다는 게 아닌가.

‘수사청에 잡혀 있는 염 귀인이 나를 무슨 수로 찾아왔단 거지?’

의아했으나 진짜로 염 귀인이 날 찾아온 게 맞았다.

게다가 염 귀인은 자기가 풀려난 게 내 덕이라고 했다, 내 편지를 본 기몽 장군이, 피해자인 내가 이렇게 주장하니 우선 풀어주겠다 했다고.

쓸데없어. 기몽, 진짜 쓸데없어. 쓸데없다 쓸데없다 했더니 진짜로 쓸데없어.

“천 귀인은 내가 풀려난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내가 뚱한 게 티가 났나. 염 귀인이 조금 화난 얼굴로 되묻는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아니요.”

그러면서 왜 물어본 거야? 뭐 어쨌든. 수사청에서 나왔다고 하니 일단 축하해주어야 하나?

“괜한 일을 했어요, 천 귀인. 이렇게 착한 척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 축하 안 해줘도 되나 봐. 본인이 알아서 선 그어주네.

염 귀인의 딱딱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영혼 없이 웃었다.

그래, 축하도 안 하고 착한 척도 안 할 테니 좀 돌아가 줄래? 보아하니 할 말도 없는 것 같구만.

하지만 도대체 목적이 무엇인가.

염 귀인은 내가 괜한 일을 했다, 착한 척하지 마라, 온갖 듣기 싫은 소리를 해 놓고서 막상 나가지는 않았다.

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 하고 소리 지르고 싶어.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마침내 염 귀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빚을 졌으니 나중에 나도 갚아는 줄게요.”

뭐라고? 말투만 보면 원수를 졌으니 복수는 하겠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남기고서, 염 귀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뭐야……?

“이보세요?”

뒤에서 불러보지만, 염 귀인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홀로 남아 서 있자니, ‘혹시?’ 하는 생각이 든다. 저게 고맙단 표현은 아니겠지?

“…….”

그런 거기만 해 봐라. 저 동글동글한 이마에 아주 땅콩을 먹일 테니.

* * *

땅콩 안 먹일 테니 도로 가 줬으면 좋겠다.

다음날. 수련을 가려는데 오늘도 염 귀인이 나타났다.

“오늘은 또 왜요?”

황당해서 묻는 내게 염 귀인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빚 갚으러 왔어요.”

“지금요?”

“네.”

그리고는 염 귀인은 내 처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들어가도 돼요?”

뭔가 싶었지만 일단 들여보내 주었다. 빚 갚으러 왔다니 뭐 도움 되는 일을 하러 왔겠거니 싶어서.

그런데…….

“왜 여기 죽치고 앉아 있어요?”

“빚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럼 염 귀인 처소에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되잖아요.”

“거기 있으면 오히려 더 모르죠. 옆에 있어야 뭘 도와야 할지 바로 알게 되지.”

얘 이런 성격이었니?

나는 황당해 죽겠는데. 염 귀인이 돌아가자 측근 궁녀인 부성은 오히려 좋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 소주께서 친한 후궁이 없어서 늘 걱정했는걸요. 친한 후궁이 생겨서 좋아요.”

“난 연얼 군주랑 친하잖아.”

“하지만 그분은 왕족이시잖아요.”

“연얼 군주가 왕족인 게 여기서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나 염 귀인이랑 친한 사이 아니야.”

* * *

“내일 또 오면, 흑합 장군이 부탁해서 쓴 편지라고 말해야겠어. 귀찮아 죽겠어.”

그날 저녁. 수련을 마친 후 청적에서 만난 떡돌이에게 나는 어제와 오늘 일을 털어놓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떡돌이를 보자 그가 마지막에 한 묘한 말이 새삼 떠올랐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그리 신경 쓸 말도 아니었지. 지금은 거의 다 잊었다.

떡돌이는 내가 염 귀인 이야기 하는 걸 곰곰이 듣다가 물었다.

“염 귀인이 네 친구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친구가 아니야. 염 귀인은 나한테 은혜를 갚고 싶어서 저러는 모양인데. 그 은혜는 내 선의에서 나온 은혜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염 귀인이 친구라 아니라 믿는 건 나 하나뿐인가.

“친구는 끼리끼리 뭉친다던데. 염 귀인이 이상해 보인다면, 결국 너도……?”

떡돌이는 오히려 날 놀려댔다.

부성도 그렇고 떡돌이도 그렇고.

염 귀인이 내 방에 몇 번 찾아왔단 이유만으로 우리가 대단한 친구가 된 것처럼 여기는 눈치였다.

뭐야. 궁전 안은 친구의 기준치가 낮은 거야? 그냥 대화 몇 번 나누면 모두 모두 친구야?

어쨌든 갑자기 이렇게 몰리는 데 골이 나서, 나는 어깨로 떡돌이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를 끌어들였다.

“그러면 너도 나랑 끼리끼리겠네?”

떡돌이는 밀면 밀리는 대로 주욱 움직이면서 되물었다.

“내가 왜?”

“친구끼리는 끼리끼리라며.”

하지만 내가 정곡을 찌르자, 그는 다시 제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난 네 친구가 아니잖아. 난 널 좋아한다면서. 그러면 친구가 아니지.”

그의 말은 그럴듯했다. 며칠 전이었다면 나도 맞다고 인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젠 아니야. 우리도 그냥 친구거든.”

내가 딱 잘라서 그가 한 말을 부정하자, 떡돌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가 그냥 친구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왜 말이 바뀌었지? 전엔 내가 널 좋아한다고 우기더니.”

“생각이 바뀌었거든.”

“?”

“생각해보니 우정이 더 좋은 거 같아. 영원하고.”

연인인 개원이는 날 버렸지만, 옆집 소꿉친구인 흑합은 자기 옛 친구인 염 귀인을 버리지 않았지.

이것만으로도 둘의 무게가 다르잖아.

“그래서 이제부턴 난 너랑 친구만 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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