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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4화 (34/283)

##  34화. 사람을 믿지 않는 남자

‘사랑 쪽이 더 클까,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클까.’

황제가 붓을 움직이다가 우뚝 멈추자 먹물이 한자리에 모여 번져나갔다.

꿈틀거리는 용 같던 필체가 흐려지자 지켜보던 정자관이 조심스럽게 알렸다.

“폐하. 붓을 움직이지 않고 계십니다.”

황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붓을 벼루에 내려놓았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글씨가 써지지 않는구나.”

“오늘은 이만하고 쉬시겠습니까?”

“그래야겠다.”

정자관이 종이와 붓, 벼루 등을 치우는 동안 황제는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천 귀인이 떡돌이에게 말하던 걸 떠올리면 사랑스러워서 열 손가락 하나하나를 깨물어보고 싶은데.

침상 위에서 거짓 사랑을 속삭이던 걸 떠올리면 ‘미리 정을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그러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기억을 잃었는데, 천 귀인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으려나.’

원래 후궁들의 공부는 황후가 맡는다. 하지만 의무가 아니다 보니, 역대 황후들의 성향에 따라 교육 정도가 달랐다.

어떤 황후는 후궁들 교육에 굉장히 공을 들여서, 후궁들이 ‘내가 후궁이 된 건지 한림원에 온 건지 구분이 안 간다’고 치를 떨게 만든 반면, 아예 손을 놓고 일말의 관여를 하지 않는 황후도 있었다.

지금 황후는 어느 쪽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관여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단체 강론이 없더라도 개인적인 공부는 다들 하니, 천 귀인도 뭔가를 하고 있을 텐데…….

* * *

“강론? 웬 강론?”

오늘은 기초 체력을 위주로 훈련하느라 동쪽 구역 안을 거의 열 바퀴는 돌았다.

그 때문에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얼른 밥 먹자 말했더니, 부성이 뜬금없이 강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너 그런 거 좋아해?”

아주 몹쓸 취향을 가졌잖아?

내가 기겁해서 치를 떨자, 원웅이 펄쩍 뛰었다.

“제가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어요, 소주! 방금 공문이 내려왔어요.”

“무슨 공문?”

“여기요.”

나는 원웅이 내민 종이를 받아 펼쳤다. 반듯한 필체로 세 줄 문장이 달랑 있었다.

“서책을 가까이하고 성인의 말씀을 곁에 두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여럿이 모여서 토론하고 의논하면 더욱 즐거울 터. 미시에 태평전으로 모이라.”

모이라. 명령이네. 선택권이 없구만.

와 젠장. 욕이 나온다. 명령이면 그냥 ‘가르쳐 줄 거 있으니 필수 참석’이라 쓸 것이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게 공부란 말은 왜 써둔 거야? 이 세상에 즐거운 게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의논하고 토론한대…… 공포다. 게다가 미시?

“얼마 안 남았잖아!”

배에서는 꼬르륵꼬르륵 난리가 났는데!

“빨리 알려드리려고 여기저기 소주를 찾아다녔는데, 통 안 보이시더라고요…… 죄송해요, 소주.”

원웅을 탓해 무엇할까. 내가 운동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계속 돌아다녀서 그런걸.

“얼른 씻고 옷 갈아입으셔요.”

힘없는 나를 원웅이 재촉했다. 결국 나는 내키지 않지만 씻기 위해 욕실로 걸어갔다.

* * *

땀을 씻어낸 뒤에는 단정한 녹색 옷을 입고 머리는 하나로 땋아 늘어뜨렸다.

겉옷 역시도 최대한 덜 하늘거리는 차림으로.

어떻게 입고 싶냐는 부성의 질문에 내가 “눈에 안 띄게 만들어줘.”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의복 선택에 문제가 있었단 걸 깨달았다.

젠장. 왜 죄다 흑색 아니면 백색 옷차림이지? 흑백 세상에 나 혼자 녹색이었다.

아주 대놓고 ‘여기 주목!’이라고 손을 흔드는 꼴이잖아?

역시나. 내가 들어가자마자 사이좋게 대화 중이던 후궁들이 묘한 눈짓을 주고받는다.

후궁들뿐이랴. 내시들은 대놓고 웃음을 참는 표정들이고.

왜 쳐다보냐고 고래고래 고함 지르고 싶은 걸 참고서, 나는 제일 뒷자리로 가 앉았다.

괜찮아. 강론을 맡은 사람만 날 못 보면 돼. 뒷자리에 앉으면 좀 덜 보이겠지.

……안 보이겠지?

‘……보이는구나.’

그러나 기대와 달리 강론을 맡은 선생은 들어오자마자 내 쪽부터 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금 인상을 찡긋한 게 전부일 뿐, 강론을 하면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더욱 안도했다. 저 자리에선 내가 잘 안 보이는 게 분명해.

들어올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잖아? 내 옷이 앞사람에게 가려지는 게 확실하다.

놀랍게도 안심하자마자 바로 잠이 몰려왔다.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덕은 아홉 가지가 있으니, 그중 하나는 친구 간의 덕이고 부부간의 덕이며 형제자매간의 덕이고…….”

내 잘못이 아니다. 강론을 맡은 저 관리의 목소리가 잠들기 딱 좋은 배경이라 그런 거지. 결국, 나는 책을 앞에 세워둔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괜찮아. 제일 뒷자리니까 아무도 못 볼 거야…….

* * *

“저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예상에 그대로 들어맞으니 참.”

강론이 벌어지는 방을 뒷문에서 바라보며 황제가 혀를 찼다.

앞문에 서 있으면 눈에 띄니 일부러 뒷문으로 와서 있었는데.

천 귀인도 마침 딱 제일 뒷자리에 앉은 터라 뭘 하는지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인 승언과 최측근 오 공공이 둘이서 눈짓을 주고받으며 ‘천 귀인의 반응을 보려고 굳이 강론까지 여신 폐하도 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수업하는 내내 천 귀인 쪽을 힐긋거리던 학자가 일부러 쾅 소리가 나게 서진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천 귀인이 퍼뜩 고개를 드는 순간.

“천 귀인께 질문하겠습니다.”

학자가 대놓고 천 귀인을 지목했다.

“이런.”

그걸 본 황제가 작게 탄식했다. 분명 천 귀인이 대답을 잘 못 할 걸 아니까.

그러나 의외로 천 귀인은 잠깐만 고개를 기웃했을 뿐 똘똘하게 대답했다.

“물어보시지요.”

그 태도는 무슨 질문을 하든 다 대답할 수 있다는 듯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했다.

그 모습이 의외인지 학자도 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학자는 ‘혹시?’ 하는 생각 중이었다.

황제가 가장 총애한단 후궁이 강론하는 내내 졸아대기에 살짝 기분이 상했고, 이에 일부러 망신을 주려고 깨웠는데.

저 태도를 보니 강론이 지루해서 졸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가 한 강론은 쉬운 내용은 아니었으나,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으니.

“그러면 묻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지목을 했기에 학자는 질문을 던졌다.

“천 귀인이 옹우자처럼, 쌀은 서 말뿐인데 먹을 입은 백 명인 상황에 처했다 가정해 봅시다. 천 귀인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겠습니까?”

정말로 강의가 지루해서 존 건가. 천 귀인은 놀랍게도 웃음을 터트렸다.

“쉽군요.”

황제는 눈을 빛내며 천 귀인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냥 천 귀인을 구경하려고 만든 자리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래도 천 귀인이 똑똑하게 대답했으면 싶었다. 태도만 보면 대답할 것도 같았고.

후궁들도 ‘맹한 것 같지만 아닌가?’ 싶은지 천 귀인 쪽을 주목했다.

곧 천 귀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강론실 안을 채웠다.

“98명을 없애면 됩니다.”

“…….”

“…….”

“…….”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한 명을 남기는 이유는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 때문이죠.”

천 귀인이 자신만만하게 웃자 강의실 안을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후궁들은 다들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뭐 저렇게 당당하게 오답을……?’

‘모르고 들으면 정답 같다!’

‘천 귀인은 부끄러움이 없는 건가?’

칭찬할 준비를 하고 있던 황제는 순간 낚여서 “영리한데.” 말할 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저 대답……?”

오 공공이 한탄했다.

“예. 참으로 당당한 오답입니다. 그래도 기죽지 않으시니 다행이지요.”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누구였더라?”

“예?”

“짐이 황태자일 때. 저 비슷한 말을 한 누가 있었는…… 아아.”

황제가 중얼거렸다.

“어릴 때 사자친왕이 저 비슷한 말을 했었지.“

* * *

강론인지 토론인지가 끝나자마자, 나는 가장 뒷줄에 있던 덕에 제일 먼저 강의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안 나오지?’

그리고 다 나오고 나서야 눈치챘다. 다른 후궁들은 강론을 진행한 관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단 걸.

수업이 끝났다고 곧장 밖으로 튀어나온 건 나 하나뿐이었다.

“젠장!”

결국, 나는 이를 갈고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이번에는 후궁들이 우르르르 빠져나갔다. 인사가 다 끝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나는 강론을 진행한 관리와 단둘만 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작별 인사하는 건 좀 이상하지? 그냥 조용히 나가자.

어차피 강의 끝나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갔을 때, 그때 이미 밉보였을 거야.

그러나 내가 강론실을 빠져나가려 몸을 돌리는 순간. 긴 종이를 둘둘 말아 챙기던 관리가 날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천 귀인이시군요.”

“아. 예.”

“학구열이 있으시군요. 천 귀인께서도 제게 뭘 질문하고 싶으십니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시지요.”

아니…… 난 그냥 인사하려고 들어온 건데. 다른 후궁들과 시기가 맞지 않았을 뿐.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인사 얘기만 꺼내고 나가면 내가 무식해 보이겠지?

결국 나는 몰래 빠져나가는 걸 포기하고서 우물거렸다.

그래도 이왕 독대하게 되었으니, 무언가 현명한 질문이라도 하고 나가야 할 분위기라서. 저 관리가 한 착각처럼.

하지만 뭐라고?

“저기.”

아. 그래. 그거 물어보자.

“예.”

“옹자가 누구에요?”

“그게 누굽니까?”

뭐?

“왜 쌀이 세 바가지 있었는데 혼자 밥 지어 먹었다던……?”

관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옹자가 아니라 옹우자입니다.”

“아! 이름이 비슷해서.”

“쌀 세 바가지가 아니라 쌀 서 말이었고요.”

“아. 이것도 비슷하네요.”

“혼자 밥 지어 먹었단 얘긴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음. 이건 안 비슷하구나. 머쓱해지네.

나는 민망한 기분을 피하기 위해 어색하게 웃었다. 상대가 안 따라 웃으니 더 민망해졌지만.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지만 정색은 할 수 있나봐. 원치 않게 교훈을 하나 얻었네.

“예.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돌아가자. 이 정도로 말 섞었으면 됐지.

“조심히 가요.”

나는 손을 흔들고서 몸을 돌려 문을 열려 했다. 그러나 한발 앞서 관리가 내 옆으로 손을 같이 뻗었다.

내 팔, 아니 천소여의 팔보다 관리의 팔이 더 길었기에, 그가 먼저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가 나며 문이 옆으로 밀려났고, 나는 관리를 향해 고맙다고 슬쩍 눈인사했다.

그리고서 내 처소로 돌아가려는데…… 이게 웬일이야? 나가서 한 반 각 정도 걸어갔는데.

그 관리도 내내 나랑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게 아닌가.

내가 가는 방향이 저 관리가 가는 방향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몹시 어색해졌다.

눈 마주칠 때마다 고개 까딱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딱 세 발자국 떨어져 선 채 말도 안 하고 한 길을 걸어가자 점차 머쓱해졌다.

차라리 아예 말을 안 섞었다면 몰라. 조금 전 대화까지 했으니. 결국 내가 먼저 은근슬쩍 말을 붙여보았다.

“저쪽으로 가시나 봐요?”

“황후 마마께서 구해달라 하신 책이 있습니다.”

“아. 황후 마마는 책 좋아하시나 봐요?”

“영민하고 현명한 분이시지요. 서책을 가까이하시고요.”

“아. 서책. 나도 서책 늘 가까이하는데.”

“그러십니까?”

“그럼요, 베고 잘 때 높이가 딱…….”

이 말은 하지 말자.

“좋아 보이지만 베고 자거나 하진 않아요.”

나는 얼른 말을 정정했다.

“그렇군요.”

상대는 별로 주의 깊게 안 듣는 느낌이지만. 그래,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또 얼굴 볼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자마자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이게 문제다.

설명할 땐 말 잘하더니. 저 관리, 참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네.

결국, 또다시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쪽은 어디 소속이에요? 폐하 명으로 강론하고 할 정도면 되게 유식할 것 같은데.”

게다가 목소리.

아까는 강론을 들을 때는 잠들기 딱 좋은 목소리라고 표현했지만, 이렇게 걸어가면서 들으니 객관적으로 참 좋은 목소리다.

그윽한 저음? 들어도 들어도 듣기 좋은 저음이 이런 목소리 아닐까 싶은데.

“한림원 학자 비원입니다.”

“와 한림원. 거기 머리에 똑소리 나는 똑똑이들만 모이는 데잖아요. 되게 유식한 분이구나.”

“똑똑이라니요?”

그렇게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는 사이. 마침내 동영궁이 눈앞에 나타났다.

안심이야. 황후에게 간다 했으니, 저 관리는 이쪽으론 안 가겠지.

“저는 저쪽으로 갑니다.”

역시! 동영궁의 입구 부근에 도착하자, 관리 쪽이 오히려 내게 먼저 작별을 고하잖아?

“조심해서 가시길.”

덤덤하게 인사한 그는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얼른 동영궁 안으로 들어왔다.

어휴. 이제 좀 편안해진다. 그래도 어려운 수업을 들은 것 치곤 잘했어. 대답도 자신 있게 했고!

* * *

비가 내리는 듯 마는 듯 하더니 나중에는 참새 오줌만큼 찔끔찔끔 떨어지는 이상한 날씨였다.

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훈련을 하러 갈지 말지 고민했다. 날씨가 참 애매해서.

계속 이 정도로 비가 내리면 괜찮지만, 이따가 갑자기 소나기로 변하면 어쩌지?

하지만 결국 훈련을 하러 갔다. 그리고 근력을 기르는 위주로 수련한 뒤, 온몸에 진이 빠져서 처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소나기는 내리지 않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이미 머리카락과 의복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휴, 소주! 감기 걸리셔요!”

측근 궁녀인 원웅이 놀랄 정도로.

나는 원웅에게서 마른 수건을 받아 들고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고서 옷이며 목덜미, 머리카락을 닦는데, 사립문 저 너머 멀리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 흑합 장군이네요?”

원웅도 다른 수건으로 내 뒷머리를 닦아 주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서 놀라 중얼거렸다.

그래. 낯익은 사람은 흑합 장군이었다. 혹시 다른 데 가나 싶었는데.

흑합은 내게로 걸어오더니 사립문 너머에서 날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 귀인.”

내가 흑합 장군과 묘한 사이라 오해 중인 원웅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기를 보며 탄성을 뱉는 게 자주 있는 일인가. 흑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 귀인.”

항상 기몽만 왔는데 흑합이 오니까 신기하네.

어쨌든 흑합은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은 아니기에, 나는 얼른 허락해주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 흑합이 내게 꺼낸 이야기는, 내가 짐작한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귀인. 염 귀인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요? 왜요?”

염 귀인은 날 저주하다가 잡혀간 거 아냐? 근데 내가 왜?

내가 황당해서 되물었으나, 흑합은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무탈하게 꺼내달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한마디 말만 보태준다면, 이 은혜는 바로 갚겠습니다.”

아니 왜 이러세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턱을 잡고 도로 위로 올려주었다.

흑합은 얼결에 고개가 들리자 떨리는 눈동자로 내 손을 쳐다보았다.

“방금……?”

이런. 얼결에 옛날처럼 굴어버렸어. 나는 흑합의 턱을 들어 올린 손을 얼른 무릎 위로 내리면서 말을 돌렸다.

“내가 염 귀인을 도와주면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건데요?”

“……왜 도와야 하는지 물어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요.”

“물어봐도 대답 안 할 거잖아요.”

날 죽이려고 달려들던 이들 숫자가 백 명이 넘는다.

옛날에 난 그놈들한테 일일이 물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덤비냐고. 대답하는 놈은 거의 없었지만.

그 덕분에 깨달음은 얻었다. 아, 사람들은 이런 거에 대답 잘 안 하는구나.

흑합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개인적인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먼저 말했겠지.

하지만 안 하잖아. 그러면 내가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역시. 흑합은 내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면사 아래 모습.”

응?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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