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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5화 (35/283)

##  35화.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

“그쪽, 폐하 사람 아닌가? 지금 폐하를 배신하겠단 뜻?”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와 이 남자. 생긴 것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대단한 충신 인상인데. 아니었어?

흑합은 고개를 저었다.

“사소한 배신 한 번 정돈 넘어가 주실 겁니다. 한 번은 대인배가 되셔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듣겠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싫어요.”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흑합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단 표정.

“어째서? 폐하의 맨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그래?

“별로.”

“!”

이미 올라간 눈썹이 더 올라간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별로 놀랄 대답도 아닌데.”

“……당연히 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후궁이시니.”

“난 폐하의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몸은 본 적이 있어요. 그거면 충분하죠.”

와. 눈썹이 3단계로 올라갔어. 여기서 더 올라갈 수도 있을까? 시험해보고 싶다!

하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고, 대신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몸 어쩌구는 농이고. 사실 진짜 이유는 이거예요. 내가, 뒤통수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단 거.”

개원이 그 개새끼가 생각나거든.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다 마시고 가세요. 저도 다 마셨으니 갑니다.”

말을 하고 나니 여기는 내 방이구나. 하지만 도로 앉으면 사람이 참 민망해질 거야. 그냥 나가자.

이대로 내 비밀 장소로 가서 훈련 좀 더 하면 되겠지.

안 그래도 개원이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분노가 막 솟고 있으니.

“천 귀인. 잠시.”

그러나 흑합은 내가 나가기 전, 뒤에서 날 불렀다.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자, 그는 처음 보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늘 덤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할 말 해보라고 신호를 보내자 그는 황급히 말했다.

“정말로 폐하를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그분께 한 번이라면 ‘건방진’ 행동을 눈감아 주겠단 허락을 받은 상태이고-.”

“도와주진 못해요. 하지만 그쪽의 사랑은 응원할게요.”

굳이 들을 필요 없는 말 같아서 나는 말을 또 끊고 돌아섰다.

“천 귀인. 잠시.”

그러나 흑합 역시 또 날 불렀다.

“배신 아니란 거 알았어요. 그만 불러요.”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흑합이 이번에 한 말은 배신 운운이 아니었다.

“아니라고요? 방금 여기 와서 폐하를 배신, 아, 배신 아니라 했지. 하여튼 염 귀인을 위해 폐하를 팔려고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사랑이 아니라고?

“게다가 두 사람은 예전에 정혼…….”

이런. 정혼 얘기는 꺼내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우물거리자 흑합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정정해주었다.

“친구입니다. 날 때부터 옆집에서 자란.”

“정혼했던 사이라고 들었는데.”

“가문이 비슷하고 사이도 좋고 나이도 맞으니, 집안 어르신들이 정했던 겁니다.”

“친구인데 정혼했다고요?”

“친구이니 정혼하기 더 좋았던 거지요.”

와. 귀족들의 사상은 참 독특하잖아?

“이제 그분은 더는 제 정혼녀가 아니지만, 그래도 제 친구였던 과거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해서 도움을 청했을 뿐이니 노여워하지도 오해하지도 말아 주시길.”

아까는 사정을 절대로 말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사랑을 응원한다고 하자마자 바로 줄줄이 사정을 이야기하네. 오해받는 거 싫은가보다.

하긴. 염 귀인은 이미 후궁이 되었으니, 잘못하면 유부녀를 탐하는 남자가 되는 건데. 그런 오해라면 풀고 싶겠지.

하지만 대단하잖아? 우정 때문에 저런 부탁을 하다니.

“우정은 위대하네요.”

“?”

“사랑은 별거 없단 거 이미 알고. 충의는 우정에게 밀리고. 역시 우정이 최고인가.”

“……혹시 ‘충의는 우정에게 밀리고’가 제 얘기입니까?”

“네.”

흑합이 좀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짓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폐하께서 먼저 시작한…….”

그러고는 무어라 변명을 하려 했으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기 싫은가보다.

어쨌든 그의 우정은 확실하게 내게 감동을 줬다. 나는 문고리를 놓고서 활짝 웃었다.

“알았어요. 두 사람의 우정에 감동했으니, 내가 한 번 도와줄게요. 근데 도움은 안 될 거예요. 기몽 장군은 날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거든요.”

“그러면 저도 폐하의 면사를-.”

“그럴 필요 없다니까. 배신하는 거 싫다고요.”

“!”

나는 씩 웃고서 종이와 벼루, 붓, 먹을 꺼낸 다음 얼른 먹을 갈아서 종이 위에 편지를 썼다.

기몽 장군에게 쓰는 편지다. 내용은 ‘염 귀인은 저주와 관련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

나는 얼른 다 쓴 편지를 흑합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기몽 장군에게 보낼게요. 그러면 됐어요?”

그런데 왜 저래? 흑합은 편지는 안 보고 나만 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먹물이라도 튀었나?

편지를 내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렸지만…… 손에 묻어 나오는 건 없는데? 이상하네.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흑합이 작게 중얼거렸다.

“천 귀인께서는 볼 때마다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뭐래. 날 놀라게 한 건 그쪽이지. 떡돌이와 둘이서 날 속였으면서.

하지만 방금 놀랍단 건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으니 반박하지 말자.

“…….”

아니, 그보다 좀 그만 쳐다봤으면 하는데.

결국 견디다 못해서 나도 그를 눈에 힘을 주고 같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그 상태로 서로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소주! 소주! 황,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원웅이 황급히 부를 때까지.

황제가 왔단 이야기를 듣고서야 흑합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서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먼저 나가란 뜻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내 초라한 사립문 너머로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고백 좀 했다고 그렇게 열심히 피해 다니더니. 아주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있었다.

쪼잔한 황제는 물러가라고 외치고 싶지만, 감히 황제에게 그런 언동을 보일 수는 없겠지.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

나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면서 순순히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런데…… 뭐야? 황제가 일어나도 좋단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 왼쪽 오가는 걸 보니, 나와 흑합 장군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 같다.

* * *

나와 흑합 장군을 번갈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 물론 이건 감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사실 표정이 좋지 않은지 좋은지 정확하게 구분은 못 해.

그렇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침실 안에 사람은 셋. 분위기는 얼음. 와, 이런 상황에선 훈기가 들어오다가도 빠져나가겠는걸?

지금쯤 밖에서 원웅과 부성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지. 분명 그럴 거야. 소리가 다 새어 나가니까.

“둘이서 할 얘기가 있는데. 짐이 방해라도 한 건 아닌가 염려되는군.”

침묵을 깬 건 황제였다. 시원스러운 말투. 얼핏 들으면 호탕한 농담 같다.

목소리만 조금만 덜 떨렸어도 대충 농인 척 넘어갈 텐데.

흑합 장군이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막 나가려 했다고?”

“예, 폐하.”

“왜? 왜 짐이 오자마자 나가려 했지? 짐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했나 보지?”

어우 아니구나. 농담인 척할 마음도 없나봐.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오기 전부터 나가려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흑합은 덤덤했다. 자기 주군이 저렇게 나오면 당황할 만도 한데. 평소에도 황제가 자주 저러나?

어쨌든 황제 역시도 태연하긴 마찬가지. 상대가 저렇게 덤덤히 나오면 ‘내가 과장되게 반응하나?’ 싶을 수도 있는데, 덩달아 차분했다.

“그래.”

황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그럼 하던 이야기 계속하거라.”

“!”

“짐은 여기서 없는 듯 차례를 기다리고 있겠으니.”

* * *

흑합 장군이 돌아간 후.

부성은 목각인형처럼 덜컥덜컥 걸어 들어와서는, 연한 노란색과 연두색 떡을 담은 접시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놓고 나갔다.

목에 땀이 찔끔찔끔 나오는 걸 보니, 부성도 방 안의 좋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나 보다.

나는 둘만 있게 되자마자 바로 황제를 타박했다.

“되게 치사하셨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몹시도 태연하게 손을 뻗어서 떡을 자기 입에 가져갔다.

“어떤 점이?”

“그냥 잠깐 들른 건데. 뭘 그리 타박하십니까?”

“연모하는 상대가 잘난 이성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변명을 그럴듯하게 하시네요.”

반사적으로 대꾸를 먼저 한 다음에야, 황제가 나를 ‘연모하는 상대’라고 칭했단 걸 깨달았다.

나는 연두색 떡을 입에 넣고 씹다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연모하는 상대요?”

황제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래.”

와. 먹던 떡을 퉤 뱉어버릴 뻔. 내가 떫은 표정을 짓자 그걸 본 황제가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제가 무슨 표정 같은데요?”

“못 들을 걸 들었단 표정.”

“그렇다면 못 들을 걸 들었으니 이런 표정이 나왔겠지요.”

“짐이 못 들을 말을 하였느냐?”

“네.”

갑자기 또 추워지네. 분위기가 서늘해진다. 면사를 슬쩍 들어올려 보고 싶어. 그러면 저 안에서 화난 표정이 나오겠지.

타타탁, 긴 손가락으로 빠르게 탁자를 두드린 황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점이?”

* * *

“어떤 점이 못 들을 말이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진짜 웃기지 않아?”

내가 씩씩거리면서 허공에 삿대질하자, 떡돌이는 옆에서 기자떡을 먹으며 물었다.

“혹시 그 앞에 있는 사람이 폐하야?”

“앞에 누구.”

“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

“그럼, 폐하지!”

“…….”

나는 다시 씩씩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마구 콕콕콕 찌르는 흉내를 냈다.

“이건 폐하 옆구리! 이건 반대쪽 옆구리! 이건 폐하 등! 볼!”

“……이상해.”

“아주 웃기지 않아? 자기는 내가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자마자 뽀르르 참새처럼 날 쫄쫄 피해 다녔으면서. 자기는 대놓고 나더러 연모한대! 사람이 아주 이중적이야!”

떡돌이는 말없이 우물우물 떡을 먹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면, 자기가 찔리는 듯 몸을 약간씩 움찔거리긴 했지만.

쟤는 오늘따라 왜 저렇게 조용해? 결국 나는 씩씩거리던 걸 멈추고서, 떡돌이의 옆으로 가 앉았다.

“넌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서 묻자 떡돌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있나, 어디.”

“할 말 있어.”

떡돌이는 픽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같이 욕해 달라고?”

“아니.”

“그러면?”

“폐하의 심리가 뭔 거 같아?”

“!”

“완전히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럴 때만 보이는 게 있을 거잖아. 네 생각엔 폐하가 왜 저렇게 이중적으로 구는 거 같아?”

내시라 그런가. 떡돌이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황제의 내시 된 입장인데, 주군의 심리를 마음대로 추측하기 곤란하겠지. 결국 나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그러나 청개구리인가. 말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하자마자 떡돌이는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아마…….”

아마?

* * *

“에이, 말도 안 돼. 자네 상상력이 참으로 풍부한 거 아닌가?”

껄껄거리는 소리가 객잔 안을 채웠다.

제법 넓은 객잔인데. 말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손님들 대부분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개중엔 구석 자리에 앉은 개원도 포함되었다.

개원은 보는 사람의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국수를 맛없게 먹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사람을 혐오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저 덩치 큰 산적 같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침없던 그 애처럼.

“…….”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겁다. 그립고.

개원은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마른세수를 했다.

몇 입 먹지도 않았지만, 그 애를 떠올리자 목구멍이 콱 막혀서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먹을 걸 좋아하던 그 애는 이젠 아무것도 먹지 못할 텐데. 게다가 마지막에 먹은 게 그 독한 독이라니.

그리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가 원망스럽다. 도대체 왜? 왜 자결해버린 거지?

그때.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천년비는 살아 있고, 사하비단에 들어간 게 분명하다고. 그 악적을 본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야!”

개원은 손을 내려놓고서 산적 같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천년비. 그자의 입에서 우스갯거리로 등장한 이름이 그의 뇌를 꼬집었다. 이어서 커다란 분노가 치솟았다. 누가 살아 있어?

개원은 더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이 두 눈으로 그녀의 시신을 보았는데. 누가. 누가 살아 있다고?

눈 밑이 까맣게 내려온 채, 개원은 저벅저벅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할 틈도 없이, 그자의 목을 쥐고서 벽에 쾅 들이밀며 오싹하게 웃었다.

“감히 누구의 이름으로 약을 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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